시민 질문 바탕으로 구정 설계
5차례 토론·12번 사회적 대화
4개 분야·20개 핵심질문 도출
전국 최초…선진 모델로 주목

"임금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지난해 여름, 광주 광산구 곳곳에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느 마을에선 퇴직을 앞둔 50대가, 또 다른 동네에선 구직 중인 청년이 비슷한 고민을 털어놨다. 광산구는 이들을 마을회관, 도서관, 카페 등으로 초대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모인 질문은 총 1천436개. 시민이 묻고 행정이 기록한 이 질문들은 '광산구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위한 녹서(Green Paper)'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엮였다.

광산구는 전국 최초로 시민 참여형 정책 설계 보고서인 '녹서'를 발간했다. 녹서는 기존의 정답 제시형 행정에서 벗어나, 질문 중심의 정책 전환을 시도한 선도적 일자리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7일 광산구에 따르면, 녹서는 정책 수립 이전 단계에서 시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쟁점을 정리해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일종의 사전 보고서다. 정책이 행정이 아닌 시민의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녹서는 '정책 설계의 민주화'로 평가받는다.
녹서는 유럽 등에서는 보편화된 형식이지만, 국내 기초지자체가 시민 참여를 통해 작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광산구는 녹서 제작을 위해 지난해 5월 '지속가능 일자리 사회적 대화 추진단'을 꾸렸으며, 같은 해 6월부터 시민 112명으로 구성된 '의제 발굴단'을 조직했다. 다섯 차례의 정례 토론과 21개 동을 순회하며 청 12차례 '찾아가는 마을별 사회적 대화마당'을 열었다.
제조업, 서비스업, 마을일자리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이 자리에 참여해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질문을 던졌다. 수집된 질문은 새로운 노동보상체계, 일하는 방식의 개혁, 일터 내 사회적 관계 재구성, 산업구조 혁신과 일자리 변동 등 4개 분야로 분류됐고, 최종적으로 20개 핵심 질문으로 압축됐다.
핵심 질문에는 "일터에서 세대 간 갈등은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요",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에게 좋은 일자리는 무엇일까요", "디지털·기후위기전환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정책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직접 체감하는 노동자들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을까요", "왜 광주에는 청년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적을까요" 등 시민들이 일터에서 실제로 마주한 고민이 담겼다.
광산구는 이 질문들을 분석하고 정리해 200여쪽 분량의 녹서로 엮었다. 녹서는 향후 지속 가능한 일자리 정책을 설계하는 데 근거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단순 설문 조사를 넘어, 시민이 직접 문제를 정의하고 행정이 이를 정책의 출발점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기존 정책 수립 방식과 차별화됐다는 평가다.

광산구는 녹서에서 도출된 의제를 바탕으로 정책 방향을 구체화한 '백서'를 오는 7월 발간할 계획이다. 이어 8~9월에는 이를 실제 사업으로 옮기기 위한 세부 계획을 담은 '청서'를 발표하고, 2026년부터는 '지속가능 일자리 특구 시범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문혜연 광산구 지속가능일자리특구추진단 지속가능특구정책팀장은 "녹서는 지역 주민들이 체감하는 문제의식을 정책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었다"며 "기초지자체가 마련한 정책 설계안을 정부가 뒷받침하는 구조로 이어져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병규 광산구청장은 "이제 행정은 시민의 삶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찾는 파트너가 돼야 한다"며 "질문을 던진 시민이 정책의 설계자가 되는 구조야말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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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보다 질문··· 시민 참여 정책만이 지속 가능" 박병규 광주 광산구청장. "정책은 현장에 있고, 발에서 나온다."박병규 광주 광산구청장은 노동운동 시절부터 지켜온 이 원칙을 광산구 행정에 고스란히 녹여내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에서 출발한 정책만이 지속가능하다는 믿음은, 그를 '녹서'로 대표되는 시민참여형 정책 설계로 이끌었다.박 청장은 "조합원이 정책의 주인이라는 생각처럼, 행정 역시 시민이 주체가 돼야 제대로 된 해법이 나온다"며 "사회적 대화를 통한 정책 설계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광주시 사회통합추진단장으로 '광주형 일자리'를 추진하던 시절, 그는 독일의 노동4.0 사례를 통해 '녹서' 개념을 처음 접했다. 디지털 전환에 대응하기 위해 수천 명의 시민 질문을 수렴해 정책으로 발전시킨 독일 정부의 접근 방식은, 지방정부가 나아갈 방향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박 청장은 "광산구는 기초지자체지만, 시민이 주도하는 사회적 대화를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구민을 위한 정책이라면, 가장 먼저 구민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판단이었다"고 말했다.녹서 제작 과정에서는 내부 반발과 의구심도 만만치 않았다. 박 청장은 "왜 시민이 정책을 논의해야 하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다"며 "갈등만 증폭되고 성과가 없을 것이란 우려도 있었지만, 민주주의란 원래 이견을 조정하며 합의점을 찾는 과정"이라고 주장했다.지방정부가 자율성을 갖고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도 짚었다. 박 청장은 "현재 일자리 예산의 80% 이상이 중앙정부 주도로 집행되고 있으며, 지방은 대부분 수탁기관에 머물고 있다"며 "이미 지방이 수행하고 있는 고용 관련 업무는 지방정부로 이관하고, 전담 부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예산 편성의 자율성도 과제로 꼽았다. 박 청장은 "지방정부가 자율적으로 쓸 수 있는 재정이 있어야 지역과 마을 단위에 맞는 일자리 정책을 설계하고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며 "이를 위한 사회적 기금, 특히 일자리 기금 조성 같은 자립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그는 정책의 지속가능성을 가능케 하는 원천은 결국 시민이라고 강조한다. 박 청장은 "그 지속가능성의 핵심은 시민을 주인공으로 모시는 민주주의의 관철에 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이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이며, 시민이 함께 만드는 정책만이 가장 바람직한 결과와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 · 광산구 '녹서', 차기 정부 일자리정책 이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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