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436개 질문이 정책으로···'녹서'에 담긴 일자리 해법

입력 2025.05.07. 17:28 강주비 기자
■지속가능 일자리, 녹서로 시작하다 - 上
시민 질문 바탕으로 구정 설계
5차례 토론·12번 사회적 대화
4개 분야·20개 핵심질문 도출
전국 최초…선진 모델로 주목
광주 광산구 지속가능 일자리 사회적대화 추진단이 지난 1월23일 회의를 열어 '녹서' 제작, '광산구 지속가능일자리회' 구성 등을 논의했다. 광주 광산구 제공

"임금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지난해 여름, 광주 광산구 곳곳에서 질문들이 쏟아졌다. 어느 마을에선 퇴직을 앞둔 50대가, 또 다른 동네에선 구직 중인 청년이 비슷한 고민을 털어놨다. 광산구는 이들을 마을회관, 도서관, 카페 등으로 초대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모인 질문은 총 1천436개. 시민이 묻고 행정이 기록한 이 질문들은 '광산구 지속가능한 일자리를 위한 녹서(Green Paper)'라는 제목의 보고서로 엮였다.

박병규 광주 광산구청장이 지난 2월22일 구청 7층 윤상원홀에서 열린 제5차 지속가능 일자리 의제발굴단 사회적 대화에 참석해 녹서 제작에 관한 시민 의견을 듣고 있다. 광주 광산구 제공

광산구는 전국 최초로 시민 참여형 정책 설계 보고서인 '녹서'를 발간했다. 녹서는 기존의 정답 제시형 행정에서 벗어나, 질문 중심의 정책 전환을 시도한 선도적 일자리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7일 광산구에 따르면, 녹서는 정책 수립 이전 단계에서 시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쟁점을 정리해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일종의 사전 보고서다. 정책이 행정이 아닌 시민의 질문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녹서는 '정책 설계의 민주화'로 평가받는다.

녹서는 유럽 등에서는 보편화된 형식이지만, 국내 기초지자체가 시민 참여를 통해 작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광산구는 녹서 제작을 위해 지난해 5월 '지속가능 일자리 사회적 대화 추진단'을 꾸렸으며, 같은 해 6월부터 시민 112명으로 구성된 '의제 발굴단'을 조직했다. 다섯 차례의 정례 토론과 21개 동을 순회하며 청 12차례 '찾아가는 마을별 사회적 대화마당'을 열었다.

제조업, 서비스업, 마을일자리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는 주민들이 이 자리에 참여해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질문을 던졌다. 수집된 질문은 새로운 노동보상체계, 일하는 방식의 개혁, 일터 내 사회적 관계 재구성, 산업구조 혁신과 일자리 변동 등 4개 분야로 분류됐고, 최종적으로 20개 핵심 질문으로 압축됐다.

핵심 질문에는 "일터에서 세대 간 갈등은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요",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에게 좋은 일자리는 무엇일까요", "디지털·기후위기전환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정책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요", "기후위기를 직접 체감하는 노동자들의 불안을 해소할 수는 없을까요", "왜 광주에는 청년들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적을까요" 등 시민들이 일터에서 실제로 마주한 고민이 담겼다.

광산구는 이 질문들을 분석하고 정리해 200여쪽 분량의 녹서로 엮었다. 녹서는 향후 지속 가능한 일자리 정책을 설계하는 데 근거 자료로 활용될 예정이다. 단순 설문 조사를 넘어, 시민이 직접 문제를 정의하고 행정이 이를 정책의 출발점으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기존 정책 수립 방식과 차별화됐다는 평가다.

광주 광산구가 지난 2월22일 구청 7층 윤상원홀에서 제5차 지속가능 일자리 의제발굴단 사회적 대화를 열고 3월 발간을 목표로 제작 중인 대한민국 최초의 시민참여형 녹서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다. 광주 광산구 제공

광산구는 녹서에서 도출된 의제를 바탕으로 정책 방향을 구체화한 '백서'를 오는 7월 발간할 계획이다. 이어 8~9월에는 이를 실제 사업으로 옮기기 위한 세부 계획을 담은 '청서'를 발표하고, 2026년부터는 '지속가능 일자리 특구 시범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문혜연 광산구 지속가능일자리특구추진단 지속가능특구정책팀장은 "녹서는 지역 주민들이 체감하는 문제의식을 정책 언어로 바꾸는 과정이었다"며 "기초지자체가 마련한 정책 설계안을 정부가 뒷받침하는 구조로 이어져야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병규 광산구청장은 "이제 행정은 시민의 삶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법을 찾는 파트너가 돼야 한다"며 "질문을 던진 시민이 정책의 설계자가 되는 구조야말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강주비기자 rkd9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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