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2년 중국이 영국에게 무릎을 꿇었다. 세계사는 이를 아편전쟁이라고 부른다. 2042년은 아편전쟁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2042년이 되면 중국의 지디피가 미국의 지디피를 추월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니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들이여, 영어 공부하는 시간의 1/10분만 할애하여 한자를 배우고, 중국어를 배우도록 하라.”고 목에 힘주어 강조하였다. 2026년 미국의 지디피가 30조 달러이고 중국의 지디피가 18조 달러이다.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의 경제력의 2/3까지 따라잡았다. 나의 예견은 실현 중이다.
분단 때문에 고통당하는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이 분단이 우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것, 한반도의 허리를 동강 자른 것은 미소 두 강대국이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소련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이 유지되고 있다. 까닭은 무엇인가? 나의 장인 어르신께서 결혼을 승낙하며 나에게 들려준 말씀이 귀에 생생하다. “광우, 자네가 전두환을 이길 순 있어도 미국은 이기지 못하네.”
나는 미국과 싸울 생각이 없다. 싸우지 않고도 분단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만 바꾸면 된다. 남북의 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면 된다. 우리 세대에 할 수 있다고 본다.
중국의 경제력이 미국의 경제력을 추월하는 어느 즈음, 한국의 민주 평화세력이 똘똘 뭉치고, 전 세계의 양심세력의 지지를 끌어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의 깨어 있는 의식이요, 평화를 향한 한국인의 실천이다. 정치지도자의 선견지명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힘은 깨어 있는 5,000만 국민의 역사의식이다.
어렸을 때 세계의 자유민주주의를 이끄는 나라는 미국인 것으로 배웠다. 약소국가 이란을 저렇게 패대기하는 것을 보니 미국은 더이상 자유 진영을 이끄는 나라가 아닌 것 같다. 지네들은 5천여 기의 핵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우라늄 농축 설비를 빌미로 초등학교에까지 폭탄을 터뜨리는 꼴을 보니 미국은 더이상 민주진영을 대표하는 나라가 아닌 것 같다. 나의 자유가 소중하면 상대의 자유도 소중한 법이다. 의견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집단은 독재집단이지 민주진영이 아니다.
그래서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새삼 자랑스러워진다. K-Pop, K-Drama만이 아니라 K-민주주의를 자랑할 때가 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힘든 특질을 과시하였다. 그것이 무엇일까?
프랑스에서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보낼 때, 루이 16세만 목을 따지 않았다. 죄 없는 마리 앙트와네트까지 죽였고, 더불어 왕비의 시녀들까지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차마 입으로 올리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혁명진영은 여성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오스트리아와 영국과 내통한다는 이유로 단두대에 올려 죽인 파리 시민이 4만여 명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학살을 정당화하였다.
K-민주주의는 프랑스와 정반대였다. K-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하여 자신의 피를 흘렸으나, 상대의 목을 치진 않았다. 평화적 경로를 통해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 1987년 6월대항쟁이었다. 지난 응원봉 시위는 K-민주주의의 평화적 특징을 완성하였다. 혁명을 이루기 위해선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기존의 혁명이론은 한국에서 폐기되었다.
K-민주주의의 한가운데에 광주가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켰다. 아무도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재야인사들과 청년학생들 모두가 골방에서 흐느껴 울 뿐이었다. 그때 일단의 광주 청년들이 독재자 박정희를 역사의 법정에 세워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였다. 김남주와 이강이었다. 이듬해 나병식과 광주 청년들은 1973년 10월 3일 문리대 시위를 주도하였고, 1974년도엔 수십 명의 광주 출신 대학생들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나는 이들을 이라고 부른다.
1980년 5월 전두환은 잔혹하게 광주를 짓밟았으나, 우리는 굴복하지 않았다. 5월 20일 차량시위를 감행하였고, 10만 명의 시민들이 철야시위를 폈다. 5월 21일 12시, 전두환은 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였으나, 우리는 굴복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은 탱크와 헬기를 앞세운 계엄군의 무시무시한 폭력에 굴하지 않았고, 도리어 전 세계인의 양심으로 학살자 전두환을 포획하였다. “친구가 죽었는디 어떻게 집에 갈 수 있어요?” 문재학과 안종철은 그렇게 쓰러졌다. 하지만 세계사는 도청을 지키다 죽은 고교생들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은 우리가 원치 않는 이름이다. 이런 뜨뜻미지근한 온건한 명칭은 광주가 힘이 없던 시절, 학살자들에게 구걸하여 얻은 타협의 이름이다. 이제 그날의 제 이름을 찾자. 광주 정신을 헌법에 새기려 하는 이즈음, 우리는 그날의 진실을 있었던 그대로 말하자. 수천 명의 시민이 피를 흘린 이 사건을 항쟁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을 항쟁이라 할 것인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중항쟁, 줄여서 ‘오월광주민중항쟁’이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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