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가 공부하러 떠나는 아들 부(符)에게 보내는 가운데, "潢潦無根源, 朝滿夕已除"라는 글귀가 있다.
"길바닥에 고인 물은 근원이 없어, 아침에는 찼다가도 저녁이면 말라 없어진다"라는 뜻이다. 작은 물구덩이에 있으면서도 천하를 주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에 대한 조롱같기도 하고, 거대한 황하일지라도 그 근원은 깊은 산 속 골짜기 옹달샘 물 한 방울로 시작한다는 교훈같기도 하다. 한유는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자기 아들에게 매사에 '근본'을 갖추라는 감계(鑑誡)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단군조선에서 삼국시대까지의 근본은 천손(天孫)의 신성성과 신이함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덕과 지세를 중시하면서 유불선을 아울러 숭상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자성리학에 기반하면서도 풍수를 떨치지 못했다. 동학혁명을 거치면서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새로운 사상이 역사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국민이 근본인 시대가 열렸다. 길고 긴 시간을 지나 주권재민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물론 1948년 정부가 수립된 이래 77년 동안 민주정부가 세워진 시기는 고작해야 15년뿐이고, 대부분 장기독재와 군부독재 그리고 부패권력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독재정권이나 보수정권에 대해서는 부패와 독선을 인정하면서 양적인 측면에서의 국가발전을 요구한 데 비해, 진보정권에 대해서는 "그래 너희들 얼마나 깨끗한가 두고보자"라는 관찰자적 태도를 보여 왔다.
그래서인지 진보정권은 보수신문의 먹잇감이 되기에 십상이었고, 국민들은 '세금폭탄'이나 '경제파탄'과 같은 비합리적 정치선전에 잘 넘어가고, 급기야는 어이없는 정치지도자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택하고 후회하기를 반복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이명박정부 이후 보수정권 하에서 4대강사업, 자원외교, 디도스공격, 용산참사, 천안함사건, 국정원 댓글사건, 세월호참사, 최순실국정농단사태, 채일병사건, 이태원참사, 불법계엄, 내란획책 등 민주공화국의 근간을 흔드는 엽기적인 사건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두 명의 대통령이 탄핵으로 파면되는 결과를 낳았다.
게다가 작금의 불법계엄과 내란획책, 탄핵과 파면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 온 지배그룹의 진면목을 살펴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지난 6개월에 걸친 우리 사회 혼란의 근저에는 헌법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권력자, 국가기강의 문란을 초래한 지배엘리트, 그들의 어이없고 비정상적인 지시에 꼼짝없이 응한 관리들, 문란한 세력을 옹호하거나 응원하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이 구가하거나 지지한 권력의 뒤 끝에 남겨진 키워드는 참담하다. 음주, 격노, 주술, 명품가방, 천공, 건진, 명태균, 대형참사, 검사왕국, 마약수사 무마, 고속도로 노선변경, 온갖 비리 의혹으로 점철되어 있다. 21세기 대명천지 K컬처를 자랑하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지배권력자를 둘러싼 연관어치고는 낯설고 부끄러울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반역사적, 반국가적, 반인륜적 전횡에 부역한 사람들이 주로 SKY, 검사, 판사, 변호사, 행정관료, 교수, 언론인 출신들이라는 것이다. 수능 1등급, 명문대, 고시를 거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직업들이다.
극렬한 옹호세력들 또한 주로 명문대 출신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등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학창시절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리고 잘하면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귀가 닳게 들어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내신과 수능 1등급 받고 명문대 진학하여 각종 고시에 합격하고 어렵지 않게 높은 자리 올라간 분들이, 지극히 보통사람들 주변에서는 참으로 흔치 않은 전력과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굽실거리고 불법을 알선하고 묵인하고 뒤치다꺼리해주고, 결국 공공성을 훼손하고 사회를 문란케 하고 국가의 근본을 뒤흔들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복잡한 심사를 뒤로 한 채, 한유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본다. 아무래도 우리 사회의 근원은 내신과 수능 1등급은 아닌 것 같다. SKY 출신이니 하버드 출신도 아닌 것 같다. 각종 고시를 패스한 지배엘리트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근원은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 우리 사회의 근원은 국민이어야 한다. 이로써 국민이 나라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국민 각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고, 공동체사회의 주인이고, 나라의 주인이고, 세계의 주인이어야 한다. 스스로 말미암고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自由自在]. 수많은 주인이 각각의 선(善)을 선택하고, 이를 모아 '공동의 선'을 만들어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제 대통령이 바뀌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국민이 주인인 '진짜 대한민국'을 열어가는 차제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신속하게 효능감 있는 정책을 마련하여 시행함으로써 국민의 마음을 풀어주고, 젊은 세대에게 새로운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이를 실현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간을 이루는 헌법 조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는 제10조일 것이다. 국민은 존엄과 가치있는 존재로 대접받음으로써 행복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국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한순간이라도 주인의 자리를 내놓거나 주인으로서 행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어이없고 괴물같은, 그리하여 우리의 자괴감과 상실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을 '어둡고 참담한 미래'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대한민국의 근원을 지켜나갈 때, 우리 모두의 존엄과 행복 또한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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