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16 유병기
나주 김태원 형제 찾아가 거병
참모장 맡으며 의병 부대 조직
사진포·무동촌서 빛나는 승리
부상 이후로도 타부대서 활약

대한제국을 빛낸 많은 의병 가운데 구례 출신 유병기 의병장(1883~1910)이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은 아니다. 하지만 유병기의 활동을 추적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김태원, 양상기 의진 구성이 그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앞서 살핀 권영회가 작전의 귀재였다면, 유병기는 조직의 귀재였다.
◆ 거병 위한 끊임없는 설득
유병기는 1883년 구례군 마산면 복곡면 강정리(현 용방면 죽정리 강정마을)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이후 마산면 청천리에서 거주했다. 그의 이명은 원집이었다. 일본군 심문조서에 '양반'이라고 나와 있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당대의 대학자인 송병선을 존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송병선은 두 차례나 '청토흉적소(請討凶賊疏)'를 올리고, 그해 음력 12월 30일 음독 자결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1907년 5월 유병기가 송병선을 찾아갔다고 나와 있다. 이는 '폭도 거괴 체포의 건' 중 유병기의 심문 조서에 '융희 원년(1907) 5, 6월경 사사하는 송병선을 방문했다'고 한 자료를 참고한 듯 하나 송병선은 이보다 앞서 사망했기에 일본군이 조사과정에서 착오을 일으킨 듯 하다.

송병선의 음독에 충격을 받은 유병기는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무렵부터 거병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 했다.
그는 간재 전우, 송사 기우만, 우담 곽종석 등을 찾아 거병을 상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당대 지조 있고, 명망 있는 선비였다. 하지만 이들은 유병기의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실제 거병에는 이르지 못했다.
곽종석의 경우 의병 역량의 불충분하고, 임금의 군대와 싸울 수는 없는 점, 일제에 오히려 침략을 명분을 준다는 점을 들어 거절했다. 대신 10년간 교육에 힘을 다하고 천혜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했다. 유병기는, 담양·장성·함평·보성·정읍·무주 등 여러 지역의 군수에게도 서신을 보내 거의를 설득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병기의 빛나는 공적은 관련 판결문과 심문조서, 일본군 전투 기록 등 곳곳에 넘쳐나고 있다.
심문조서에는 '유병기는 통감부를 무너뜨리고 일본군을 격퇴하고 국권을 회복할 생각으로 김태원, 김율 등과 의논해 의병이라고 칭하는 비도를 모집해 일본군과 싸움과 동시에 일본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의 폭력을 행사했다'고 언급돼 유병기의 거병 동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판결문에도 '한국의 시운이 없음을 좌시하지 않고 이를 회복하려는 희망으로 동지를 규합해 의병을 일으켜 여러 차례 수비병 혹은 헌병과 교전했다'라고 해 무너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일본군과 물러서지 않은 결전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 '거괴' 김태원과 훌륭한 전과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며 의병전쟁이 본격화됐다. 나주에서 김태원·김율 형제가 거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유병기는 김태원을 찾았다. 이후 백낙구·조기채와도 합류해 거의를 논의했다. 유병기의 심문조서에는 유병기가 김태원에게 거병할 것을 먼저 제의한 것으로 나와 있다.
김태원을 상장으로, 김율을 중군장으로, 백낙구를 후군장으로, 조기채를 기포장으로, 유병기는 참모장이 됐다. 이렇게 해 이른바 김태원 의병부대가 결성됐다. 유병기를 조직의 귀재라고 부르는 까닭이다. 김태원도 작전 수행 중 유병기의 판단을 존중할 정도로 신뢰가 깊었다.
판결문에는 '유병기는 융희 2년(1908년) 8월 김태원이란 자가 수괴가 돼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면서 그 부하로 투입해 참모라는 명목으로 도당 약 6백 명을 모아 총 약 4백 정을 수집하고 이 일단의 도당과 함께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전남 영광, 함평, 장성, 나주, 광주, 창평, 담양, 동복 등 각 군내에 제멋대로 다녀 위 수괴 김태원의 폭동 행위를 방조했다'고 적혀 있다. 유병기가 의진을 결성하고자 전남 곳곳을 휘젓고 다녔음이 드러난다.
김태원 의진 결성은 사실상 유병기의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군수품은 1장의 통문으로 쉽게 조달할 수 있을 정도로 민중의 신망도 높았다.
김태원, 유병기 의진은 1907년 9월 중순 흥덕군 사진포에 있던 일본인 가옥 3동 소각, 12월 동복 신평에서 일본군 3명 사살 등의 성과를 거뒀다. 1908년 2월 무동촌 전투에서는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쌍안경 1점, 단검 1점, 일본군도 1점을 노획했다. 무동촌 전투는 엄청난 전과였다. 다만 김태원이 위의 전리품을 집에 가져다 놓은 것을 아들 경천이 가지고 놀다 일본군에 끌려가 하루 종일 고문받은 끝에 평생 반신 불구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 양상기와 불태운 마지막 불꽃
장성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유병기 자신도 우측 어깨와 우복부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영광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을 벌여 일본군 기병 중위 등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광주와 나주의 경계인 용진산, 순창 산막 등 도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막 전투에서는 후군장 백낙구가 전사했다.
1908년 5월 30일 창평 용흥사에서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기포장 조기채를 비롯해 많은 의병이 전사했고, 유병기 자신도 왼쪽 어깨와 좌복부에 총상을 입는 등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부상을 입은 유병기는 다른 의병 부대로 합류해 활약을 이어갔다.
판결문에는 '유병기는 동 2년(1908년) 10월(음력 9월) 경에 전기 양상기가 다중을 모아 친히 수괴로 돼 폭동을 일으키는 정을 알고 그 부하로 투입해 참모장이라는 명목의 임무를 맡고 총을 휴대한 도당 약 70명과 함께 동년 3월(음력 2월 경)까지 동일한 의사를 계속해 동도 장성·담양·광주·창평 등 각 군내에 횡행해 위 수괴 양상기의 폭동 행위를 방조했다'고 적혀있어 유병기가 양상기 부대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알려준다.이후로도 유병기는 양상기와 함께 의진을 형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의 활약상을 다음 판결문에서 찾을 수 있다.
'제6. 피고 양명은 동 3년(1909년) 3월 2일 밤(음력 2월 1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30정을 휴대한 도당 약 4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동면 남산리로 난입해 동리에 거주하는 정준필 및 국사윤을 붙들고 동군 두면 연동으로 연행해 동소에서 위 양인에 대해 돈 1만 냥을 지출치 않으면 죽인다고 위협해 약 3~4일 후에 동소에서 그 마을의 이장 남준여의 손을 거쳐서 위 양인에게 각각 돈 2백 냥씩 겁취했고,
제7. 피고 2인은 동년 3월 5일(음 2월 14일)밤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을 휴대한 도당 약 50여 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 강정리로 난입해 그 마을 부자 수명을 붙들어 발포 위협한 뒤 한충여에게 쇠 돈 3냥 외에 1점과, 김도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2점과, 서권일에게서 돈 40냥 외에 1점과, 한내진에게서 돈 17냥 외에 1점과, 김자삼에게서 돈 22냥 외에 1점을 겁취했고,
제8. 피고 양상기는 동년 4월 11일(음력 윤 2월 21일)에 재물을 겁취할 목적으로 총 약 25정을 휴대한 도당 약 30명과 함께 동도 담양군 목면 남산리로 난입해 그 마을의 이장 김석필에 대해 군수금을 차출하라고 협박해 동인에게 돈 1백 50냥을 겁취했고,(이하 생략)'

한편 양상기와 연합의진을 구성했던 유병기는, 양상기와 부대 운영에 이견이 있어 의진을 나와 고향 구례로 돌아와 재기를 노리던 중 일본 군경에 체포됐다. 이후 광주로 이송돼 양상기와 함께 재판에 넘겨졌다. 1910년 3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대구 공소원에 공소했으나 기각됐다. 서울고등법원 형사부에 상고했으나 역시 기각됐다. 1910년 6월 16일이었다. 재판에 관여한 판사가 5명인데, 재판장을 포함해 3명이 일본인, 2명이 한국인이었다. 1909년 사법권이 일본에 넘어간 후 가혹한 처분이 내려진 결과였다.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1989년 대전 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이름은 지리산역사문화관에서 구례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유병기가 태어난 강정리와 거주하던 청천리는 모두 마을이 없어진 상태다. 특히 청천리는 가구수가 70호 정도 되는 마을이었으나 여순사건 이후 많은 주민들이 행방불명되고 마을 전체가 방화로 불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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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산 호랑이의 기개, 대를 이어 전해지다
광양시 진상면 비촌마을에 위치한 황순모 의병장(왼쪽)과 황병학 의병장(오른쪽) 기념비.광양시 제공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광양 출신 황병학 의병장이 1908년 7월 26일 의병을 일으키면서 발표한 격문이다. 200여 명의 의병들이 모였다. 황병학은 의병장에 추대됐고, 5촌 당숙인 황순모는 선봉장을 맡았다. 그들 대부분은 산포수들이다. 사냥꾼들이라 지리에 밝고 사격술도 능해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졌다. 이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황병학은 광양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만주에서까지 독립운동에 힘쓴 남도 의병장이다.황병학 의병장이 태어난 비촌마을 옛 터인 수어댐 전경.광양시 제공◆광양 헌병분견소 농락한 의병부대조선이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며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던 1876년 1월 11일, 황병학은 광양군 진상면 비평리에서 아버지 황재모와 어머니 순흥 안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영문(英文)이다. 어려서부터 서당과 향교에서 한학을 배웠고, 광양의 명산 백운산을 오르내리면서 사냥을 즐겼다.황병학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 봉기를 계획했다. 그러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치열한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자 자신도 의병을 일으켰다.그의 첫 전투는 1908년 8월 5일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 전투였다. 황병학은 망덕포구에 일본 선박 1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격과 수영에 능한 150여 명을 뽑아 특공대를 편성했다. 80여 명으로 편성된 제1대는 10여 척의 일본 선박을 기습 공격했다. 여러 척의 선박을 침몰시켰을 뿐만 아니라 잠에 취해 있던 일본인 다수를 사살했다. 제2대는 망덕포구 부근의 일본인 주거지를 습격했다. 10여 채의 일본인 가옥을 불태우고 4명의 일본인을 사살했다.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다수의 무기도 노획했다.황병학 의병장이 첫 전투를 치른 광양시 진월면 망덕포구 전경.광양시 제공망덕만 전투에서 승리한 황병학 의병부대는 백운산을 거점 삼아 일본군을 끊임없이 공격했다. 1908년 9월 초순, 순천 주둔 헌병분대와 광양 헌병분견소 병력이 합동작전으로 백운산에 주둔한 황병학 부대를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00명의 정예 의병을 특공대로 편성해 광양 옥곡면 옥곡원 뒷산 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기습 공격을 단행해 적들을 다수 사살해 퇴각시켰다. 황병학은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적은 지금 당황하고 있다. 전투 대열을 갖추기 전에 박살을 내야 한다. 기운을 내라"고 의병들을 독려해 결국 승전을 거두었다.한 달여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돌아온 황병학 의병장은, 1909년 1월 일본군 습격을 계획했다. 일본군이 의병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주력하자 광양 헌병분견소 본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백운산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공격 루트와 퇴각 루트를 달리했다. 1909년 1월 23일 밤, 50여 명의 특공조가 광양 헌병분견소에 은밀히 잠입해 총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 헌병들을 전원 포박한 다음, 10여 정의 총기를 빼앗았다.이에 일본군은 대대적인 보복 작전을 전개했다. 황씨 집안의 집성촌인 비촌마을 주민들에게 온갖 고문을 가했고, 마을 전체를 불태워 버렸다. 황순모는 가족들의 후환을 걱정해 귀순했지만,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일본군이 백운산을 포위하며 압박을 가하자 황병학은 백운산을 포기하고 여천 앞바다에 있는 묘도로 근거지를 옮기려고 했다.1909년 7월 19일 광양면 황금동 나루터에서 묘도로 가려고 선박에 승선하고 있던 중, 이 사실을 알고 대기 중인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100여 명의 의병 가운데 절반 이상이 희생당했다. 황병학은 부상을 입은 채 겨우 포위망을 뚫고 피신했다. 특히 일본군이 전개한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타격을 입고 재기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황병학 의병장은, 국권 회복의 새로운 방도를 모색했다.황병학과 황순모 등 광양 출신 독립유공자 34명의 이름이 새겨진 광양 독립유공자 추모탑.광양시 제공◆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손자는 민주화운동황병학은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18년 고흥에서 활동하던 기산도를 만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했다. 그러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군자금 모금책임자로 훗날 임시정부 국무위원까지 역임한 함평 출신 김철을 만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남북도 의무금 모집단을 조직하는 데 동참했다. 의무금 모집단에는 기산도·김철·김종택·이인행·박은용·김영탁·민치환·이문복 등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국립대회취지서, 고유문 등을 인쇄해 순천, 곡성, 남원, 순창 일대에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부호들을 찾아다니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1919년 10월 동료 김종택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탄로 나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외 망명을 결심했다. 11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 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만주로 망명했다.병학이 만주로 망명한 후인 1920년 7월 19일 일제는 궐석재판을 통해 징역 3년형이 처해졌다. 그는 주로 용정촌, 흑룡강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1923년 봄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다 의주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평양형무소에서 4년 가까이 옥고를 치르고, 1927년 출옥해 귀향했다.이후에도 조국 광복에 헌신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해 재차 만주로 망명을 시도했다. 의병 전쟁 중에 입은 총상의 악화, 일경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 그리고 4년여에 걸친 감옥 생활의 후유증으로 인해 1931년 4월 23일 5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비촌마을에 있는 황병학의병백운산전투비.광양시 제공현재 황병학의 흔적은 그의 첫 전투지인 광양 진월면 망덕포구와 그의 고향인 진상면 비촌마을에서 찾아 볼 수 있다.한편 황병학 아들 황길현은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다. 손자 황호걸은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이다. 황호걸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광주일고 부설 방송통신고에 다녔다. 3학년이던 황호걸은 도청 지하실에서 시신 닦는 일을 했다. 시신을 안치할 관이 부족해지자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가다가 주남마을 앞에서 계엄군들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유명한 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 때 희생됐다. 본인은 '독립운동', 아들은 한국전쟁 '학도의용군', 손자는 '5·18 유공자'였다. 황병학 가문은 의향을 정체성을 빛낸 대표적 가문이라 하겠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대한제국 장교, 남도 누비는 의병장 되다
- · 호랑이 잡던 지주의 아들 어등산의 별이 되다
- · 남도 최고 지략가, 연합의진 지휘하며 승리 이끌다
- · 치열하게 항전했던 보성 의병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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