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들던 함평 서생 '전남 제일' 의병장 되다

입력 2025.06.19. 18:26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⑥ 심남일
함평 월야 의병 주축으로 거병
영암 국사봉서 ‘호남의소’ 결성
조직·군율·체계 갖춘 부대 변모
남도 누비며 2년간 26회 전투
거성동 전투 일본군 70명 사살
함평군 월야면에 위치한 남일심수택의병장기념관

전남 함평군 월야면에는 전남 제일의 의병장을 자처하며 우리에게 '남일'이라는 이름이 익숙한 '남일 심수택 의병장 기념관'이 있다. 사진 속 조부를 빼닮은 손자 심만섭 옹이 기념관 옆에 상주하며 기념관을 관리하며 조부의 빛나는 역사를 후세에 전하려고 애쓰고 있다. 심만섭의 장남 심승남과 차남 심창남 목사는 증조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기념관 입구 벽에는 심남일이 남긴 시들과 함께 '호남의소'라는 깃발이 그려져 있다. '호남의소'는 심남일 의병장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남일심수택의병장기념관에 모셔진 심남일 의병장 근영

◆의병대장이 된 함평 월야의 훈장,

심남일은 1871년 함평 월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 월야 출신 의병들을 주축으로 거병했는데, 1919년 함평 문장 만세 시위에서도 월야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다. 의병 활동이 왕성한 곳에서 만세 시위도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동학농민전쟁과 이어진 의병전쟁의 피해가 컸기 때문에 전남 지역민의 3·1운동 참여가 적었다는 인식도 있으나, 이는 전남 지역 시위 규모를 축소시킨 일제의 의도와 지역의 항쟁 역사를 찾으려는 후대의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실제 함평이나 영광 등 3·1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곳은 동학, 의병 전쟁도 왕성히 벌어졌다.

서당 훈장이던 심남일의 본명은 '심수택'이었으나 지역 유생들과 거병하며 '전남 제일의 의병'이 되겠다는 결의를 담아 호를 '남일'로 했다. 이후 호는 그의 이름처럼 굳어진다.

그는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떨쳐 입고, 말을 타고 남도를 바람처럼 달리리. 만약에 왜놈을 소탕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모래밭에 죽어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시를 지었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의 결연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심남일은 거병 후, 김태원 의병부대와 연합해 영광, 장성, 광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1908년 4월에 김태원이 어등산 전투에서 순국하자 심남일은 부대를 이끌고 의병 활동이 가장 왕성한 영암지역으로 이동했다. 당시 영암, 나주 지역에는 소규모 의병부대들이 활발히 활동이고 있었다. 영암으로 이동한 심남일은 영암 금정에 있는 국사봉에서 영암 의병을 주축으로 '호남의소(湖南義所)'를 결성했다. 이때 심남일 의병장의 핵심 참모였던 강무경은 영암 금정 출신 양방매와 혼인했는데 양방매 본인은 물론 그의 오빠도 의병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사봉에 진지를 구축한 심남일은, '호남의소의 대장'이라는 뜻의 '호남의장(湖南義將)'이라는 직인을 사용했다. 호남의소 총사령관임을 알려준다. '호남의소'라는 부대 명칭이 있음에도 일제는 '남일파'라는 이름으로 그의 의병부대를 따로 불렀다. 이는 '호남의소' 대장이라는 심남일의 지위를 애써 격하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

남일심수택의병장기념관에 조성된 심남일 의병장 동상

◆서생이 만든 부대의 놀라운 성과

서당 훈장 출신으로 지략이 뛰어난 심남일은 '모사장', '서기겸 모사', '선봉장', '중군장', '후군장', '탐매' 등 여러 조직체계를 갖추며 '호남의소'를 체계적인 전투부대로 변모시켰다. 호남의소 선봉장 강무경, 중군장 안찬재, 모사 권택 등이 유생들이었다는 점도 부대의 성격을 이해하게 한다.

한편 심남일은 의병부대가 지켜야 할 군율 10가지를 공포했는데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군율을 어긴 자는 목을 쳤다. 반면 전쟁 중 궁핍한 백성을 보았을 때는 부족한 군자금을 과감히 풀어 구휼했다. 곳곳의 의병 부대가 심남일을 중심으로 연합 의병부대를 결성하는 원동력이 됐다.

호남의소 사령부가 있는 영암 국사봉은, 산 정상에 포대까지 설치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일본군이 국사봉으로 접근하면 정상에서 대포를 쏴 접근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일본군 전투일지인 '진중일지'에 보인다. 일부에서는 심남일 의병장이 거느린 의진은 일정한 근거지가 없다고 하나, 이는 국사봉의 존재를 살피지 못한 데서 나온 오류다.

국사봉에 본부를 둔 호남의소는, 나주, 함평, 영암, 보성, 장흥, 강진, 해남 등지에서 신출귀몰 유격전을 벌였다. 1908년 4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노구두, 함평 석문산, 해남 성내, 능주 석정, 남평 거성동, 보성 천동, 1909년 7월 장흥 봉무동 전투에 이르기까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26회 이상의 전투를 치러 일본 군경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뛰쳐나가고, 강현수(강무경)는 풍운 조화를 부려 공중으로 날았다'라는 동요가 어린이들 사이에 불릴 정도였다.

'호남의소'는 직할부대와 다른 지역 의병부대를 엮은 일종의 연합군이었다. 의병부대의 조직을 보면 여러 지역 의병장이 부장(副長)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군장인 이덕삼은 해남 의병장 출신이고, 역시 기군장 김치홍은 영암 의병장, 군량장 이세창은 장흥 의병장, 중군장 안찬재는 보성 의병장이었다. 심남일 부대 의병부대 부하 장수들은 독자적 의병부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연합 의병부대를 조직한 심남일은 다른 지역에서 대규모 연합 의병부대를 이끌었던 안규홍, 전해산, 조경환 의병부대와 연합전선을 구축해 독립전쟁을 치렀다. 호남의소는, 한말 남도 의병의 주특기인 '분진'과 '합진' 전술을 능란하게 구사했다.

심남일은 현지 사정에 밝은 예하 부대의 판단에 따라 유격전을 전개해 일본군에 타격을 가했다. 유명한 남평 거성동 전투 당시 작전참모인 모사 권택이 "한 부대는 동쪽 대치에 매복해 능주의 적을 방어하고, 또 한 부대는 대항봉에 매복해 광주·나주·남평 고을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서남 간 월임치에 매복해 영암의 적을 방어하고, 한 부대는 덕룡산 상봉에 매복하고, 한 부대는 병암치에 매복해 서로 응원하게 하라"고 한 작전 지침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호남의소가 계획을 치밀히 세워 부대를 조직적으로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투에서는 박민홍 의병장의 아우 박여홍도 전사하는 등 상당한 피해가 있었으나 일본군 70여 명을 사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게릴라전이 아니라 전개된 사실상 전면전이었다. 호남의소가 세계 최강 러시아를 격퇴한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였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남일심수택의병장기념관 앞에 그려진 벽화

◆39세 순국 "원수 두고 어찌 눈 감나"

치밀한 계획과 높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2년 가까이 전남 중·남부 지역을 휘젓고 다닌 호남의소였으나, 1909년 7월 순종의 의병해산 명령이 내려지자 심남일은 눈물을 머금고 전투를 중단한다.

심남일은 평생의 동지였던 강무경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면서 능주의 풍치굴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었으나 밀정의 신고로 1909년 10월 9일에 체포됐다.

감옥에 갇힌 심남일은 "왜적과 매국노를 제거하지 못한 것이 첫 번째 한이요, 노모를 봉양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한이며, 죄 없는 의병들이 갇혔으나 구해주지 못한 것이 세 번째 한이고, 죽은 후에 순절한 충신들을 볼 면목이 없는 것이 네 번째 한"이라고 절규했다.

그는 대구 감옥에서 1910년 10월 4일 순국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이날을 기념해 심남일 기념사업회에서는 순국기념 행사를 해마다 하고 있다. 참고로 올해는 행사를 당겨 9월 중에 할 예정이라고 한다.

심남일은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초야에서 십년 동안 글 읽던 몸이/ 한 번 전쟁에 나서니 죽음이 가벼웠네/ 나라의 원수를 버려두고 천지가 어두워지니/ 내 죽는 날 어찌 눈을 감을 수 있으랴.'

광주 남구 광주공원에 조성된 심남일의병장순절비
심남일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켰던 덕동고개에는 그의 이름을 따 '남일공원'이 조성돼 있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기에도 충분한 그의 공적 재평가할 때가 됐다. 박해현 교수가 집필한 '영암의병사 연구'(2019)에는 호남의소를 중심으로 그의 공적이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함평군 월야면에는 '남일 심수택의병장기념관'이, 의병을 일으켰던 함평군 신광면 덕동고개에는 남일공원이 조성돼 있다. 광주공원에는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후손들은 그의 기록을 정리하며 역사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심남일 의병장의 삶은 항일 정신의 상징이자, 전남 의병사의 중심축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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