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과 국가폭력의 역사에서 성폭력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공동체 전체를 짓밟기 위한 지배의 수단이었다. 총과 칼로 생명을 빼앗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존엄까지 파괴함으로써 ‘완전한 복종’을 강요하는 폭력의 상징이었다. 특히 여성의 몸이 공동체의 명예와 동일시되는 사회에서 성폭력은 한 개인을 넘어 그 집단 전체를 모욕하고 파괴하는 메시지로 기능해 왔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 잔혹함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 결과 나타나는 성폭력의 양상은 피해자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파괴한다. 피해자는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수치와 분열 속에서 회복이 어렵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사회적 상처를 남긴다.
◆ 관심 밖이었던 여성들의 피해
1980년 5월 광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광주를 포위한 계엄군에게 시민은 보호해야 할 국민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총칼과 장갑차, 헬기로 무장한 군인들은 거리의 시민들을 이유 없이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학생과 노인, 여성, 임산부조차 예외가 없었다. 급기야는 실탄 사용으로까지 확대됐다. 도저히 자국민을 향한 폭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잔혹한 행동을 서슴잖게 행했다. 연행된 시민들은 군부대와 경찰서에서 장기 구금, 구타를 당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
50여 년의 세월 동안 계엄군의 폭력만을 기억하며 국가폭력의 잔인성에 대해서만 목소리 높일 뿐이었다. 5·18의 진상규명은 항쟁의 역사만에 초점을 뒀고, 도청을 지킨 시민군만 부각됐다.
그리고 그 안에는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또 하나의 국가폭력이 존재했다.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이었다. 잘 몰랐다며 혹은 애써 외면하며 당시 여성을 향한 성폭력과 성적 가혹행위에 대한 언급을 꺼려했다.
그렇다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를 알리고 규명하려는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88년 ‘국민신문’에 계엄군에 끌려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보도된 것이 시작이었다. 이어 1989년 청문회에서 증언이 나왔고 1996년에는 수기도 발표했었다. 이 밖에도 성적 피해 사례가 언급된 적도 있고, 연구자들이 채술한 구술 채록이 다큐멘터리나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1995년 12월에 5·18특별법이 제정된 것에 비추면 꽤 이른 시기에 증언이 나온 것이었다.
◆ 끝나지 않은 생애사적 고통
5·18 당시 계엄군이 자행한 폭력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잔혹해 피해자의 몸에 단순히 상해를 입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가 몸의 기억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포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무섭다. 성폭력은 자신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피해와 강도는 더 심각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이 사실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5·18의 진실 규명은 발포 명령과 학살의 구조를 밝히는 데 집중됐고,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 피해는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다. 피해자들 역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성폭력을 여성의 품행 문제로 비난하거나 ‘남부끄러운’ 피해로 쉬쉬하기를 종용했던 당시 우리 사회 분위기는 여성의 성폭력 증언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결국 피해자들은 자신을 탓했고, 몸의 상처보다 깊은 정신의 상처를 평생 끌어안아야 했다.
1988년 언론 보도와 1989년 청문회 증언, 1990년대 기록과 증언이 있었지만, 사회는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8년, 5·18 38년 만에 계엄군 성폭력이 국가 차원에서 공식 조사되며 비로소 진실 일부가 확인됐다. 피해자 한 사람의 인터뷰가 나오면서 ‘5·18 계엄군 성폭력 공동조사단’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공동조사단이 전수조사를 통해 파악한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는 52건이었다. 이 중 진상 규명과 피해를 가리기 어려운 사례를 제외하면 19건이었고 이 중 16건의 피해 사실을 진실로 인정했다. 하지만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침묵의 피해자들이 여전히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16명의 우리 어머니, 누이들이 밝힌 피해는 끔찍했고, 이후의 삶은 처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들은 5·18 당시 여고생이었고, 대학생이었고,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20대 여성이었으며, 임신부도 있었다.
21세의 한 누이는 5월18일 시내 쇼핑을 나섰다가 피해를 보았고, 계엄군들은 네 살 아이가 있는 임산부까지도 돌아가면서 거리낌없이 나쁜 짓을 했다. 다른 계엄군은 여고생에게도 총을 들이대며 산속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여성들의 성폭행 피해도 끔찍하지만, 그 후의 삶은 더 끔찍했다. ‘그 때 왜 거기에 있었을까’, ‘내 탓이다. 인과응보다’며 피해자인 자신을 탓했으며, 이후 당시의 상황이 악몽으로 변해 지속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불면증을 겪어 수면제나 안정제 없이는 잘 수 없게 됐다. 어린 아이가 있던 피해자는 아이에게 ‘더러운 젖’을 먹이는 것이 괴로워하고 외출하기를 꺼렸다.
상당수의 피해자는 정신병원에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고, 반복해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피해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던 어머니는 성장한 아들이 직업군인이 되려고 하지 못하게 막아서다 자식들과 의절하기도 했다.
◆‘518 열매’의 결실을 기대하며
5·18 당시의 성폭력 피해의 진실이 너무 늦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아니, 긴 세월 동안 왜 몰랐을까. 우리가 알지 못했던, 관심 밖이었던 5·18 성폭력 피해를 규명하기 위해 2024년 8월29일 16명의 피해자와 가족들이 모여 ‘518열매’를 꾸렸다. 전문위원이 상담자 역할을 맡고, 매달 증언 형식의 치유회복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5·18의 진실은 총탄과 학살을 규명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날 벌어진 성폭력과 여성 인권 유린의 역사까지 온전히 기록될 때 비로소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뤄진다. 피해자들의 용기를 더 이상 개인의 아픔으로 남겨둬선 안 된다.
국가와 사회는 공식 사과와 명예 회복, 충분한 치유 지원에 나서야 하며, 교육과 기록 사업을 통해 후세가 반드시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침묵은 가해를 지우는 일이고, 기억은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너무 늦었지만, 이제라도 5월의 감춰진 고통까지 함께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것이 광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마지막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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