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블랙 화가' 김종일 화백(1941~2023)은 "블랙은 모든 빛깔의 원천"이라고 했다. 존재하는 모든 색이 섞이면 블랙이 된다는 것. 블랙은 모든 색을 흡수하기에 우주공간과 같다. 또 보는 곳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르기에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색이라고 평가했다.
'백색 회화의 거장'으로 알려진 이동엽 화백(1946~2013)은 한국미를 순백의 순수로 해석했다. 자신의 작품은 조선백자의 깊은 백색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것. 그에게 흰색은 단순한 하양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이자 의식의 여백이며 사고를 담는 그릇이다.
흑과 백은 우등이나 열등을 상징하는 요소가 아니다.
블랙은 모든 빛깔의 원천이 된다
최근 넷플릭스의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 '흑백요리사2'가 인기를 끌고 있다. 시청자들은 심사위원이 "가장 맛있게 먹었다"고 극찬한 요리를 먹기 위해 직접 셰프들의 식당을 찾고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음식을 보면 레시피 분석에 나서기도 한다.
흑백요리사는 셰프들이 만든 음식을 평가해 생존 여부를 가름하는 차가운 승부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그 이면에는 단순히 오감만으로 표현하지 못한 결도 담겨 있다.
프로그램을 보면 '흑'과 '백'이라는 상반된 색의 개념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다양성의 가치를 알 수 있다. 마치 흑과 백 사이에 담겨 있는 오만 가지 색을 빚어내는 과정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셰프들은 제작진이 발표한 똑같은 주제와 재료를 활용해 요리하지만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 내놓게 된다. 이는 다양성의 가치가 강조되고 여러 문화와 시각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현대사회의 한 단면처럼 읽힌다.
나이나 경력에 상관없이 과감하게 문을 두드린 도전정신도 놀랍다.
이번 프로그램에 출사표를 던진 후덕죽(候德竹) 셰프는 '57년차 중식 대가'다. 신라호텔 상무로 요식업계에선 전무후무한 '셰프 출신 그룹 임원'이기도 하다. 에멜무지로 나섰다가 자칫 자신의 명성에 흠이 생길 수 있는 선택인데도 과감히 도전장을 내민 이유에 대해 그는 "57년이란 게 긴 세월이지만 끝도 없는 것이 요리 기술이다"고 말했다.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흑·백수저 구분없이 2인1조로 자유롭게 팀을 꾸려 하나의 음식을 완성하는 '흑백 연합전'이었다.
선재스님과 김희은 셰프가 만든 두부 김밥과 전복 김밥을 먹은 백종원 심사위원은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는 게 너무 느껴진다"고 꼬집었다. 프렌치 전문 박효남 셰프와 중식 기반 최유강 셰프의 랍스터 요리를 맛본 안성재 셰프는 "중식의 비중이 작다"며 한 사람에게만 치우친 음식이라고 평가했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같은 팀을 이룬 셰프와 만든 음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겉돌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최고의 음식은 경험과 창의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셰프 간에 보여준 존중과 예의다. 프로그램에서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함께 칼을 들고 진검승부를 펼치는데 승자와 패자 모두 서로를 존중하고 최선을 다한 과정에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이는 진영이나 흑백논리를 앞세워 대립하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풍경과 대조적이어서 오랫동안 잔상이 남았다. MZ세대와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세대 간 갈등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온라인 소통의 방 등에서는 다른 세대를 겨냥한 날 선 대화들이 가득하다. 기성세대는 젊은 층을 'MZ'라는 프레임에 가두고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집단'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반면 젊은 층은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칭하며 소통 불가능의 상대로 규정한다. 여기에 젊게 살고 싶어 하는 4050을 비난하는 '영포티'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면서 세대차를 넘어 가치관의 충돌로 번지고 있다.
흑백 연합전 1위를 차지한 음식은 흑수저인 '술 빚는 윤주모'와 백수저인 임성근 셰프가 지혜를 모아 완성한 '박포갈비와 무생채 쌈'이었다. 연륜과 경험의 임성근 셰프와 창의적이고 섬세한 윤주모의 만남은 서로의 장점을 극대화하며 최고의 음식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성근 셰프와 술 빚는 윤주모가 만든 레시피는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을 풀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지도 모르겠다. 두 셰프는 프로그램 이전에 충분한 라포형성의 시간도 없었다. 그들이 준비한 기본 베이스는 존중과 소통, 배려였다. 서로를 존중하는 바탕 위에 각자 잘할 수 있는 음식에 집중함으로써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블랙과 화이트는 우등과 열등의 구분이 아니다.
'흑백요리사'에서는 흑수저가 백수저를 이기고 백수저가 흑수저에게 져도 이상할 것이 없다. 1분, 1초의 시간을 아껴가면서 자신의 요리를 완성하기 위해 끝까지 애면글면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레시피에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최선을 다했다고 모두에게 내일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중요할까.
우리는 알고 있다. 경험과 지혜를 독점한 채 자신이 만든 레시피를 강조하는 '권위주의' 대신 '권위'를 갖춘 기성세대, 선배들이 닦아놓은 길 위에서 그 노고를 존경하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레시피로 새 길을 내는 젊은 세대가 함께 어우러질 때 최고의 음식은 만들어진다.
새해에는 세대간 갈등뿐 아니라 지역간, 성별, 극심한 빈부 차이 등으로 갈라진 우리 사회가 최고의 '쌈'으로 조화롭게 버무러져 화합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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