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칼럼] '사형수 김대중'과 광주

@김만선 입력 2025.06.04. 16:08
김만선 부국장 대우·취재3본부장

근거 없는 자신감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정작 아는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알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확신이 되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는 연극이 언급된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남의 일인 양 '모르쇠' 하며 지나치는 빌미가 되곤 했다. 언턱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해 여름 신안 하의도에서 만났고 연말에는 광주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기념 드라마 콘서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모두가 바로 어제 일인 듯 선명하기까지 했다.

연극 '사형수 김대중'을 무시할 수 없는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가까운 지인이 휴대전화를 통해 연극 내용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사형수 김대중'은 죄수 번호가 적힌 수의(囚衣)를 입은 채 몽구머리를 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거충 훑어본 것에 그쳤지만 깊은 눈에 담담하게 닫힌 입, 그늘진 표정은 무엇인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모습이었다. 그의 깊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자 근거없는 자신감이 온데간데없어지고 말았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2024년 12월 재연된 1980년 5월

아침부터 가늠할 수 없는 비가 내렸다. 단순한 일기의 변화는 늘상 겪는 일인데도 그날따라 느낌이 달랐다. 보슬비가 흩뿌리며 먼지잼에 그치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빗줄기가 굵어지고 금세 는개로 바뀌었다. 비가 주는 비유나 상징 때문인지 모른다. 자꾸 수의를 입은 김 전 대통령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막이 오를 시간이 가까워오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사형수 김대중'에 대한 열기를 실감케 했다.

연극은 김 전 대통령이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예비 검속되며 60일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던 상황부터 같은 해 9월17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의 사형 선고 과정, 이듬해 무기징역 감형까지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연극은 귀익은 육성과 함께 굵직한 현대사의 사건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전개하며 빠르게 관객들을 몰입시켰다.

중앙정보부에 감금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수사관이 회유와 협박을 거듭하는 장면, 동료들이 고문으로 고통받는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하는 모습, 신문을 통해 광주 학살 소식을 접하고 크게 절규하는 모습이 생생히 전달됐다.

날선 긴장감으로 미주알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손에 땀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연극이 중반부를 훌쩍 넘어선 후였다. 김 전 대통령과 5·18민주화운동 과정이 긴박하게 진행될수록 기시감처럼 겹쳐오는 또 하나의 공포가 있었던 탓이다.

연극 무대에서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큰 소리로 명령을 하는 장면은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전 대통령이 군 지휘관에게 전화로 국회 등에 병력 투입을 지시하는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수사관들이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사람들을 고문하는 모습은 윤 전 대통령이 정치인과 주요 인사들을 체포해 군 벙커로 이송할 것을 지시한 상황과 겹쳤다. 그뿐만이 아니다. 광주시민들이 5·18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를 외치다 쓰러져 갈 때에는 국회 정문 앞에 모인 국민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던 "계엄철폐" "독재 타도" 구호가 떠오르기도 했다.

연극을 보는 동안 12·3 비상계엄이 떠오른 것은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주변의 관객 중 일부는 45년 전 광주 시민들이 "비상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퇴진하라"고 외치는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낀 듯 배우들과 함께 오른팔을 힘차게 뻗는 모습이 보였다. 연극 무대가 끝난 후에는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되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기도 했다.

2025년 광주 선택의 의미는

김 전 대통령은 광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고 광주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광주는 늘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광주시민의 선택은 비뚤어지고 왜곡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는 바탕이 됐다. 광주시민은 '계엄의 공포'를 잘 안다. 1980년 5월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가 마주한 공포와 죽음의 무게를 안다.

광주시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자기 희생 정신은 1980년 횃불로 타올랐고 2016년 촛불혁명, 2024년 응원봉혁명으로 이어졌다. 3·1만세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4·19혁명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인권·평화의 씨앗이 됐고 화합과 연대로 세계 인류를 보듬는 불빛이 됐다.

김 전 대통령은 "광주 시민의 행동이야말로 인간이 극한 상황 속에서도 얼마나 위대한 선택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인간 승리의 대서사시"라고 밝힌 바 있다.

2025년 6월3일 광주는 또 다른 선택의 시간을 보냈다. 광주시민이 선택한 방점은 극한의 절망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희망'에 있다.

광주시민은 불법 계엄을 심판하고 비상식적인 정권을 교체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열망을 드러냈다. 국민통합과 경제회복, 남북관계 등 많은 과제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특히 극단으로 갈라진 양 진영을 통합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다. 5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김 전 대통령은 국민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부 관련 인사에 대한 정치적인 보복을 하지 않았고 그 세력을 껴안음으로써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가 보여준 용서와 화합, 소통과 통합은 '극단의 시대'인 지금 더욱 절실한 철학인지도 모른다.

그날은 오전에 비가 온다는 예보와 달리 하늘이 맑았다. 일기의 변화는 늘상 겪는 일인데도 그날따라 느낌이 달랐다. 푸른 하늘이 주는 기대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꾸 5·18 희생자가 묻힌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오열하던 김 전 대통령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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