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과거를 기록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과거가 오늘의 가치를 만들고 미래를 밝힐 때 비로소 역사는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그래서 한 도시의 품격은 얼마나 오래된 역사를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 역사를 현재와 미래의 자산으로 어떻게 되살려내느냐에 달려 있다. 나주가 최근 ‘나르발호 사건’을 중심으로 프랑스와의 교류를 넓혀 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851년, 당시 나주목 관할이었던 비금도 앞바다에서 프랑스 포경선 나르발호가 폭풍우를 만나 암초에 좌초되면서 침몰했다. 선원 29명은 생사의 기로에 놓였고, 이 가운데 9명은 상하이로 건너가 프랑스 영사 샤를 드 몽티니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영사가 비금도에 도착했을 때, 당시 나주 목사를 겸하고 있던 남평현감 이정현은 프랑스 선원들을 따뜻하게 보살피고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조선은 무력이 아닌 인도주의와 포용의 외교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175년이 지난 오늘에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이 만남은 단순한 해난사고가 아니었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보다 35년 앞서 이루어진 한국과 프랑스의 첫 공식 접촉이었으며,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한 한불 교류의 출발점이었다. 몽티니 영사는 감사의 뜻으로 샴페인을 나누었고, 조선은 옹기에 전통주를 담아 우정을 나누었다. 그 옹기 술병은 프랑스로 건너가 세브르 국립도자기박물관에 한국 도자기 유물 가운데 처음으로 공식 소장되었으며, 170여 년 동안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한불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에 전시되며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있다. 작은 옹기 하나가 국경과 세월을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불 우정의 역사를 말없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오랫동안 나르발호 사건은 역사책의 짧은 기록으로만 남아 있었다. 전환점은 프랑스 파리시테대학교(Universite Paris Cite) 한국학과 피에르 에마뉘엘 루(Pierre-Emmanuel ROUX) 교수가 이 사건을 최초로 학술적으로 조명하면서 마련됐다. 그의 연구는 나주에서 열린 ‘한불 첫만남 포럼’을 통해 처음 지역사회와 공유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외 연구자와 관련 기관을 연결하며 역사적 가치를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려는 꾸준한 노력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잊혔던 나르발호 사건은 한 페이지의 기록을 넘어, 오늘날 한불 교류를 상징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역사는 스스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기억하고, 연구하고, 이어갈 때 비로소 다시 현재가 된다.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지난 6월 20일 문을 연 1851 한불 첫만남기념관(Maison de France)이다. 개관식에는 엠마누엘 르블랑 샤틀리에 주한 프랑스대사관 영사를 비롯해 문승현 전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 등 국내외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그 의미를 함께했다. 그리고 7월 7일부터는 시민과 관광객 누구나 이곳에서 나르발호의 항해와 표류 과정,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발굴된 사료, 한불 교류의 발자취를 담은 다양한 전시를 만날 수 있다. 기념관은 과거를 보관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국과 프랑스가 처음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았던 역사를 오늘의 시민과 미래 세대에게 전하는 살아 있는 문화교육의 장이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나주가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7월 말,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시와의 청소년 국제교류, 프랑스 작가들에 의한 나주 탐험기 프로젝트 그리고 고등학교 프랑스어 교과서에 나르발호 사건이 수록되는 등 역사는 새로운 문화외교와 교육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역의 역사가 세계와 연결될 때, 그것은 더 이상 한 도시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국제사회가 함께 공유하는 문화유산이 된다.
우리는 흔히 도시의 경쟁력을 산업과 경제에서 찾는다. 그러나 도시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힘은 문화와 역사에 있다. 나주가 선택한 길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역사를 현재와 미래를 잇는 자산으로 승화시켜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과 국제교류, 문화외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데 그 진정한 의미가 있다.
1851년 나주목의 바다에서 시작된 작은 만남은 어느덧 175년의 세월을 건너 대한민국과 프랑스를 잇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성장했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를 오늘의 가치로 되살리고 미래의 자산으로 이어 갈 때 비로소 살아 숨 쉬게 된다. 지금 나주가 써 내려가는 이야기가 더욱 뜻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75년 전의 첫 만남은 이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나주의 미래를 비추는 가장 아름다운 역사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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