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나긴 추석 연휴를 맞아, 한 권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손원평 작가의 신작 '젊음의 나라'. 서점을 갔다가 단순히 제목만을 보고 흥미가 끌려 사놓고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들춰보지 않았던 책이다.
표지만 봤을 땐 대체 제목이 무슨 뜻일까 싶었지만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자 그 의미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제목은 역설이었다. 젊음이 축복이 아니라 짐이 돼버린 사회, 그리고 그 사회의 비극을 그린 이야기였다.
소설은 가까운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극단으로 치달아 국민 절반 이상이 노인이 된 사회.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월급 대부분을 노인 복지세로 내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거리에서는 매일같이 시위가 일어나고, 청년들의 구호는 차갑게 울려 퍼진다. "과거에 갇힌 자들에게 미래는 없다. 청년을 위한 길을 열어라."
이 세계의 중심에는 29살 여성 '유나라'가 있다. 배우를 꿈꾸던 평범한 청년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대형 노인복지시설 '유카시엘'에서 일하게 된다.
유카시엘은 노인을 A등급부터 F등급까지 경제력에 따라 분류하고 각 등급별로 다른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부유한 노인들은 최고급 요양시설에서 여생을 누리고 가난한 노인들은 인간의 존엄조차 지키기 어려운 환경에 놓인다.
이 시설은 또 하나의 공간 '시카모어 섬'과 연결돼 있는데 그곳은 부유층 노인들이 '이상적인 노후'를 보내는 인공 낙원이자 완벽하게 설계된 유토피아였다.
유나라 역시 유토피아를 동경하며 그곳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지만, 면접 과정에서 제도가 아닌 인간의 시선이 진짜 문제임을 깨닫게 된다.
실제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시카모어 섬의 입사 면접 중 자신이 젊다는 이유로 노인들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왔음을 고백한다.
"이 나라의 노인들이 너무 많아서, 내 젊음이 희생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던 그녀는 유카시엘에서 다양한 노인들을 만나고, 그들 또한 한때는 젊은이였음을, 사랑하고 꿈꾸었던 존재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깨닫는다. 늙는다는 것은 곧 인간이 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손원평 작가는 자신의 출산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2명의 아이를 낳으며 알게 됐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뉴스 속 단어가 아니라, 바로 내 일상의 문제였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서 서서히 진행 중인 현실의 확장처럼 느껴진다.
나는 10년째 노인돌봄 일을 해오고 있다. 매일같이 어르신들을 만나고, 그분들의 삶을 가까이서 본다. 젊음의 시절엔 그저 '노인을 돕는 일'이라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깨닫는다. 이 일은 단지 돌봄이 아니라 나의 미래를 미리 배우는 일이라는 것을. 돌봄은 타인을 위한 일이지만, 결국은 우리 모두를 위한 예행연습이다.
소설 속 세상은 '노인공화국'이라 불릴 만큼 극단적이다. 하지만 그 세계가 완전히 허구라 말하기 어렵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청년층의 체감 부담은 점점 커지고 있다.
돌봄의 책임이 특정 세대나 직종에만 전가된다면, 이 소설의 풍경은 머지않아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회를 지켜야 할까.나는 그 답이 '인간적인 따뜻함'과 '관계의 진정성'에 있다고 믿는다. 제도나 복지, 기술의 발전이 아무리 눈부시더라도,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노인복지시설의 현장에서 내가 가장 자주 목격하는 것도 결국은 그것이다. 비싼 재활 운동기구나 장비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 덕분에 오늘 하루가 행복해요"와 같은 한 사람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 그리고 '이런 말을 서로 해줄 수 있는' 진실된 관계다.
손원평의 젊음의 나라는 그래서 소설이 아니라 거울이다. 그 거울 속에는 우리가 늙어갈 얼굴이 있고, 우리가 만들어갈 사회의 모습이 있다. 노인의 나라가 곧 우리의 미래라면, 우리는 그곳을 소설의 배경과 같은 냉혹한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명절의 끝자락, 나는 이 책을 덮으며 조용히 다짐했다. "내가 돌보는 어르신 한 분 한 분이, 미래의 나 자신이라는 마음으로 살자."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소설이 경고하는 디스토피아는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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