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예술계 안팎에서 ‘인공지능(AI)과 테크놀로지의 역습’이 뜨거운 화두다. 거장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AI의 창작 영역 침범을 격렬히 비판했지만, 할리우드는 가상 시각 효과 기술을 ‘시네마틱 툴박스’라는 이름으로 발 빠르게 수용하고 있다. 음악계 역시 AI 가상 보컬 곡들이 음원 차트를 위협하며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의 개념을 뒤흔든다. 대중문화 전반에서 터져 나오는 예술적 주체성에 대한 논쟁은 이제 단순한 기술적 충격을 넘어, 인간의 성역이라 믿었던 ‘창작의 본질’을 묻는 뜨거운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전시기획자와 비평가의 시선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층 더 고차원적인 질문을 향한다. 동시대 전시기획과 큐레이팅 분야에서 기술은 단순히 화려한 시각적 효과를 시연하는 일회성 볼거리가 아니다. 사라진 역사의 기록을 현재의 시공간으로 생생하게 소환하고, 박제된 공간의 맥락을 깨부수며 전시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 놓는 강력한 ‘예술적 주체(Agent)’이기 때문이다.
최근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G.MAP)이 선보인 뉴미디어특화전 ‘완전한 것들의 틈’은 이 질문에 하나의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 기술이 단지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사라진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는 강력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1989년 당시 전국 5개 지역 미술 집단과 30개 대학 미술패 회원들이 참여했으나 이후 소실되었던 기념비적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디지털로 완벽하게 복원해 낸 시도에 있다.
물론 이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물리적 복원에 있지 않다. 총 11폭, 약 77미터에 달하는 이 작품은 동학농민운동에서 5·18민주화운동에 이르는 저항의 역사를 품고 있었다. 물리적 시간 속에서 사장될 뻔했던 거대한 민중의 기억이 디지털 기술을 통해 다시 살아난 것이다.
과거의 전시기획이 고정된 유물이나 캔버스를 일방적으로 배치하는 데 그쳤다면, 이번 전시는 뜨거웠던 저항사를 웅장한 몰입형 실감 콘텐츠로 재탄생시켰다. 기억의 틈새에서 되살아난 역사적 기록은 기획자의 통제와 과거라는 시간의 틀을 벗어나,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화면과 공간, 소리와 움직임으로 호흡한다.
이처럼 기술은 전시의 언어와 기억을 전달하는 방식을 바꾼다. 기술이 깊숙이 개입한 동시대 전시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가변성의 미학’과 긴밀한 ‘관객 상호작용’이라는 독보적인 특성을 획득한다. 이제 미술관을 찾는 관객들은 더 이상 멈춰 있는 작품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타자가 아니다. 전시는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의 경계를 허물고, 함께 경험하고 사유하는 장으로 변모한다. 즉, 기술이 인간의 역사, 공동체의 기억과 결합하여 전시장 공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인터페이스(Interface)로 전환할 때, 관객은 전시를 비로소 완성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영토 확장은 전시장 내부를 넘어 인간의 가장 신성한 영역인 ‘사유의 훈련’마저 바꾸어 놓고 있다. 오늘날 교육과 글쓰기 영역에서 생성형 AI는 첫 문장의 물꼬를 터주며 논리의 뼈대를 명민하게 세워준다. 작업의 속도를 높이고 효율을 끌어올리는 참으로 편리하고 매혹적인 도구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역설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인류’에 대한 묵직한 경고등이 켜져 있다. 알고리즘이라는 정교한 엔진을 장착한 지금, 우리가 직면한 진짜 위기는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질문’을 상실하는 것에 있다.
결국, 생성형 AI를 필두로 한 첨단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삶과 사유를 담는 그릇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형성하고 있다. 대중문화의 지형을 흔드는 도발적인 현상이면서도, 동시에 소실된 역사의 틈새를 메우고 미디어 전시 공간과 사유 현장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혁명의 파도다. 그렇기에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시도 속에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본질적인 질문은 ‘기계가 얼마나 인간을 닮아 가느냐’가 아니다. 바로 ‘이 기술을 새로운 예술적 언어로 삼아 인간이 어떻게 더 인간다워질 수 있는가’이다.
테크놀로지는 결코 예술가의 대체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인지 범위를 확장해 주는 고마운 ‘나룻배’에 불과하다. 배가 스스로 목적지를 정할 수 없듯,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몫이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도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록할지, 그 안에서 가치와 방향을 찾아내는 나침반은 오직 인간의 마음에만 존재한다.
오월의 푸른 봄날이 저무는 길목, 차가운 0과 1의 디지털 틈새로 뜨거운 역사의 숨결이 되살아난다. 이제 우리는 이 기술의 영토 위에서, 우리 시대가 마주한 ‘오월’ 기억의 고유한 가치를 엄숙히 되물어야 한다. 눈부신 기술의 시대에도, 끝내 방향을 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답은 분명하다. 기술을 쓰는 인간, 그리고 그 기술로 무엇을 지킬지 선택하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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