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의병 열전 ② 남도 의병의 역사적 성격
소규모 운용에도 일본군과 ‘분전’
불리한 상황도 유연한 전략 대처
부대 넘나들며 여러 직책 맡기도
신속한 병력 보충, 장기전 밑바탕

전남도는 지난 2022년 10월부터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미서훈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 신청 용역을 실시했다. 불과 16개월의 짧은 용역 기간 모두 2천456명을 발굴해 이 중 1천23명을 서훈신청했다. 이 가운데 의병계열도 835명을 발굴해 152명을 서훈신청했다. 지난해 3월 5일 용역 최종 보고회에서 김영록 전남지사는 발굴된 의병들의 명패를 곧 개관할 남도의병박물관에 걸어 길이 기념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전남도의 이런 관심과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남도 의병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실패한 남도 의병? 현실적인 소규모 운영
구한말 시기에는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을 막고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남도 의병은 무려 2년 동안 일본 정규군과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르며 조국의 산하를 피로 지켜냈다. 그럼에도 국가보훈처에 등재된 의병계열 서훈자는 이웃 전북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는 의병전쟁의 중심지였던 전남 지역의 피해가 커 후손들이 절멸된 탓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남도 의병의 역할과 공적에 대한 재조명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의병전문가는 남도 의병이 내부적 통일을 꾀하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09년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면 남도 의병이 세계 최강 러시아를 꺾은 일본군과 불퇴전의 전투를 24개월 넘게 치른 점이 설명되지 않는다.
남도 의병은 정말로 실패한 것일까. 그렇다면 조직과 지역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어떻게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근거는 당시 일본군의 여러 보고와 의병장에 대한 판결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의병부대를 조직·운영하려면 병사들이 먹을 식량, 전투에 쓸 무기 구입 등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따라서 아무리 재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수백명의 의병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의병부대 조직이 소규모로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이다. 이러한 사정은 의병부대를 추적한 일본군 몽탄 수비대의 정보 보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적괴 박민홍 및 박사화 두 사람은 영산포, 영암의 중간에 있는 지구(地區)를 배회하는데 항상 삼삼오오 숫자를 흩어져 있다가 모일 때는 100명 이상의 세력을 이루었다.(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
영암 국사봉을 중심으로 활동한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 호남의소(湖南義所)는 박민홍과 심남일 의병장의 중군장이었던 박사화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40~50명의 규모의 독립부대를 거느리고 평소에는 삼삼오오 움직이다가 유사시에 100명 넘게 모여 세력을 형성했다. 소규모로 편성돼 있던 여러 의병부대가 유사시에 하나로 합쳐지는 방식인데 이는 곧 '독립된 의진(義陳)'이 서로 연합해 '합진(合陳)'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 흩어지고 뭉치고…'유연한 전략' 일본도 고전
현실적인 이유로 소규모 병력으로 부대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으나, 남도 의병들은 이같은 불리한 상황을 유연한 전략으로 해결해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
남도 의병들의 전략적 움직임은 '연합의진'의 귀재였던 영암 출신 김치홍 의병장의 판결문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피고(김치홍)는 폭도 수괴 심남일이 총기 50자루를 휴대한 폭도 6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8년 10월 2일 그의 부하로 가입해 그의 지휘를 받아 영암군 및 능주를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민홍이 총기 15자를 휴대한 폭도 3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9년 1월 11일 그의 부하가 된 후 제1초십장이 돼 나주군을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사화가 총기 12자루를 휴대한 폭도 약 26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그의 부하가 된 후 제1초십장이 돼 영암을 휘젓고 다녔다. (하략) 명치 43년(1910년) 형구 제108호)'
판결문에는 호남의소 사령관 심남일 부대의 기군장인 김치홍이 박사화 부대의 제1초십장, 박민홍 부대의 제1초십장을 맡았다고 나와 있다. 김치홍이 심남일·박사화·박민홍 의병부대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여러 직책을 맡아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는 당시 독립의진을 형성한 의병부대들이 합진을 자유롭게 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독립 의진을 형성했을 때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으나 유사시에는 합진으로 대규모 부대를 편성해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 숫자에 크게 밀린 일본군은 우리 의병부대와 전투하는데 쩔쩔맸다. 당시 일본군은 구체적인 전투 상황 기록도 남겼다.
'소관(일본군)은 일·한 순사, 헌병 합동 부대를 인솔해 정오 남평군 죽곡면 선동에 도착했다. 수괴 박사화·박민홍·강무경이 인솔하는 약 250명의 폭도가 덕룡산이라고 칭하는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즉시 사격을 가했으나 적은 천험의 지리와 다수를 믿고 완강히 저항했다. 폭도들은 교전한 지 3시간 후 드디어 남쪽 영암군 방면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전날 적과 충돌한 덕룡산에 폭도의 진지가 아직 구축돼 있어 토벌을 위해 덕룡산과 1㎞ 떨어진 구릉에 이르렀는데, 덕룡산 정상에서 우리 부대를 향해 빈번히 발포하고 때로 대포를 발사하는 등 완강히 저항해 산개했다.(나경비발212호)'
덕룡산은 곧 영암의 국사봉을 말하는 데, 나주 남평, 영암, 강진에 걸쳐 있는 요충지로 이곳 주둔 의병들이 포대를 설치해 일본군과 맞섰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초당대학교 박해현 교수의 '영암의병사연구(2019)'에 따르면 일본군 진중일지에도 의병이 일본군에 대포를 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9년 2월 26일 박사화, 박민홍 의병 연합부대는 25명의 일본 토벌대 및 나주경찰대와 영산포 근처 철천에서 무려 3시간 교전하다 영암으로 작전상 후퇴했다. 이들 부대를 일본군은 영암수비대 11명, 해남 수비대 17명 등 28명을 동원해 포위 공격했고, 이튿날인 2월 27일 영암수비대 11명이 박민홍 의병부대를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해남수비대까지 동원하는 등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이 전투에서 박민홍의 아우 박여홍 등 20명의 의병이 장렬한 전사를 했다.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심남일의 부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단순히 유격전을 치른 것이 아니라 합진을 꾸려 일본군과 무려 3일이나 전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 일기'에도 이 무렵의 전투과정에서 이루어진 분진과 합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해 감히 포학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낼 수 없다. 여러 개의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중략)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했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 이대극, 오인수와 동쪽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이 일제히 와서 상의했다.(남평 거성동 접전)'
해당 기록은 남평 거성동 전투에 독립 의병부대들이 총집결해 연합작전을 통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영광 법성포 주재소를 의병부대가 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부대 등 호남창의회맹소에 속한 독립의병들이 연합 작전을 펼친 것도 이러한 분진과 합진의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의병부대가 독립부대를 곧 분진을 유지하다가 유사시에 '연합'으로 합진을 구성한 것은 부대 운영의 효율성과 함께 유사시 피해 부대의 복구를 신속히 하려는 의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8월 전라남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8월 폭도세력 비교표'를 보면 심남일 부대원 숫자는 전월 '200명', 본월 '200명'으로 차이가 없다, 전월에 일본군과 2차례, 본월에 1차례 등 총 3차례나 전투를 벌여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총원의 변동이 없다는 것은 의병부대의 결원이 곧 보충됐음을 말해준다.
'분진'과 '연합'을 통한 '합진'의 구성은, 일본군과 비정규전이 아닌 전면적인 전투를 전남 곳곳에서 24개월 동안 380회 이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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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원복' 깃발 아래, 지리산서 항전 의지 세우다 고광순 의병부대의 '불원복' 태극기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에는 조금은 특별한 태극기가 있다. 일반적인 태극기 형태지만 태극무늬 상단에는 붉은색으로 '불원복(不遠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불원복'은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구한말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1848~1907)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이 '불원복 태극기'는 당시 의병들의 군기(軍旗)로도 사용됐으며 현재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94호로 지정돼 있다.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세 차례의 의병에 모두 참여한 고광순은 국권 회복의 꿈을 태극기에 새기고 남도 곳곳을 누빈, 남도 의병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고경명의 후예, 남도 곳곳을 누비다고광순은 호남의 대표적 명문가인 장흥 고씨 후예로, 호는 녹천(鹿川)이다. 어려서 백부 고경주의 집안으로 입양돼 임진왜란 의병장 고경명의 사손(嗣孫)이 됐다. 인근에 있는 상월정에서 유학에 맹진한 그는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가 시험관의 부패로 낙방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1895년 을미사변과 김홍집 내각에 의해 시행된 단발령에 항거하던 을미의병의 움직임은 전남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189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이 전라도 유생들에게 거의(擧義) 격문을 보내자 고광순도 곧장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고 의병에 참여했다.그는 상소문에서 '신의 선조 충렬(忠烈) 경명과 효열(孝烈) 종후와 의열(毅烈) 인후 3부자는 임진란에 순절을 하여…신은 의열의 사손입니다'라고 밝혀 자신이 고경명의 후예임을 분명히 했다. 이를 통해 고광순 스스로도 임진왜란 의병장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송사 기우만, 성재 기삼연, 녹천 고광순 등 명망이 있는 유림이 포함된 200여명의 장성 의병은 나주로 이동해 그곳 의병부대와 '연합 의진'을 결성했다. 나주와 장성 의병이 결합한 연합 의병부대가 출범한 것이다.하지만 이들이 광주로 이동해 북상을 준비하고 있을 때 고종의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이 내려졌다. 선유사 신기선의 선유문(宣諭文)에 따라 의진을 해산했지만, 비분강개한 고광순은 호남을 돌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했다.고광순 의병장 초상화1905년 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을사의병 봉기가 이어졌다. 1906년 6월, 고광순은 전북 태인에서 거의한 최익현, 임병찬과 합류하기 위해 자신이 규합한 의병을 이끌고 순창으로 향했으나, 최익현과 임병찬이 순창에서 관군에 체포되자 눈물을 머금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이후 고광순은 광양에서 은거하던 맹인 의병장 백낙구를 만나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거병하기로 뜻을 모은다. 남원의 양한규, 능주의 양회일 등과도 만나 봉기 추진을 논의하는 등 적극적으로 연합 의진 구성을 서둘렀다. 마침내 양한규와 남원을 공격하기로 한 고광순은, 1906년 12월, 일가의 족조(族祖)인 고제량과 상의해 고향 창평에서 문중 중심으로 거병했다.의진의 대장으로는 고광순이 추대됐으며 막내아우 광훈, 집안 동생 광수·광채·광문 그리고 박찬덕·윤영기·박기덕 등 여러 사람이 참여했다. 당초 40명에 불과했던 의병 규모는 인근 지역의 포수 등이 합류해 70여명으로 늘어났다.다른 지역의 의병과도 합진을 논의한 고광순은, 빠른 유격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은 보복으로 고광순의 본가에 불을 지르고 아들 재환을 살해했다.아들을 잃은 슬픔에도 고광순은 예정대로 남원을 공격하기로 한다. 고광순보다 앞서 의병장 양한규의 정예 의병 100여명은 남원 진위대가 주둔한 남원성을 공격해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추격해 온 남원분견소 소속 일본 헌병의 공격으로 양한규가 전사했고, 고광순이 남원에 도착했을 때 양한규 의진은 모두 흩어지고 무너진 상태였다.남원에서 퇴각한 고광순은 부대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전남 동북부 산악 지역을 거점으로 삼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정미년인 1907년 4월 25일 능주 양회일, 담양 이항선, 장성 기삼연 등의 의병부대와 함께 화순 읍내를 습격해 관공서와 일본인 점포를 불태우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다음날 광주에서 출동한 관군과 일본군은 고광순 부대의 이동로인 도마치 고개(圖馬峙, 화순군 남면 유마리 소재)에 매복해 공격을 가했으며, 격전에도 불구하고 고광순 부대는 패배하고 후퇴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병력 손실이 크지 않았고 대부분의 병력이 매복과 포위 공격을 뚫고 산중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고광순 부대의 잇따른 활약에 자극받아 참여하는 의병이 늘어나자, 고광순은 8월 담양 창평에서 부대를 재편성했다. 고광순을 도독으로 삼고, 박성덕과 고제량이 각각 도총과 선봉, 신덕균과 윤영기 등을 참모로 삼았다. 이후 일본인이 많이 거주한 동복읍을 공격하고, 남원·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뿌렸다. 또 순창분파소와 더불어 민중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일본군 헌병대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이는 호남에서 본격적인 의병 전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고광순은 이미 일제가 '수괴'로 지목한 호남의 주요 의병장 중 하나였다.구례 연곡사에 위치한 녹천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호남호국기념관 제공◆의병 전쟁의 밑거름 된 '축예지계'다른 의병부대와 합진을 통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고광순은, 의병 전쟁 전략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이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축예지계(蓄銳之計)' 전략이다. 이는 '일정 기간 훈련을 통해 병사들의 예기를 기른 뒤 전쟁에 임한다'는 뜻으로 이를 위해서는 특정 지역에 진지를 구축해 장기 항전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지리산 화개동(피아골)을 의병 항전기지로 생각한 고광순은 전북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던 김동신과 만나 이를 함께 추진하기로 하고 지리산 연곡사를 근거지 삼아 병사들을 훈련 시켰다.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행군하여 구례 연곡사에 이르렀는데 산이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다. 동쪽으로는 화개동과 통했는데 그곳에는 산 포수가 많았다. 북쪽으로는 문수암과 통했는데 암자는 천연의 요새였다. 연곡사를 중간 기지로 문수암과 화개동을 장악하여 의병을 유진시켜 예기(銳氣)를 기르는 계책을 삼았다. 고광순은 대장기를 세우고 불원복(不遠復) 3자를 썼다.'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자는 고광순의 방략은, 당시 의병장 유인석이 백두산 근처에 의병부대 기지를 구축해 항일투쟁을 전개하자는 것과 구분됐다. 고광순의 이러한 방략에 따라 1907년 9월 무렵, 많은 의병이 순천·곡성·광양·구례 등지에서 모였다. 지리산을 근거로 무장 전쟁을 준비한 고광순은 화개동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급습해 상당량의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다.일본 수비대는 고광순이 지리산에서 장기 항전을 위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을 막고자 광주 주둔군 기노 중대와 오카사키 경찰대, 진해 주둔 도코로 소대 등을 동원했다. 그리고 10월 17일 쌍계사에 본부를 둔 일본군 부대는, 연곡사에 주둔한 의병부대를 포위 공략했다.진주·하동수비대, 진해만 중포병대대의 진주 파견대까지 동원된 대규모의 일본군의 공격은 고광순 입장에서도 갑작스러웠다. 그는 훗날을 위해 상당수 부대는 후퇴시켜 놓고, 본인을 따르는 결사 의병부대 50명과 함께 전투에 나섰다.고광순은 "의를 위하여 목숨을 내던진 것은, 큰 종기에 침질 한 번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결사 항전에 나섰다.부장인 고제량도 "처음에 의로서 함께 일어났고 마지막에도 의로서 함께 죽는 것인데 어찌 죽음에 임하여 홀로 면하겠는가"라고 외치며 물러서지 않았다.담양군 창평면에 위치한 녹천고광순의사기념관(포의사)고광순, 고제량 등 30명의 대한제국 의병은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비록 고광순은 전사했으나, 그가 양병한 의진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흩어졌다가 다시 규합해 일본군을 공격하기를 반복했다. 고광순이 의도한 '축예지계' 및 '분진', '합진'의 의병 전술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대한제국 의병들의 집요한 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1908년 2월 6일부터 3월 5일까지 일본군 14연대장이 직접 지휘한 이른바 '의병토벌대'를 편성했다. 진주, 함양, 거창, 심지어 광주 주둔 수비대, 그리고 조치원 주둔 기병까지 총동원된 대규모 진압부대였다. 이때 의병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치러진 전투만도 150여 회에 달한다. 확인된 전사 의병 숫자만 756명에 달하는 대혈전이었다. 남도에서 전개된 의병 전쟁의 대서막이었으며 의병장 고광순이 남긴 '불원복' 정신과 '축예지계' 전략이 그 중심에 있었다.현재 의병장 고광순의 흔적은 구례 연곡사와 고향인 담양 창평면에 남아있다. 1958년 연곡사에는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가 세워졌으며 정부는 1962년 고광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일본 군경의 보복으로 불탄 고향 집터에는 1969년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으며 현판 글씨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현재는 녹천고광순의사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 · 한말 의병항쟁 중심지 남도, '민족의 등불'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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