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고 뭉치고···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력 과시

입력 2025.04.23. 18:32 임창균 기자
무등일보-한국학호남진흥원 공동기획
남도 의병 열전 ② 남도 의병의 역사적 성격
소규모 운용에도 일본군과 ‘분전’
불리한 상황도 유연한 전략 대처
부대 넘나들며 여러 직책 맡기도
신속한 병력 보충, 장기전 밑바탕
'연합의진'의 귀재였던 김치홍 의병장 영정

전남도는 지난 2022년 10월부터 광역시도 가운데 최초로 미서훈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 신청 용역을 실시했다. 불과 16개월의 짧은 용역 기간 모두 2천456명을 발굴해 이 중 1천23명을 서훈신청했다. 이 가운데 의병계열도 835명을 발굴해 152명을 서훈신청했다. 지난해 3월 5일 용역 최종 보고회에서 김영록 전남지사는 발굴된 의병들의 명패를 곧 개관할 남도의병박물관에 걸어 길이 기념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전남도의 이런 관심과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그동안 남도 의병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치홍 의병장을 모신 영암 의홍사

◆ 실패한 남도 의병? 현실적인 소규모 운영

구한말 시기에는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을 막고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 전국 의병의 60%를 차지한 남도 의병은 무려 2년 동안 일본 정규군과 물러서지 않은 전투를 치르며 조국의 산하를 피로 지켜냈다. 그럼에도 국가보훈처에 등재된 의병계열 서훈자는 이웃 전북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는 의병전쟁의 중심지였던 전남 지역의 피해가 커 후손들이 절멸된 탓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남도 의병의 역할과 공적에 대한 재조명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의병전문가는 남도 의병이 내부적 통일을 꾀하지 못해 성공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09년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은, 유래없이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 통일을 꾀하는 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그 투쟁의 열기를 다른 지방으로 적극적으로 전파시키지 못한 채 끝을 내고 말았다. 이것은 호남 지역의 의병운동이 자체 내에 지니고 있었던 조직상의 결함과 지역성 한계성을 또한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타당하다면 남도 의병이 세계 최강 러시아를 꺾은 일본군과 불퇴전의 전투를 24개월 넘게 치른 점이 설명되지 않는다.

남도 의병은 정말로 실패한 것일까. 그렇다면 조직과 지역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어떻게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일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근거는 당시 일본군의 여러 보고와 의병장에 대한 판결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의병부대를 조직·운영하려면 병사들이 먹을 식량, 전투에 쓸 무기 구입 등 엄청난 비용이 소요된다. 따라서 아무리 재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이 수백명의 의병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의병부대 조직이 소규모로 될 수밖에 없는 현실적인 이유이다. 이러한 사정은 의병부대를 추적한 일본군 몽탄 수비대의 정보 보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적괴 박민홍 및 박사화 두 사람은 영산포, 영암의 중간에 있는 지구(地區)를 배회하는데 항상 삼삼오오 숫자를 흩어져 있다가 모일 때는 100명 이상의 세력을 이루었다.(일본군 14연대, 진중일지)'

영암 국사봉을 중심으로 활동한 남도 최대의 의병부대 호남의소(湖南義所)는 박민홍과 심남일 의병장의 중군장이었던 박사화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40~50명의 규모의 독립부대를 거느리고 평소에는 삼삼오오 움직이다가 유사시에 100명 넘게 모여 세력을 형성했다. 소규모로 편성돼 있던 여러 의병부대가 유사시에 하나로 합쳐지는 방식인데 이는 곧 '독립된 의진(義陳)'이 서로 연합해 '합진(合陳)'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남도 최대 의병부대인 호남의소 사령부가 있었던 영암 국사봉 일대 전경

◆ 흩어지고 뭉치고…'유연한 전략' 일본도 고전

현실적인 이유로 소규모 병력으로 부대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으나, 남도 의병들은 이같은 불리한 상황을 유연한 전략으로 해결해 일본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였다.

남도 의병들의 전략적 움직임은 '연합의진'의 귀재였던 영암 출신 김치홍 의병장의 판결문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피고(김치홍)는 폭도 수괴 심남일이 총기 50자루를 휴대한 폭도 6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8년 10월 2일 그의 부하로 가입해 그의 지휘를 받아 영암군 및 능주를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민홍이 총기 15자를 휴대한 폭도 30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1909년 1월 11일 그의 부하가 된 후 제1초십장이 돼 나주군을 휘젓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는 폭도 수괴 박사화가 총기 12자루를 휴대한 폭도 약 26명을 이끌고 폭동을 일으키는 것을 알고 그의 부하가 된 후 제1초십장이 돼 영암을 휘젓고 다녔다. (하략) 명치 43년(1910년) 형구 제108호)'

판결문에는 호남의소 사령관 심남일 부대의 기군장인 김치홍이 박사화 부대의 제1초십장, 박민홍 부대의 제1초십장을 맡았다고 나와 있다. 김치홍이 심남일·박사화·박민홍 의병부대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여러 직책을 맡아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는 당시 독립의진을 형성한 의병부대들이 합진을 자유롭게 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독립 의진을 형성했을 때는 규모가 상대적으로 소규모였으나 유사시에는 합진으로 대규모 부대를 편성해 작전을 수행했기 때문에, 중요한 순간 숫자에 크게 밀린 일본군은 우리 의병부대와 전투하는데 쩔쩔맸다. 당시 일본군은 구체적인 전투 상황 기록도 남겼다.

'소관(일본군)은 일·한 순사, 헌병 합동 부대를 인솔해 정오 남평군 죽곡면 선동에 도착했다. 수괴 박사화·박민홍·강무경이 인솔하는 약 250명의 폭도가 덕룡산이라고 칭하는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어 즉시 사격을 가했으나 적은 천험의 지리와 다수를 믿고 완강히 저항했다. 폭도들은 교전한 지 3시간 후 드디어 남쪽 영암군 방면으로 흩어져 도망쳤다. 전날 적과 충돌한 덕룡산에 폭도의 진지가 아직 구축돼 있어 토벌을 위해 덕룡산과 1㎞ 떨어진 구릉에 이르렀는데, 덕룡산 정상에서 우리 부대를 향해 빈번히 발포하고 때로 대포를 발사하는 등 완강히 저항해 산개했다.(나경비발212호)'

덕룡산은 곧 영암의 국사봉을 말하는 데, 나주 남평, 영암, 강진에 걸쳐 있는 요충지로 이곳 주둔 의병들이 포대를 설치해 일본군과 맞섰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초당대학교 박해현 교수의 '영암의병사연구(2019)'에 따르면 일본군 진중일지에도 의병이 일본군에 대포를 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구한말 호남을 무대로 활약한 심남일 의병장 동상

당시의 전투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09년 2월 26일 박사화, 박민홍 의병 연합부대는 25명의 일본 토벌대 및 나주경찰대와 영산포 근처 철천에서 무려 3시간 교전하다 영암으로 작전상 후퇴했다. 이들 부대를 일본군은 영암수비대 11명, 해남 수비대 17명 등 28명을 동원해 포위 공격했고, 이튿날인 2월 27일 영암수비대 11명이 박민홍 의병부대를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은 해남수비대까지 동원하는 등 그들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했다. 이 전투에서 박민홍의 아우 박여홍 등 20명의 의병이 장렬한 전사를 했다. 박사화, 박민홍, 강무경(심남일의 부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단순히 유격전을 치른 것이 아니라 합진을 꾸려 일본군과 무려 3일이나 전투를 치렀음을 알 수 있다.

'심남일 일기'에도 이 무렵의 전투과정에서 이루어진 분진과 합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적의 세력이 점점 치열해 감히 포학을 부리니 그 세력을 막아낼 수 없다. 여러 개의 진이 모두 모여 적을 유도해 끌어내어 서로 어울려 승부를 결단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중략) 일변으로는 영산포에 보발을 보내 적의 마음을 격동하고, 일변으로는 여러 진의 책임자에게 통고했다. 그래서 북쪽의 전수용, 이대극, 오인수와 동쪽의 안규홍, 김여회, 유춘신이 일제히 와서 상의했다.(남평 거성동 접전)'

해당 기록은 남평 거성동 전투에 독립 의병부대들이 총집결해 연합작전을 통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영광 법성포 주재소를 의병부대가 공격할 때 기삼연, 김유성, 이남규, 이영화 의병부대 등 호남창의회맹소에 속한 독립의병들이 연합 작전을 펼친 것도 이러한 분진과 합진의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의병부대가 독립부대를 곧 분진을 유지하다가 유사시에 '연합'으로 합진을 구성한 것은 부대 운영의 효율성과 함께 유사시 피해 부대의 복구를 신속히 하려는 의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1909년 8월 전라남도 경찰부에서 작성한 '8월 폭도세력 비교표'를 보면 심남일 부대원 숫자는 전월 '200명', 본월 '200명'으로 차이가 없다, 전월에 일본군과 2차례, 본월에 1차례 등 총 3차례나 전투를 벌여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음에도 총원의 변동이 없다는 것은 의병부대의 결원이 곧 보충됐음을 말해준다.

'분진'과 '연합'을 통한 '합진'의 구성은, 일본군과 비정규전이 아닌 전면적인 전투를 전남 곳곳에서 24개월 동안 380회 이상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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