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창립하였고, 마은혁과 함께 젊은 시절을 함께 하였다. 주위에서 "마은혁 판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묻는다.
살아생전 노회찬 전 의원이 그렇게 말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교과서"라고. 아마도 마은혁을 키운 건 도덕 교과서가 아닐까 싶다. 마은혁 판사는 정말 교과서 같은 인물이다. 겸손하고, 성실하고, 학구적이다.
부인과 사별한 지 20년이 넘었는데도 재혼을 하지 않는다. 좋은 여자가 있으면 소개라도 해 주고 싶으나 돌아올 말이 뻔하여 아예 말도 부치지 못한다. 마은혁의 고향은 강원도 고성이다. 38선 너머에 위치한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서울에 사는 친척이 '알기쉬운 삼위일체'를 보내주셔서 그날부터 외우기 시작했죠." 중학생 마은혁은 참고서 한 권 살 수 없었던 촌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대한 욕심이 많다. 무지무지 학구적이다. 지금도 재판이 끝나고 집에 가면 독일어로 원서를 읽는다고 한다.
이번 임명 과정에서 마음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을 빨갱이집단으로 모는 바람에 마은혁 판사는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뒤늦게 몇 자 적는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은 자유민주체제를 전복하려는 집단이었나? 아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집단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의 우수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혁명을 추구했던가? 인민노련이 추구한 것은 군사독재정권의 전복이었다.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한 군부세력을 혁명으로 몰아내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있었던가?
인민노련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체제변혁세력이었다고 국힘 쪽은 몰아부쳤다. 맞다. 1980년대 당시 운동가들 대부분은 속으로는 사회주의를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사회주의자가 아닌 것처럼 활동했다. 치안본부에 끌려가서 "너, 빨갱이지, 사회주의자이지?"라고 심문을 당하면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우리는 좀 달랐다. 사상의 자유는 그 사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있어야 쟁취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민노련 구속자들은 재판장에서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선언했다.
그러면 인민노련은 친북단체였던가? 아니다. 북한에 대해서 가장 비판적인 단체였다. 북한의 세습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했다.
영화 '1987'을 보았을 것이다. 인민노련은 1987년 6월 항쟁의 초기 국면을 주도했다. 박종철의 고문사를 고발하고 맨 먼저 투쟁에 돌입한 것은 우리였다. '살인강간고문정권'을 타도하자고 부천역 앞에서 외쳤다. 1987년 2월 7일이다. 다시 서울 남대문 앞에서 '살인강간고문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쳤다. 1987년 3월 3일이다.
1987년 6월 26일, 6월 항쟁이 절정에 이르던 때였다. 그때 나는 치안본부의 쌍수배를 받던 처지였다. 1만여 시민들이 모인 부평역 광장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가야 할 방향을 선포하는 선언서를 낭독했다.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지자 우리는 백기완 선생을 민중후보로 추대하고 대선에 뛰어들었다. 종로 8차선 대로에 다음과 같은 플래카드를 걸었다. "광주학살 원흉을 처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평화협정을 체결하라"
그때 광주학살 원흉을 처단하지 못해 이번에 계엄포고령 사태가 난 거다.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지 않고 있고, 비정규직노동자는 여전히 차별을 받고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아직도 우리는 긴장 상태에서 살고 있지 않는가?
이렇게 함께 활동하던 동지들이 1천여 명 되었다. 지금도 학계나 법조계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지만, 노동자 출신들의 다수는 힘들게 살고 있다. 또, 많은 동지들이 농촌에 들어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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