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는 15년 넘게 해마다 '학생의날' 전후하여 1일 학생기자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이 행사의 해설을 담당한 필자는, 광주학생운동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조직적으로 1년 훨씬 전부터 준비되었다는 것과, 광주학생운동이 '위대한 운동'인 까닭은, 이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1930년대 이후에 뜨겁게 전개된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고, 후배 학생들이 선배들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 또 다른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해방 그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역할을 담당한 원동력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이경채(李景采)와 이경채(李京彩)이다. 이들이 누구일까? 자칭 전문가들조차 구별을 쉽게 하지 못한다.
오늘(11월 3일) 뜻깊은 95주년 맞는 '학생의날'이다. 광주송정역을 찾았다. 광주송정역 대합실에 독립운동을 소개한 공간이 있다. 철도청이 독립기념관의 협조로 제작한 것이다. 일단 기뻤다.
광주학생운동 소개란에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생긴 학생들의 갈등이 11월 3일 광주역 광장의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른바 '댕기머리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이 사건 때문에 광주학생운동이 대규모로 폭발했다면, 광주학생운동은 우발적인 사건이 된다. 우발적인 사건이 그렇게 순간적으로 광주시내 학생들이, 전국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할 리 만무하다. 이때 주목되는 것이 '이경채 사건'이다. 1928년 4월 광주고보 5학년 재학생인 광주 송정 출신 이경채는 식민 지배체제와 일본 천황제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시내 곳곳에 뿌려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두 달 뒤인 1928년6월 초 이경채가 경찰에 체포되자, 이튿날 학교 당국은 곧바로 퇴학시켰다. 이에 광주고보 학생들이 교장실로 달려가 진상도 밝혀지기 전에 퇴학 처분한 것은 잘못이라고 항의하며, 1학년을 제외한 전교생이 맹휴에 들어갔다. 학교 당국은 항의하는 학생들 상당수를 퇴학시키는 등 강경하게 나왔다.
광주고보 학생들이 전개한 맹휴에, 광주농업학교,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참여하는 등 조직적인 저항이 시작되었다. 다음 달 7월, 전국적인 맹휴를 조직적으로 이끌 '맹휴중앙본부'가 결성되었다.
이경채 사건 당시 맹휴 운동은, 1926년 11월 3일 결성된 성진회 회원들이 주도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그리고 11월 12일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맹휴중앙본부'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이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맹휴중앙본부'의용의주도한 시위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학생운동의 발발을 1년 전에 있었던 이경채 사건부터 설명해야 하는 이유이다.
1년 넘는 수형생활을 한 이경채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뚫고 광주여고보 학생들이 추진한 백지동맹을 주도한 최순덕을 11월 12일 2차 시위 준비 모임에 데리고 갔다. 최순덕은 이경채의 지도를 받아 백지동맹을 전개하였다(최순덕 증언). 광주여고보의 빛나는 백지동맹의 배후에 이경채가 있었다. 이경채는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개월 가까이 물고문을 당했다.
1930년 일본으로 망명한 이경채는 그곳에서 광주학생운동 참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계획하다 구속되어 온갖 고문을 당했다. 풀려난 그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한국독립보를 간행하는 데 참여하였다.
특히 김원봉이 조직한 남경의열단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준비한 그는,중국군 장교가 되어 상해크리크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등 한중연대를 몸으로 실천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그가 살았던 생가는 송정역 건너편에 '폐가'로 있다,
또 다른 이경채(李京彩)는, 1943년(필자는 1942년이라 주장)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무등독서회'에 참여한 무안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무등독서회는 연합군이 상륙할 때 향도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여느 결사와는 다르다. 광주사범 4기생(5기 순창 출신 홍창기 1명 포함)이 주축을 이룬 18명의 결사대는 1944년 10월 조직이 노출되어 전원 체포되었다. 이들은 10개월 동안 미결수 신분으로 고문을 받다 1945년 8월 16일 해방이 되어 반송장 상태로 풀려났다.
무등독서회는, 1938년 광주서중 재학생들이 조직한 '무등회'와 함께 전시동원체제기에 일제가 저지른 악랄한 만행에도 굴하지 않고 일제의 패망 순간까지 처절한 항쟁을 한 자랑스런 우리 학생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등독서회를 무등회로 착각하고 있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화정동의 학생독립운동기념관에 이들의얘기는 없다. 이처럼 무등독서회를 방치하다 보니, 우리 지역 관찬사서에서조차, 무등독서회의 영향을 받아 순창농림학교 출신들이 결성한 화령회가 무등독서회 창립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고, 무등독서회 회원인 광주사범 재학생 홍완표가 순창농림학교 출신으로 둔갑되어 있는 등 한마디로 뒤죽박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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