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필이 만난 사람]
"연설보다 예술이, 구호보다 행위가 역사를 잇는다"
'님아 그 강을건너지 마오' 진모영 감독.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풍 속에 한국이 세계인의 일상으로 성큼 들어서고 있다. 세계 시민들은 영화뿐 아니라 영화의 무대가 되는 한국, 한국 문화에 열광을 아끼지 않는다. K-영화의 한 중심에는 임권택부터 대한민국 다큐의 신기원을 이룬 진모영까지 남도의 영화인들이 자리하고 있다.진모영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남도의 문화적 DNA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세계가 한국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복합적인 인간성 때문이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치유의 경험을 모두 가진 나라다. 한국인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현실을 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 연민과 공동체적 감각을 가장 깊이 간직한 존재다. 한국영화 열풍은 그 이중성과 복합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결과이며, 바로 그 점이 세계가 공감하는 지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파동이 엄청나다. 세계가 이토록 한국 영화에 열광하다니 놀랍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성공은 단순한 콘텐츠 산업의 성과가 아니라, 한국의 위상이 어디까지 확장됐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케데헌의 성공은 K-콘텐츠의 확장이라기보다, 한국이 세계 문화의 변방이 아닌 중심에서 새로운 인간의 서사를 제시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세계가 한국영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술이나 자본의 힘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품고 있는 복합적인 인간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치유의 경험을 모두 가진 나라다. 이 모순적이고도 역동적인 서사가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한국인이야말로 자본주의의 가장 냉혹한 현실을 살면서도, 동시에 인간적 연민과 공동체적 감각을 가장 깊이 간직한 존재인 것이다. 한국영화 열풍은 그 이중성과 복합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결과이며, 바로 그 점이 세계가 공감하는 지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가장 인류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가장 보편적이다라는 말이 언뜻 이해가 안 간다.
▲우리가 세계 어느 사회보다 인간의 복합적인 조건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 분단과 세계화, 공동체의 해체와 재구성이라는 극단의 경험을 한 세대 안에서 모두 겪은 나라다. 그 안에는 전근대와 현대, 서구와 아시아, 자본주의의 잔혹함과 인간적 연민이 공존한다. 그렇게 한국 사회는 세계의 축소판이자 실험실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세계에 통하는 이유는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삶의 긴장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영화가 세계의 공감을 얻는 것도, 바로 그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감정의 깊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성장을 위해 '쿼터' 운동을 하던 게 얼마 전 같은데 변화가 놀랍다.
▲한국영화의 성장은 제도보다 시대의 열망이 만든 결과다. 스크린쿼터 운동은 문화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다. 당시 창작자들은 자유를 요구했고, 그 자유가 오늘의 다양성과 품격으로 이어졌다. 검열이 사라지고 표현의 영역이 확장되자 영화는 산업을 넘어 사회의 언어가 됐다. 한국영화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궤를 같이했고, 그 역동성이 지금의 세계적 신뢰를 가능하게 했다고 본다.
-최근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이 다시 주목되는 것 같다.
▲산업의 재편은 위기이자 창작의 기회다. 지금의 혼란은 예술이 다시 본질로 돌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관객의 취향이 다변화하고 OTT 등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흥행보다 관계의 예술로 변화하고 있다.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은 자본이 아니라 진정성의 문제다. 관객이 신뢰할 수 있는 작품, 인간의 감정과 시대의 질문이 함께 담긴 영화가 결국 가장 대중적인 예술로 남는다는 점에서, 지금의 변화는 필연적 진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워낭소리'가 준 신선한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국 다큐는 '워낭소리'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 같다.
▲'워낭소리'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첫 전성기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방송 밖에서 제작된 독립 다큐가 극장에서 관객과 만난 최초의 사례이자, 대중적 성공을 보여줬다. 다큐가 사회운동의 언어를 넘어 예술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 계기다. 워낭소리'는 사회파 다큐 세대가 열어놓은 윤리적 기반 위에서 새로운 미학의 문을 연 작품이었다.
-사회파 다큐는 우리 문화사에 중요한 축이다.
▲사회파 다큐멘터리는 사회적 윤리를 예술로 번역한 장르다. 1980년대 '파업전야'를 비롯한 사회파 작품들은 억압된 시대에 인간의 권리와 정의를 외치는 언어였고, 그 연장선에서 1990~2000년대 사회파 다큐 감독들이 사회를 기록했다. 이들은 고통을 감내하며 예술을 사회운동의 한 형태로 실천했다. 다큐멘터리로 돈을 벌거나 명성을 얻는 것은 배신처럼 여길 만큼, 진심과 헌신의 영역이었다. 이러한 전통이 있었기에 이후 세대가 인간의 존엄과 일상의 품위를 다루는 서정적 다큐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본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어떻게 제작됐나.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는 충격과 자신감을 줬다. 당시까지 외주 제작사들은 혼신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도 그 작품은 방송국 소유였다. 소위 독립피디들은 방송국 소모품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길로 뛰쳐나와 '작품' 제작에 돌입했다. 당시 한국 다큐는 해외 피칭(Pitching. 투자 유치, 선판매 등을 목적으로 제작사, 투자사 등에게 하는 일종의 투자 설명회)과 국제영화제를 통해 제작비를 확보해야 하는 열악했던 상황이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준비하면서 해외 펀딩을 계획하고, 세계무대를 겨냥했다. 덴마크 공영방송 DR TV의 제작 지원으로 작업을 추진했다.

-국내 제작지원은 어땠나.
▲국제 피칭과 해외 펀드가 중심인 상황에서 국내 영화제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이후 방송콘텐츠진흥재단(BCPF),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대명그룹 등 국내 주요 영화제와 기관, 투자사들이 함께 했다. 핵심은 창작자들의 네트워크와 실험정신이다. 한국 다큐의 성장은 국가보다 창작자들의 연대가 만든 결과다.
-광주 영화산업 지원현황은 어떤가.
▲광주의 영화지원 체계는 여전히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원의 초점이 창작 생태계보다는 단기적 행사와 행정 성과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 문제다. 특히 민선 8기 들어 영화산업의 중추가 될 '광주영화위원회'가 출범을 앞두고 돌연 폐기됐다. 가장 뼈아픈 퇴행이다. 수년간 지역 영화인과 전문가들이 논의해 온 제도적 기반을 행정이 정치적 이유로 없애버린 것은 창작 생태계에 대한 불신이자, 문화자치의 의지 부재다. 영화위원회는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광주가 문화산업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보여주기식 지원과 단기적 홍보 사업에서 벗어나 장기적 제작 지원·인력 양성·배급 시스템 등 실질적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는.
-'님아∼'는 480만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다큐의 신화로 꼽힌다. 그 압도적인 공감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시는지.
▲공감의 영역은 층위가 다양해 단순하게 말하기 쉽지 않다. 처음 백만을 넘고 400만을 넘어 480만에 이르는데 한 달 반 만에 이뤄졌다. 사실 감이 오지 않았다. 놀라운 마음으로 어디까지 가나 지켜보는 심정이었다.
-많은 예술 영역이 그렇지만 영화 부문도 지역 출신이 두드러진다. 임권택, 김한민, 이충렬 등등, 한국영화사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왔다.
▲남도는 한국 예술정신의 원형이 살아 있는 곳이다. 현실의 어둠을 응시하면서도 인간의 품격과 감정을 놓지 않는다.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 민족의 서사를 복원했다면, 김한민 감독은 역사적 비극을 대중의 서사로 끌어올렸다.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는 일상을 품위와 예술로 바꾸었고, 나 역시 인간의 존엄과 사랑의 온도를 기록하려 한다. 남도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감정의 깊이가 있다. 그것이 영화 속에서 공감과 품위의 미학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남도의 감각, 문화적 DNA가 있는 것 같다.
▲전라도 사람들은 자연이든 사람이든 동물이든, 타자에 대한 예의가 몸에 배어 있다. 그건 단순히 착하다는 게 아니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무언가를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그런 마음. 그게 이 지역의 문화적 DNA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 지역에는 독특한 정의감이 있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격, 그런데 그 정의감이 공격적으로 폭발하기보다는 예술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래서 음악이든 미술이든 영화든, 전라도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예술은 늘 사람 냄새가 난다. 그게 남도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예의, 인간에 대한 존중,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살아온 경험이 이 지역의 예술을 만들어온 거다.
"'새벽광장'은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한 윤상원 열사의 유훈을 잇는, 1980년 5월의 마지막 새벽을 오늘의 예술로 되살리는 시민 예술 프로젝트다. 그날의 새벽을 '승리의 시간'으로 재해석하자는 취지다. '그날 나갈 수 없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새벽에 함께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새벽광장은 기억을 애도의 공간에서 공동체적 예술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 말씀하신 데로 '명랑'에서 보듯 저 임진왜란에서 구한말 의병, 5·18에 이르기까지 늘 시대와 함께했다.
▲남도에는 여전히 서로를 품는 감정의 질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생활의 지혜이자 감응의 문화다. 타인의 아픔을 제 일처럼 여기는 공감,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겸허, 그리고 슬픔을 존엄으로 바꾸는 힘이 남도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이 감각은 단절과 냉소의 시대에 인간 사이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문화적 해독제일 수 있다고 본다. 남도는 과거의 저항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치유하는 정서적 자산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귀향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
▲강원도로 경상도로 촬영을 다니면서 어느 날 문득, 깨달음처럼 질문이 제기됐다. '가장 원형적이고 풍부한 고향(그는 전남 해남서 나고 자라, 고교와 대학을 광주에서 나왔다)을 두고 뭐 하고 있나'라는 질문이다. 바로 짐을 쌌다. 어쩌면 조심스러웠고, 말할 수 없는 무게감에 선뜻 다가오지 못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의 공동대표를 맡고 계시다.
▲놀이패 '신명'이 5·27일, "우리는 오늘 여기서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입니다"라고 한 윤상원 열사의 유훈을 잇는 새벽 '제(祭)를 지내오고 있었다. 감동적이었지만 승리를 기억하기에는 제가 너무 단출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예술인들과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을 만들어 이태째 진행했다. '새벽광장'은 1980년 5월의 마지막 새벽을 오늘의 예술로 되살리려는 시민 예술 프로젝트다. 광주항쟁이 패배의 기억으로만 남지 않도록, 그날의 새벽을 '승리의 시간'으로 재해석하자는 취지다. '우리는 패배한 도시가 아니라, 끝까지 버틴 승리한 시민이다"는 정신을 담아 명칭도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으로 명명했다. 5월 26일 자정부터 27일 새벽까지 24시간 동안 광장 곳곳에서 연극, 마당극, 음악, 캘리그래피, 낭독, 시민참여 공연이 이어진다.
연설보다 예술이, 구호보다 행위가 역사를 잇는다. '그날 나갈 수 없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그 새벽에 함께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새벽광장은 기억을 애도의 공간에서 공동체적 예술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차기작이 궁금하다.
▲준비 중인 작업은 5·18의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해석하는 작품이다. 이름 없는 시민과 생존자, 유가족의 목소리를 기록해 '기억의 윤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5·18을 오늘의 언어로 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름 없는 시민과 생존자, 유가족의 목소리를 기록해 '기억의 윤리'를 탐구하는 작업이다. 이를테면 1980년 당시 5월27일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았던 시민군 중 김동수 열사의 경우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현대사의 아픔을 모두 안고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 김동수 열사 기념사업회 공동대표를 마고 있다. 그의 부친은 6·25 때 조부모가 국군 양민학살로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한 뒤, 평생 심신의 상처에 시달리다 아들까지 1980년 앗겼다. 열사의 고향인 장성 서삼면 부친의 쌀 창고를 기념 갤러리로 조성하는 등 그를 기리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추모관이 아니라 '광주의 마지막 새벽을 지킨 이들의 기록을 예술로 복원하는 장소'로 계획되고 있다. 그의 가족사와 도청 최후 항전의 이야기를 통해 '패배가 아닌 인간 존엄의 기록'을 복원하고자 한다.
진모영은
예술로 인간을 기록하다 …다큐의 윤리에서 광주의 새벽까지
진모영 감독은 인간의 존엄과 관계의 품격을 기록해온 한국 다큐멘터리의 대표적 영화인이다. 전남 해남 태생으로 전남대 법학과 재학 시절 '시대의 부름'에 기꺼이 투신했다. 방송사와 독립제작사에서 PD·카메라맨으로 활동하며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 영향으로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대표작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는 76년을 함께한 노부부의 사랑과 이별을 담은 작품으로, 국내 다큐멘터리 역사를 갈아치웠다.

'님아∼'는 덴마크 공영방송 DR TV가 제작 지원, 프랑스 캣앤독스(CAT&Docs)가 해외 배급으로 국제 신뢰를 확보했다. 이후 전주국제영화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EBS국제다큐영화제(EIDF) 등 국내 주요 영화제들이 후반 작업비와 마케팅을 지원했다. 이같은 제작 과정으로 '님아∼'는 한국 다큐멘터리가 국제공동제작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가 됐다. 또 제21회 로스앤젤레스영화제 다큐멘터리부문 대상, 2015 밀레니엄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등 국내외 영화제 수상 기록을 달성하고, 20여 개 영화제 초청, 480만 관객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2021년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 시리즈 '님아: 여섯 나라에서 만난 노부부 이야기'가 190개국에 방영됐다
그의 작업은 늘 "예술은 싸움이 아니라 품격의 언어"라는 철학 위에 있다. 최근에는 광주로 돌아와 5·18의 기억을 예술로 되살리는 시민 프로젝트 '5·27 승리의 날 새벽광장' 의 공동대표를 맡아, 예술과 공동체가 함께 기억을 치유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영화와 행보는 다큐멘터리를 넘어, 예술이 인간의 품격을 지키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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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함으로··· 광주 스토리 담고, 전국 브랜드로 키울 터"
무등산 자락의 카페 '커피볶는 집 '은 광주 대표 토종 브랜드로 지역 카페 문화를 선도해 온 곳이다. 이정민 대표의 커피 사랑과 자긍심이 가득한 공간이기도 하다. 양광삼기자 ygs02@mdilbo.com
[주필이 만난 사람]무등산 자락에 자리잡은 카페 '커피볶는 집(커볶)'은 단순히 커피를 파는 매장이 아니라 광주를 대표하는 로컬브랜드 중 하나다. 광주서만 느낄 수 있는 맛과 분위기, 특별함을 자랑한다. 대기업 프렌차이즈 파고와 극심한 불황을 뚜벅뚜벅 헤쳐 나온 무등산 자락의 커볶은 한 잔의 커피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를 담아내는 상징적인 브랜드나 다름없다. 이정민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커피볶는 집'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이곳은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공간을 넘어, 광주라는 도시가 가진 이야기와 정체성을 커피라는 매개로 담아내는 플랫폼이라 생각한다. 커피를 통해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 안에서 지역의 가치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업할 때만 해도 맛있고 좋은 커피를 사람들과 함께 마시고 싶다는 바람이 전부였지만, 사람들 발길이 드문 이곳 무등산 자락에 둥지를 틀때는 저의 모든 것을 걸다시피 했다. 본질에 더욱 충실했다.-'커볶'이란 브랜드 가치는 무엇이고, 고수한 원칙이 있다면.▲커볶이 처음부터 지켜온 철학은 '좋은 커피'라는 단 하나의 정직함이다. 이익을 위해 품질을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생두를 선택하는 과정부터 로스팅, 추출까지 모든 과정을 직접 관리하며 신뢰를 쌓아왔다.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해 노력했고, 눈앞의 이익보다 신뢰와 가치를 우선시했다. 규모를 키우기보다 커피 맛의 완성도를 높이고, 고객에게 가장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커피 시장까지 대기업이 파고든 현실에서 지역 토종 브랜드가 살아남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대기업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자본의 위력을 당할 수가 없다. 저희는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치'를 체험할 수 있도록 공간과 서비스, 커피 맛까지 세심하게 관리했다. 또 지역에 뿌리내린 브랜드로서 광주에서만 할 수 있는 활동들을 꾸준히 이어왔다. 이렇게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한다.-결정적인 경쟁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가장 큰 차별화는 생두를 직접 들여와 로스팅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데 있지 않나 싶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는 본사에서 원두를 공급하지만 저희는 생두 선택부터 로스팅까지 직접 관리해 최상의 맛을 유지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 차이가 아니라 브랜드의 본질적인 힘이다. 또 광주라는 지역의 스토리와 문화를 커피에 담아내며 '여기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맛과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러한 차별화가 고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고, 그 자체가 경쟁력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커피는 그야말로 프랜차이즈 전성시대처럼 보인다. 커볶의 전략은.▲카페를 시작하던 2000년대만 해도 프랜츠이즈가 유행하던 때다. 저희도 입소문이 나면서 요청이 많아 시작하게 됐다. 매장 수보다는 매장 하나하나의 완성도를 높이고, 대기업이 흉내 낼 수 없는 경험을 제공하는 전략으로 대응하며 브랜드를 알렸다. 지역에 30개가 넘는 가맹점이 생기고 요청은 넘쳐났다. 그러나 대기업의 공세로 가맹점주 부담과 본사 관리 한계를 느끼게 됐다. 과감히 확장을 중단하고 직영 매장 중심으로 재편했다. 이와함께 제조, 온라인 시장으로 판로를 모색해 나갔다.무등산 자락에 자리잡은 카페 '커피볶는 집'.-커볶은 불황을 타지 않는 것 같다. 성장 비결이 따로 있나.▲두터운 단골 고객층 덕분이다. 불황일수록 소비자들은 가격보다 신뢰와 품질을 우선시한다. 우리는 단순히 커피를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품질과 일관된 경험으로 고객의 신뢰를 쌓아왔다. 이 신뢰가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 되었다. 커피 맛의 본질은 생두에서 시작된다. 타협하지 않는 품질 관리가 브랜드의 신뢰를 지키는 길이라고 믿는다. 또 오프라인 매장에만 의존하지 않고, 일찍부터 온라인 사업을 병행하며 매출 구조를 다각화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균형이 불황 속에서도 안정적인 성장을 가능하게 한 핵심 비결이 됐다..-위기는 없었는지, 위기를 기회로 바꾼 결정적 계기나 전략이 궁금하다.▲가장 큰 위기는 코로나19였다. 매출이 급감하고, 기존 방식으로는 버티기 어려웠다. 역설적으로 기회가 됐다. 이전부터 조금씩 준비해온 온라인 판매가 코로나로 활성화되며 돌파구가 됐다. 제조와 온라인 중심으로 사업 체질을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때 내린 결정이 이후 성장을 견인했다. 위기는 힘들었지만, 방향을 재정립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였다.-온라인 비즈니스의 영향과 이후 핵심 전략을 간략히 말한다면.▲온라인은 지역 한계를 넘어 전국 고객을 만나는 새로운 시장이다. 초기에는 시험삼아 시작했지만, 코로나19 이후 본격적인 성장동력이 됐다. 오프라인 매장과 제조, 온라인 판매가 서로 연결되며 브랜드 기반을 넓혔다. 지금의 핵심 전략은 품질을 중심으로 한 콘텐츠 마케팅과 고객 맞춤형 제품이다.-커볶이 광주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커볶은 광주만의 커피 문화를 만들어가는 브랜드다. 광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맛과 공간을 제공해 지역민에게는 자부심을, 외지인에게는 특별한 체험을 선사하고 싶다. 광주라는 도시를 알리는 문화적 창구로서 '그곳에 가야 만날 수 있는 커피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고 자부한다.-로컬 브랜드가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첫째는 차별화된 색깔이다. 대기업이 규모, 자본으로 승부하는 현실에서 로컬은 자신만의 독창성이 결국 생명이다. 둘째는 지역의 스토리다. 브랜드가 가진 이야기와 철학이 고객에게 진정성 있게 전달될 때, 고객은 단순 소비자가 아닌 팬으로 남는다.-'좋은 커피'에 대한 정의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기준이 궁금하다.▲좋은 커피는 사람을 위로하고 기분을 전환시켜준다. 이를 위해 생두의 질, 로스팅의 정확성, 추출의 세심함까지 전 과정을 관리한다. 단순히 맛이 좋은 것을 넘어, 마시는 사람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주는 것이 진짜 좋은 커피다. 저희가 공간에 공을 들이는 이유다.-커볶의 중요한 경영 철학, 직원과 파트너, 고객을 대하는 리더십의 원칙은.가장 중요한 가치는 '신뢰와 존중'이다. 직원에게는 성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고, 파트너에게는 공정하고 투명한 관계를, 고객에게는 정직한 제품을 약속한다. 사람을 중심에 둔 경영만이 브랜드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커피볶는 집 이정민 대표와 조덕진 주필이 대담을 하고 있다. 양광삼 기자ygs02@mdlibo.com-커볶 성공의 비결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시작할 때 자본도 경험도 부족해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좋은 분들이 너무 많이 도와주셨고, 또 커피 트랜드와 운때가 맞았던 것 같다. 함께 성장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아 경제적·심리적으로 힘든 순간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도움이 컸고, 좌절하기보다는 작은 가능성 하나라도 찾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안 되는 이유를 찾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될 수 있는 길을 끝까지 찾다 보니 어느 순간 길이 열렸다. 결국 성공은 혼자의 힘이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그들이 준 기회와 도움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였다.-원래 꿈이 창업이었나. 커피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바람 쐬러 간 서울에서 우연히 맛본 자가 로스팅 커피가 인생을 바꿨다. '광주에도 이런 커피를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님 몰래 본격적으로 커피 공부를 해 창업까지 하게 됐다.-지역에서 창업할 때 고려해야 할 현실적 과제는 무엇인가.▲제한된 시장 규모와 인력 부족, 대기업과의 불균형 경쟁이 가장 큰 과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만의 독창적인 스토리와 차별화된 전략을 반드시 갖춰야 한다.-창업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유행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만의 철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장기적인 비전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늘 되새기며 흔들리지 않는 것이 진짜 성장의 길이다.-청년 창업자의 성장을 위해 지역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청년 창업가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도록 지원 시스템을 강화하면 좋겠다. 단순한 지원금이 아니라 교육, 멘토링, 네트워크 등 실질적인 성장 기반이 매우 중요하다.이정민 대표는 커피 맛의 본질은 생두에서 시작된다며 타협하지 않는 품질 관리가 브랜드의 신뢰를 지키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양광삼 기자ygs02@mdlibo.com■이정민 대표는2006년 전남대 상대 뒤쪽 후미진 골목에 서너 평짜리 카페 '커피볶는집'을 열며 본격적으로 커피 산업에 뛰어들었다.공무원을 꿈꾸던 청년 이정민은 우연히 서울에서 자가 로스팅 커피를 맛보고 매료돼, 학원비를 커피에 쏟아부었다.'맛있는 커피를 광주서도 즐기자'는 단순 명료한 목표로, 열정 하나로 시작했다. 자본과 경험 모두 부족했지만 커피 맛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생두를 직접 수입해 자가 로스팅을 도입하며 품질을 지켜왔다. 이같은 근본에 충실한 대가로 대기업 공세에 살아남은 유일한 광주 토종 브랜드로, 전국적 명성을 자랑하는 커피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그는 사업을 확장하면서 얻은 주변의 도움을 지역사회에 기여하며 갚아가고 있다.무등산 자락에 카페를 오픈하며 문화와 예술, 지역 대표성이라는 공익적 목표를 가다듬었다. 당시 이 대표가 추진한 카페 전시는 광주 사회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이 대표는 지역사회와 상생에 진심이다. 청년 창업가 멘토링과 커피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인재를 육성하고, 지역 축제와 문화 행사에 꾸준히 참여해 커피를 매개로 한 지역문화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서 기부 활동을 이어가며,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광주전남지회 운영위원, 광주광역시청 분과위원, 광주여자청년회의소 회장,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법무보호위원 등 다양한 사회적 활동하고 있다.조덕진기자 mdeung@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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