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재래면 밀어낸 자리에 육지면, 일제가 만든 원료기지

입력 2026.09.15. 09:59 이용규 기자
광복 81주년 기획:임동 방직공장, 기억을 잣다
3. 목화밭이 된 전남평야
日, 고하도에서 육지면 재배성공
보리도 못심고 오직 목화만 강요
생산량 좋지 않으면 모두 빛으로
남도 농민 옥죈 일제 드라이브 신음
목화밭서 방직공장까지 촘촘한 공급망

육지면 최초 시험재배에 성공했던 목포고하도에 세워진 목화체험관의 조형물.


일제강점기 광주·전남 들녘은 부드러운 흰빛으로 번져 있었다. 멀리서 보면 논밭위에 첫 눈이 내려앉은 듯 희끗희끗했다. 가까이 가면 말라가는 갈색 껍질사이로 솜이 둥글게 부풀어 있었다. 바람이 불면 솜조각이 흩날렸고 볕좋은 날에는 들판 전체가 은빛먼지를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다. 가을이면 허리를 굽힌 채 평야에서 솜을 따 담던 모습은 당시 농촌의 흔한 풍경이었다. 농촌에서 생산된 목화는 씨를 빼내는 조면작업과 유통망을 거쳐 실과 천이 됐다. 광주전남사람들에게 목화밭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공장으로 이어지는 들판이었다. 그러나 하얀 들판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풍경만은 아니었다. 일제는 남도의 농업을 일본 방직산업에 필요한 원료 생산체계로 빠르게 재편해 나갔다.

전라도는 일제 이전부터 전국적인 목화·무명 생산지였다. 따라서 일제가 육지면 생산기지로 삼을 기존 생산 기반이 이미 있었다. 일본인이 1890년에 남긴 ‘조선에서의 면작 보고서’에 따르면 1890년 광주에서는 50~60여호가 목화농사를 짓고 연간 7만8천여필의 무명베를 생산했다. 순천 20만필, 나주 10만필, 영암 6만필 등 남도 전역에서 무명짜기가 성행했다. 이 보고서에는 면화 품종에 대해 설명은 없다. 일본이 조선에 강권한 육지면은 목포 고하도에서 시험재배에 성공한 1904년이후 보급된 점을 감안하면 남도 목화밭을 덮은 하얀 꽃송이들은 재래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재래면은 1363년 원나라에 갔던 삼우당 문익점이 귀국하며 가져온 씨앗을 발아시킨 목화 품종이다. 우리나라 토양에 맞아 600년 동안 우리 생활과 의생활을 바꾼 작물이었다. 남도의 재래면은 상당수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905년 기준으로 광주전남 목화와 무명 제품은 70%가 충청, 경기 혹은 부산항을 거쳐 멀리 함경도까지 판매됐다. 이랬던 재래면은 1920년대 들어 급격히 밀려났다.

1904년 일본 영사 와카마쓰 우사부로가 목포 고하도에서 미국 품종인 육지면 시험재배에 성공했다. 1936년 일제가 이를 기념해 세운 ‘조선육지면발상지’ 원비는 현재 고하도에 있다. 목포근대역사관에는 관련자료와 모형이 전시돼 있다. 자국 방직산업에 필요한 원료 확보에 나선 일제는 고하도 시험재배 성공 이후 육지면 보급 체계를 빠르게 구축했다. 1906년 3월 무안군 이로면에 육지면 채종포를 설치한 데 이어 같은 해 6월 목포 대화정, 현재의 대의동에 통감부 권업모범장 목포출장소를 개설했다. 출장소는 면화시험과 우량종자 증식, 재배 장려 등을 담당하며 육지면 확산의 거점 역할을 했다.

광주도 육지면 보급의 중요한 보급기지였다. 무안에 이어 1906년 북구 두암동에 채종포가 들어섰고, 1909년 면화재배소와 종묘장도 설립했다. 채종포에서 육지면 종자를 키워 일반 농가에 보급하는 체계였다. 본격적으로 육지면 재배 구조가 완성된 셈이다. 그러나 이 때만해도 목화 100근 (60㎏)가운데 약 97근이 재래면이었다. 갈수록 재래면은 입지가 좁아졌다. 1913년에는 광주에 면작조합이 출범한다. 육지면 재배 농가들은 광주농공은행과 금융조합 등 금융기관의 전폭 지원을 받았다. 육지면을 사사로이 판매할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이었다. 목화수매도 일본계 조면 회사들이 독점했다. 이러는 사이 남도에서 육지면이 밭을 덮었다. 1925년 이후 광주·전남에서 재래면 재배 통계는 사라진다.

불과 15년뒤 육지면이 전체 생산량의 72%를 차지했다.

박선홍씨가 쓴 ‘광주100년’에 따르면 1909년 전국에서 생산된 목화는 1천482만근이었고 재래면이 1천437만근을 차지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의 강력한 육지면 재배조치로 1924년 전국 목화생산량은 총 1억4천17근이었다. 육지면이 72%에 달하는 1억122근이었다. 15년만의 10배이상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했을까. 왜 농민들은 수익성이 불확실하고 노동력이 많이 드는 육지면을 계속 심었을까.

답은 총독부가 종자 보급부터 금융, 재배방식, 판매와 수매까지 생산 전 과정을 통제했다는 데 있다.

19세기 말부터 빠르게 성장한 일본섬유산업은 원면 대부분을 미국과 인도에 의존했다. 하지만 해외 원료 수급의 불안정성이 커지자 총독부는 조선을 대체 생산지로 육성하려했다. 그러던 중 목포 고하도에서 육지면 재배에 성공하고 기후조건이 맞았던 광주전남을 핵심 생산지로 선택했다.

일제는 1912년부터 6년간 1차 면화증대계획을 시작으로 태평양전쟁말기까지 3차에 걸쳐 면화 증산정책을 추진했다. 이후 남부지역의 면화생산을 확대하는 ‘남면북양(남쪽에서는 면화, 북쪽에서는 양)’정책까지 추진하며 전국의 면화 생산량을 대폭 끌어올리려 했다. 면화 재배지는 빠른 속도로 확대됐다. 육지면은 무안, 해남 등 주로 영산강 유역과 남해안 일원에서 집중적으로 심겨졌다.

일제의 육지면 확대 정책은 빠른 속도로 남도의 들판을 바꿔놓았다. 목포부사에 따르면 1906년 전남의 육지면 재배면적은 45.28 정보에 불과했고 재배 농민도 326명이었다. 그러나 1916년에는 재배면적이 3만2천862정보, 재배인원은 19만 5천233명으로 늘었다. 10년만에 면적은 700배이상, 재배 인원은 600배 가까이 증가한 셈이다. 당시 전남 인구의 10분의 1이 넘은 인원이 육지면 생산에 참여할 정도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에는 전남농촌진흥사에 따르면 전남광주 재배 면적은 전국의 21%를 차지했고 총수확량은 3만1천톤으로 전국의 25%에 해당됐다.

목포근대역사관에 있는 조선육지면발상지비 모형비. 일제는 육지면 재배에 성공한 이후 시험지였던 목포 고하도에 세웠다. 원래 비는 고하도에 있다.

육지면이 확대될수록 농민들의 고통은 커졌다. 총독부가 육지면 우선주의 정책을 추진하다 보니 보리 등 식량 작물재배는 후순위로 밀려났다.경찰과 헌병까지 동원돼 농민들이 보리나 콩 등을 심는 것을 막았고 육지면을 재배토록 억압했다. 이렇게 농사를 짓는 품종 선택권이 박탈된 채 재배한 면화 가격의 결정권은 대부분 일본계 조면회사가 쥐고 있었다. 일본 자본에 유리하게 짜여진 수매 구조의 부담은 고스란이 농민들에게 돌아갔다. 비싼 비룟값과 고의로 등급을 낮게 매기는 등 일본 상인들의 불공정한 헐값 수매로 인해 면화를 재배할수록 농민들은 만성적 부채에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조선 민초들의 삶과 함께한 재래면을 밀어낸 육지면은 농민들에게 더 많은 노동과 부채를 안겼다.

목화만이 아니었다. 일제는 양잠도 같은 방식으로 농촌 전체를 공업 원료 생산체계로 편입했다.

농민들의 희생으로 생산된 목화와 무명은 광주천변, 나주 남평 등 주요 시장에서 거래됐고 조면작업을 거쳐 임동 방직공장으로 옮겨져 상품으로 생산됐다. 당시 현물성 최고 자산이었던 광목 등 섬유제품은 훗날 충장로 포목상권을 형성하는 토대가 됐다.

결국 남도의 농촌에서 생산된 면화는 일본 자본의 종연방적 임동공장으로 모였다. 일제가 원료 생산부터 가공까지 하나의 식민지 섬유산업 체계로 연결한 것이다.

그나마 농촌에서 명맥을 이어오던 재래면은 1945년이후 상업적 재배에서 사실상 밀려났다. 농민의 선택권은 없고 총독부에 의해 일제 방직산업의 원료기지화를 의도한 결과였다. 무안군 청계면에는 과거 목포 면작 연구기관의 계보를 잇는 국립식량과학원 바이오에너지 작물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소의 주요 업무였던 목화 연구는 거의 중단되고 고구마, 유채 등 바이오에너지 작물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개편됐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목화산업이 쇠퇴한 이후 목화씨를 유전자원 차원에서 보관, 보급은 하고 있으나 대단위로 재배하는 곳은 없다”면서 “오랜 기간 농촌 들녘을 메운 목화 풍경은 전설 속 얘기로 남게됐다”고 말했다.

남도의 하얀 목화밭은 아름다운 농촌 풍경인 동시에 식민지 산업구조가 남긴 흔적이었다. 농민이 수확한 하얀 솜의 끝에는 일본의 거대 방직공장이 있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김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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