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밭 밀어내고 들어선 공장, 식민지 산업화 블랙홀로

입력 2026.08.31. 19:44 이용규 기자
1부.식민지 산업의 탄생
1. 1935년 솟은 거대한 굴뚝

끝없이 이어진 광주농업고등학교 실습포 자리에 거대한 붉은 벽돌의 공장동이 자리잡았다. 이 들판 끝에서 무겁게 위치한 붉은 벽돌 담장의 광주교도소도 흔적없이 사라졌다. 대신에 또 다른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공장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날부터 일본인 기사들이 측량기를 세우고 땅에 말뚝을 박더니, 광주농고 실습포 가장자리부터 땅이 깎여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웅장한 굴뚝이 솟아올랐다. 방적창과 보일러실, 일본식 사무동, 기숙사가 연속적으로 세워졌다.

광주 외곽의 평야와 하천 일대가 계절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밀어내고 분위기가 달라졌다. 버드나무와 느티나무 팽나무 숲이 울창해 전원풍경을 연출한 광주 임정(임동)과 유정(유동) 주변이 산업적 스카이라인으로 불과 몇개월전 세상과는 완전히 딴판이 된 것이다.

1935년 8월. 그렇게 광주의 서북쪽 풍경을 통째로 바꿔놓은 종연방적 임동공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지 5만5천평에 종업원 2천500명, 방적기 3만80추, 직기 1천대 등을 갖춘 거대한 공장이 등장했다.

이 해 11월 낙성식에 이어 완전조업 체제로 돌입했다. 공장 준공을 기념하는 낙성식에는 쓰다 종연방적 사장을 비롯한 총독부 관리, 지방유지 등 200명이 초대됐다. 낙성식 참석자들은 동양 최대 방적공장이라는 선전과 함께 호남산업발전의 출발이라고 목청을 높였다. 낙성식은 식민지 광주의 산업화를 선전하는 대규모 무대였다. 이후 종연방적은 일본의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섬유제품 생산을 떠받치는 주요 생산기지로 기능했다. 총독부와 전남도가 낙성식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유이다.

그런데 일본의 거대 방직회사는 왜 광주에 터를 잡았나.

종연방적이 광주를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광주·전남은 면화 주산지이고, 값싼 노동력도 풍부했다. 인근에는 화순탄광이 있었고 호남선 철도와 목포항을 통한 물류도 가능했다. 광주천과 영산강에서는 공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원료와 노동력, 에너지, 물류, 용수를 한 곳에서 해결할수 있었던 셈이다.

종연방적만 광주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전남도 역시 종연방적을 원했다. 이마이 총독부 정무총감과 소바 광주상공회의소 회두는 종연방적 광주 유치공장 건립에 적극 앞장섰다.

당시 전남도는 쌀과 보리 중심의 농업경제가 생산량 변동과 소작 갈등 등 한계를 드러내자 농업과 공업을 동시에 육성하는 농공병진을 추진했다. 야지마 전남도지사는 이 과정에서 면화 원료 확보에 관심이 높았던 일본 섬유업계를 유치 대상으로 삼았다.

이는 농공병진 정책을 추진하던 야지마 전남도지사가 원료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일본 섬유업계를 염두에 둔 판단이었다.

전남도는 일본 섬유업계인 종연방적에 광주와 전남지역이 면화주산지이고 저임금으로 노동력을 확보할수 있는 부분을 최대 강점으로 부각했다. 영산강과 광주천물을 공장용수로 사용케하는 선취권도 제시됐다. 공장부지 제공, 세제감면 등 파격적 혜택까지 더해졌다.

전남도는 종방에 전라남도 농사시험장 및 임업 묘포 및 주변 논과 밭, 교도소 부지 등을 포함한 14만8천500평을 제공했고 화순탄광 석탄의 철도 운임 할인까지 지원했다.

그래서인지 종연방적은 총독부 권유로 광주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장 유치전 종연방적은 이미 전남의 면화 생산량과 노동력, 고용조건, 시장성을 직접 조사하고 있었다.

전남이 종연방적을 원한만큼 종연방적도 조선을 필요로 했다. 당시 일본 섬유업계는 자국의 노동법제정으로 16세이하 여성 심야 노동금지 등 노동환경 규제가 강화됐다. 원료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돌파구를 모색하던 종연방적 역시 국외로 눈을 돌렸고, 전남의 투자 유치를 모른 체 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자본은 원료와 값싼 노동력을, 전남도는 산업화를, 총독부는 식민지 생산기지 확대를 원했다. 세 주체의 이해가 임동에서 맞아 떨어졌다. 일제강점기 최초 지방정부가 추진한 투자유치 1호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의 지방자치단체 기업유치와 유사했으나 군수물자 조달과 식민지 노동력 착취를 위한 제국주의적 산업화의 일환이었다.

종연방적은 1930년 제사공장을 설립한 이후 5년만의 대규모 투자였다. 제사공장을 통한 광주의 경쟁력을 확인한 결과로 판단할 수 있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1930년대 말에는 실을 만들어내는 방적기 3만5천추, 실을 이용해 옷감을 짜는 직기 1천440대, 종업원이 3천명까지 달할 만큼 양적, 질적으로 성장했다. 호황에 힘입어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종방의 핵심 수익공장으로 발돋움했다. 종연방적측의 내부자료에서 확인된다. 서울공장(동대문공장)은 ‘조선에 아낌없는 투자를 한다는 식의 보여주기 위한 공장이고, 광주공장은 실제 돈을 벌어주는 공장’이라고 평가했다. 1938년 종방 자본금은 6천만원이었다. 재정면으로 조선 전체 기업중 내로라하는 규모였다.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광주의 변화를 가져왔다. 1917년 광주면은 50여만평의 면적에 인구 1만명을 갓넘긴 수준이었다. 9년후 1926년 광주면 인구는 2만명, 면적은 120만평이었다. 그러다 광주부로 승격된 1935년 광주 인구는 5만4천여명이다. 1937년에는 임동 인구만 3700명에 이르렀다, 이 중 70%가 종연방적 임동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1939년 광주부서 통계에 의하면 조선의 전체 방직공장 노동자는 4만7천여명이었고, 종연방적 임동공장 노동자는 22%를 차지했다. 1930년대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약림제사,전남도시제사 등 광주에 있던 3개 섬유공장에서 고용한 인원(1천200명)보다 2배 더많은 노동력을 보유했다.

1930년말 종연방적 임동공장은 더 이상 광주에 들어선 하나의 공장이 아니었다. 수천명의 노동자가 기계를 돌렸고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노동자를 따라 인구가 몰리고 주변에는 새로운 주거지와 상권이 생겨났다. 공장은 도시안에 또 하나의 도시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하루 24시간 멈추지 않던 기계뒤에는 값싼 노동력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

이용규기자 hpcyglee@mdilbo.com

종방의 광주제사공장 1930년대 사진엽서. 광주시립민속박물관제공.

[뽕밭 전국 1위 전남, 일본 제사업체 광주로]

종연방적은 임동공장을 건립하기 5년 전 광주에 투자를 했다. 1930년 광주특별시 동구 학동 옛 숭의실고 자리(현 세라믹아파트 일대)에 제사공장을 설립했다. 부지 1만6천932평, 건평 3천365평에 지워진 학동제사공장은 종업원 322명이 기계 32대에서 누에고치를 쪄 연간 2만1천600㎏의 명주실을 뽑아냈다. 1934년부터 주야 2교대 체제로 풀가동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조선에서는 노동법이 제정되지 않아 일본에서 금지된 여성들의 주야 2교대 심야작업이 제약을 받지 않았다.  

1925년 경성 제사공장 건립으로 조선에 첫발을 내디딘 종연방적은 광주 학동제사공장에 이어 임동 방적공장까지 가동, 양잠과 목화 등 섬유산업의 원료망을 촘촘히 갖췄다. 

앞서 지난 1926년에는 전남도시공장이 옛 중앙여고와 삼익맨션, 금호생명빌딩 일대 2만평에 들어서 무명실을 생산했다. 전남 최초 제사공장이다.

뒤이어 1930년 8월 지금의 북성중학교와 성요한병원 부근에 약림제사 주식회사가 자리를 잡는다. 공장부지 1만3천평, 건평 2천500평, 종업원240명, 연간 생사생산량이 1만8천㎏이었다. 

이처럼 1920~1930년대 광주에 일본 자본의 제사공장들이 집중된 배경은 잠업의 성행에 있다.

1909년 통계에서는 전남의 뽕밭 면적이 전국 1위였다. 1929년 전남 누에고치 생산량은 6만석을 넘어섰고 1930년에는 전국 2위 생산지였다. 총독부는 1920년에서 1930년대 광주, 나주, 담양, 창평 등에 잠업전습소를 운영할 만큼 양잠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김현주기자 5151k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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