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행의 세상읽기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법정스님이 가져온 겨울의 단상(斷想) (하)

입력 2019.01.18. 00:00
자아가 작품을 깊이있게 작품은 자아를 살찌우고

서구의 승려로서는 영국인 아잔 브라흐마의 산문이 최고다. 그의 명저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는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안내서이다. 석가모니가 승려가 된 이유는 거창하게 우주의 도를 깨닫기 위함이 아니었다. 인간 삶의 실상이 고(苦)임을 직시하고 고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깨달음을 통해 마침내 그 길을 알게 되었다. 아잔 브라흐마는 그러한 불교 본연의 정신에 충실하다. 이 책 내용 가운데 가장 핵심은 스님이 벽돌로 담을 쌓은 에피소드다.

기술을 배워 스스로 절의 담을 만들었는데 완성 후 보니 벽돌 두 장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 두 개 때문에 스님은 담을 볼 때마다 불만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담을 보더니 다 잘되었고 두 장밖에 실수한 것이 없다면서 찬탄했다. 이 말에 큰 충격을 받고 삶을 보는 눈이 크게 달라졌다. 보통 사람들은 삶이라는 담을 만들면서 구백 구십 팔개를 반듯하게 해놓고는 잘못된 두 개 때문에 괴로워한다.

항상 두 개가 눈에 들어오지 나머지 구백 구십 팔개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 삶이 늘 괴롭다. 그래서 마음속에 사는 코끼리가 술에 취해 이리 저리 비틀거리니까 삶의 방향이 엉망이다.

반대로 잘 쌓은 거의 대부분의 벽돌을 보게 되면 잘못된 두 장도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면 마음속 코끼리의 걸음이 고요하고 안정감 있어 삶의 방향이 반듯해진다.

필자는 아잔 브라흐마 글에서 무소유의 의미를 "마음에서 잘된 구백 구십 팔개를 갖고 잘못된 두 개는 갖지 않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술취한 코끼리'를 내가 아는 교수님 한 분에게 소개했더니 그 분은 내용이 참으로 좋아 세 번이나 읽었다고 하셨다.

#그림1중앙#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한국의 불교문학을 볼 경우, 시에 있어서는 고대에 사명당을 비롯해 적지 않은 승려들이 수준 높은 시들을 창작했다. 근현대인으로서 불교의 세계관을 보편적인 일반 문학으로 승화시킨 시인을 찾는다면 만해 한용운과 고은을 들 수 있다.

그러면 산문은 어떠한가. 예로부터 수많은 묵객들이 불가의 가치관이 내재된 작품들을 남겼지만 필자 생각에 고금을 통해 우리 법정스님이 최고의 경지인 듯하다.

스님은 수행으로써 확장된 풍부한 내면의 세계가 구체적인 일상을 만났을 때 저절로 글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 마치 산봉우리에서 구름이 생기고, 봄이 되면 꽃이 피듯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다.

예를 들면 "차를 마시면 내 내면이 푸르게 물든다."라고 하는 표현 같은 것이다. 선적인 경지에서 겪는 감성을 산문으로 가장 훌륭하게 나타내는 문학적 재능을 소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분을 존경하는 참 이유는 문재(文才) 때문이 아닐 것이다. 글로써 유명해졌지만 그 유명세에 매몰되지 않고 자아를 우뚝 세우신 분이다. 작품이 자아를 살찌우고, 자아가 작품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작품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정작 자신의 삶의 토양은 척박해졌던 많은 다른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문학·예술하는 사람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그래서 문학과 인품, 글과 수행이 하나로 응집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소유하면 법정스님을 떠올릴 정도로 '무소유'란 책은 유명한데 그중 필자는 "무소유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문장을 기억한다. 지금 한국인은 불행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롭되 정신은 황폐하여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스트레스 왕국이다. 교육열은 참으로 높으나 대단히 비교육적인 사회로서 독서율은 일본의 1/10 수준이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아늑한 행복 대신,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는 무한경쟁 속에서 더 가지려는 데 열중해 있기 때문에 내면에 행복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매우 좁다.

이렇게 된 원인을 일반적으로 탐욕으로 해석하는데 필자가 배운 바로는 경제학적으로 케인즈(J. M Keynes) 식 사고방식, 즉 '탐욕을 정당화하는' 잘못된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이다.

케인즈의 경제학은 "미래의 선을 위해서 현재의 탐욕은 필요하다"라는 사고 위에 세워진 것인데, 그 학문을 우리나라 학자들이 배워 와서 사회 곳곳에 뿌려 놓았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E. F. Schumacher)는 그런 케인즈 식 삶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할 수 있는 소지가 많음을 간파하고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경제학적으로 풀어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결론했다. 슈마허는 동남아 여행 중 캄보디아·태국 등 가난한 불교 국가의 사람들이 의외로 행복하다는 것을 발견한 후 연구의 관점을 바꾸었고, 이로 인해 마침내 미국식 자본주의와 판이한 경제학을 주창하였다. 철학과 사상이 결여된 경제관념은 지금 당장은 효과가 있는 듯하지만 결국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고 슈마허는 역설한다.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은 경제 뿐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건드리고 있다.

일찍이 예수는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바로 무소유 정신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 에리히 프롬(E. Fromm)은 사람들에게 두 가지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하나는 소유하면서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으로서 존재하면서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환언하면 존재한다함은 무소유에서 발현될 수 있다. 푸른 유리가 푸른 것은 푸른색의 파장을 보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에서가 아니라 방출하는 것에 의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것은(존재) 우리를 소유함으로써가 아닌 우리를 방출함으로써 가능하다"라고 에리 프롬은 쓰고 있다.

그리고 존재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필자는 학교에 있으니까 수업에 관한 설명이 가장 인상에 남았다. 점수를 따기 위해 받아 적는 식의 수업은 소유에 속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존재가 없다. 교수의 가르침에 녹아들어가 자신을 잊을 때, 학문의 분위기와 하나가 될 때, 배움의 기운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수업이다. 프롬의 책에서 나는 무소유가 갖는 새로운 의미를 배웠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자신을 잊는 것은 소유의 열망을 버렸을 때 가능함을. 자신에 대한 존재 의식이 희미해질수록 존재의 부피는 더욱 커진다. 상황과 하나 됨은 소유욕을 버림으로써 가능하다.

항간에 잘 알려진 불교의 천국 중에 도솔천이 있다. 도솔천은 인도어의 음역이요, 의역은 바로 지족천(知足天)이다. 즉 족함을 알면 죽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리가 천국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천국과 불교의 천국은 상통점이 있다. 동서양의 위대한 철학과 종교가 "소유심(所有心)"이나 탐욕을 경계함은 마치 어린아이가 지나치게 빨리 달리고 있을 때 어른이 "그렇게 달리다가 넘어진다"라고 하면서 붙잡아 주는 것과 같다. 자본에 의해 형성된 신 신분사회를 해체시키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를 구현한다면 대한민국이 바로 지족천이 아닐까.

여기서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가지지 말란 뜻이 아니고 필요 없는 것, 쓸데없이 넘쳐 나는 것을 가지지 말란 뜻임을 다시 강조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옷장에 있는 2/3의 옷을 일 년에 단 한 번도 입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물건들도 대부분 그러하다. 필자처럼 공부하는 사람은 평생 한 번도 보지 않는 책을 책장에 가득 쌓아 두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공간이 항상 비좁아 책을 볼 때마다 불행하다.

석가모니 가르침의 핵심은 무아(無我)이다. 무아를 실천함은 다른 진리가 다 그러하듯이 처한 경우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 나는 그것이 수처작주(隨處作主, 상황에 맞게 주인이 된다)라고 여긴다.

인도의 부처나 간디와 같은 수행자는 평생 옷, 그릇, 지팡이 세 가지만 갖고 있는 삶이 무아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받은 월급에 만족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가진 지식·재물을 못 가진 사람들과 나누며 나보다 약한 사람들을 위하면 그것이 바로 무아 정신의 발현이다. #그림2오른쪽#

마찬가지로 정말 세밀하게 따져본다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무아를 실천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 일전에 철학하는 분이 무아인데 어떻게 소유하느냐고 나에게 물은 적이 있는데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지금 추운 겨울이다. 이럴 때 따뜻한 법정스님의 말씀이 상기되고, 그 인연으로 생각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추스려서 적어 보았다. 장춘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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