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화의 창

무등일보·아시아문화원 공동기획 아시아문화의 창 <14>19세기 아시아 표류기 '해남잡저(海南雜著)'

입력 2018.12.17. 00:00 양기생 기자
풍부한 내용과 정보, 사건 진실성 등 타의 추종불허
아시아 표해서사 세미나

각종 포탈은 물론 인스타그램, 블로그, 유투브에는 해외 여행 관련 사진과 글이 넘쳐난 지 오래다. 유명 사적지는 물론, 맛집, 미술관, 와이너리, 스쿠버다이빙 등 테마도 다양하다. 이런 일들은 불과 일, 이백년 쯤 전에는 상상도 못 했다. 조선 국경을 벗어나는 길은 육로와 해로 단 두 개만 있었으나, 그 어느 길도 쉽지 않았다. 신분이나 경제적 제약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무사귀환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배를 타는 일은 더더욱 예측 불가였다. 그러니 이국의 풍광에 더하여 해상에서의 표류와 귀환이라는 드라마틱한 스토리까지 더해진 표류기가 늘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상관측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바다로 나갔다 다시 돌아 올 수 없었던 이가 부지기수였다. 또한 천신만고 끝에 생환한다 해도 그 경험을 글로 옮길 수 있는 있는 이가 매우 드물었다. 오늘날 전해져 온 표류기 중 적지 않은 수가 뱃사람이나 장사꾼의 구술을 받아 적은 것이다. 그러니 지식인이 직접 지은 표류기는 사료로서, 또 문학작품으로서도 그 가치가 매우 높다. 19세기 '해남잡저(海南雜著)'가 길이, 내용과 정보의 풍부함, 사건의 진실성 등에 있어서 단연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표류기로 꼽히는 이유이다. '남쪽 바다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로 번역될 수 있는 이 표류기의 저자 채정란(蔡庭蘭, 1801~1859)은 대만 팽호(澎湖)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함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1835년 가을 복건성을 건너가 향시를 치루고 팽호로 돌아가던 중 태풍을 만났다. 표류기에 의하면 그는 1835년 10월 13~16일 사이 베트남 중남부 광의성(지금의 꽝응아이)에 도착하여, 26일 귀환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듬 해 2월 초, 하노이에 당도하였으며 베트남-중국 국경선을 넘어선 것은 1836년 3월 5일자로 기록되어 있다. 광서-광동-복건을 거쳐, 팽호로 돌아오기까지 약 7개월이 걸렸으니, 베트남에 머무른 기간만 5개월이었다.

#그림1중앙#

채정란은 표류와 귀국의 경험을 정리하여 1837년 가을에 출간하였다. 베트남으로 표류를 했던 시기로부터 약 2년 뒤의 일로, 약 2만여자로 된 초판 1쇄가 나온 뒤 곧 2쇄가 나오고, 재판도 2쇄를 찍을 만큼 당시에도 큰 인기를 끈 것으로 보인다. 총 4개의 다른 인쇄본과 필사본이 중국, 대만, 일본, 베트남 등에 전해지고 있다. '해남잡저'의 명성은 해외에도 전해져, 베트남어는 물론 1877년 러시아어로 번역된 이래 불어·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초판은 현재 북경의 국가도서관 북해분관(北京國圖書館 北海分館)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초판 1쇄는 '창명기험(滄溟記險)','염화기정(炎荒記程)','월남기략(越南記略)'의 주요 표류기 본문과 스승이었던 주개(周凱)의 서(序) 이외에도 제사(題詞), 발(跋)을 같이 담았다. 초판 1쇄 뒤에 나오는 판본들은 내용에 더함과 뺌이 있고, 글자체나 판면이 다른 점 등 차이를 보인다. 아래 그림은 주요 판본과 번역본의 표지와 첫 페이지이다.

실제로 표류나 표착 등의 사건이 발생했고, 이를 사실대로 적었는가의 진실 여부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채정란의 표해 기록은 '해남잡저'뿐 아니라 베트남과 중국의 정부에서도 기록한 자료가 남아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우선 '해남잡저'11월 5일자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1월 초닷새, 고관이 왕의 교지가 내려왔다고 전하였다. 급히 관아로 가서 어지를 받으니, 붉은 글씨로 쓴 어지(珠批)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은 명문 문장가 출신으로, 불행히도 태풍을 만나 배가 완전히 부서져 몹시 가련한 처지가 되었다. 해당 성은 돈과 쌀을 주는 것 외에 성은을 더하여 상으로 돈 50관과 쌀 20되를 더 내려 자금으로 삼아 생활을 도모하게 하라. 이로써 짐이 험난한 상황에 처해 살아남은 것을 치하하는 뜻을 보이라. 다른 뱃사람들도 사람 수대로 매울 쌀 1되를 하사하라." 급히 글로 감사를 표하고, 성의 창고에서 물자를 넉넉히 받았다. 이로 인해 고관들이 한층 더 예를 표하고, 한가할 때면 함께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채정란의 해난 사고는 베트남과 중국의 정부 기록에도 남아 있다. 우선 베트남 완조의 국사관이 편찬한 '성종실록(聖宗實錄)』'명명 16년 (明命 16年, 곧 1835년) 동십월(冬十月) 강목하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고, 중국측 자료도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베트남 사료에 따르면 베트남에 표착한 중국 선박은 청대에만 30건 이상이며 대부분 광동의 선박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을 기록한 것은 거의 없으며 1688년 베트남으로 표류한 반정규(潘鼎珪)의 '안남기유(安南記遊)'와 '해남잡저'가 제일 유명하고 그 중 후자가 세밀한 기록과 방대한 양으로 손꼽힌다.

'해남잡저'는 상, 하 두 권으로 되어 있고, 상권은 다시 총 세 편으로 구성되었다. '큰 바다에서의 조난을 기록함'이란 뜻의'창명기험'은 1835년 10월 2일 금문에서 팽호로 돌아가는 배편을 타기 직전 기록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금문에 조부가 생존해 있었는데, 스승인 주개, 지인들과 어울렸던 일을 첫머리에 적었다. 10월 2일 아침 승선했는데 당일 오후부터 비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밤 12시가 되자 큰 태풍을 맞이하게 된다. 폭우와 태풍, 파도에 배가 휩쓸리며 돛대도 잘리고, 동승한 선주, 선원들, 동생과 함께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날짜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르는 암흑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자 태풍이 가라앉고, 배가 베트남에 도착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 관리가 와서 먹을 것을 주고 위로하였으며, 채정란은 하늘의 도움에 감사함을 느끼며 글을 맺는다. 세 편 중 가장 짧은 분량이다.

'덥고 습한 남방에서의 여정 기록'이란 뜻의'염황기정(炎荒記程)'은 1835년 10월 13일 베트남에 도착한 때부터 이듬해 4월 20일 하문(샤먼)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일별로 기록, 정리하였다. 세 편의 본문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약 118일 여정동안 만남 이들, 겪은 사건들, 여정 중 목도한 풍경과 민속 등을 세세히 기록하였다. 베트남 관리들이 표류된 배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와서 처음 심문하는 장면, 왕의 교지가 내려 선물과 식량을 준 일, 일반적으로 표착한 이들은 해로로 돌아가지만 고향의 노모를 염려하여 육로로의 귀환을 간청한 일, 다음 달 21일 드디어 중국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일, 1836년 베트남에서 새 해와 대보름을 맞이한 소회, 3월 5일 드디어 중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의 기쁨, 4월 22일 스승 주개 선생을 다시 만나서 이 일을 기록하라는 권유를 들은 일, 5월 2일 고향으로 가는 배를 타고 8일 어머니를 다시 뵙고 눈물을 쏟은 일이 적혀 있다.

마지막 '베트남에 관한 짧은 기록'이란 뜻의'월남기략(越南記略)'은 베트남의 역사, 정치, 문물, 환경, 의례, 풍속 등을 적었으며 귀환 과정에서 만난 베트남의 관원과 화교들과의 교유 등을 적었다. 베트남의 위치에서부터 시작하여, 역사를 시기적으로 정리하였다. 뒤를 이어 궁정의 풍습과 예절, 행정 체계와 관직 소개, 과거 제도, 생태와 대표적 동물인 호랑이, 코끼리 등 묘사 및 소개, 결혼 의식, 일상 생활, 농작물과 산물, 32개의 성과 지리적 특성을 기록했다. 하권은 이를 요약한 시문을 포함한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망실되어 그 내용을 현존하는 판본에서 확인 할 수 없다.

'해남잡저'의 양이 매우 방대하고 귀중한 아시아의 표류기로 손색이 없으나 유의할 점은 19세기 베트남과 중국이라는 맥락에서 '해남잡저'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베트남은 응우옌 왕조의 명명제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명명제는 선대 왕이었던 가융제(嘉隆帝)와 달리 강력한 숭유정책과 친중정책을 폈다. 가융제가 과거제나 행정문서에 민족어 쯔눔을 허용했던 것과 달리, 한자만을 사용하게 했고, 중국문화에 심취했다. 채정란이 베트남에서 받았던 환대와 편의는 이런 맥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그림2왼쪽#

동시에 채정란이 베트남에 머무른 5개월간 직접 목도한 사실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나 중국 중심의 조공체계와 유학중심주의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사실도 중요하다. 또한 그가 언어장벽으로 말미암아 매우 제한된 정보 취득과 소통 경로를 갖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와 한자로 필담을 나누던 베트남의 고관과 지식인이 일반 베트남인들과는 상당히 다른 물적, 정신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의 또 다른 소통 경로였던 '유우자'(有遇子) - 베트남 화교들은 이민자로서 현지인과의 다리 역할을 하였으나, 그들 역시 베트남인들과 다른 세계관과 문화에서 해석한 정보를 채정란에게 전달했을 가능성 역시 높다 하겠다.

안재연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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