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34>6세기 마한 연맹 왕국 실체를 밝혀준, 양직공도(梁職貢圖)(下)

입력 2018.12.11. 00:00
‘지미’는 마한 남부 연맹 강국 ‘침미다례’로 봄이 타당
해남 군곡리 패총 출토유물

지난 6일 전남도의회에서 '영산강 유역 마한문화권 개발 및 지원을 위한 고대 문화권 특별법 조속 제정 촉구 건의안'이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100대 국정과제로 선정되어 국고 지원 아래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가야권에 비해, 크게 낙후되어 있는 영산강 유역 마한권 개발을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국가의 대규모 지원은 중요하다. 그러나 정작 마한의 가장자리에 살고 있는 우리 지역의 관심이 보다 중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11월 말 국회에서 열린 전남도가 주관한 마한 관련 학술 세미나에서 가야사보다 늦은 시기에 마한사가 성립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금년 7월 광주교육청이 펴낸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마한' 역사가 완전히 누락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양직공도에 보이는 백제의 '방소국(傍小國)'들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국내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가야와 마한의 諸國들이 이미 오래 전부터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왜와도 빈번한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가야 지역의 6가야, 포상8국(浦上八國) 등의 얘기가 약간 남아 있을 따름이지만, 일본서기 등에는 이밖에도 여러 나라 이름들이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백제 사신이 양에 갔던 520년 무렵은, 475년에 고구려에 수도인 한성을 빼앗겨 그 중심이 충청도로 옮겨진 백제가, 남쪽의 전라도와 동남쪽의 경상도 지방으로 진출하려고 부심하던 때였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았을 법하다. '방소국'에 언급된 나라 가운데 '사라(斯羅)' 다음에 배열된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기문(上巳文)', '下枕羅(하침라)' 등은 섬진강 서쪽에 위치한 국가들이라고 하는데 대체로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백제가 신라를 기준으로, 앞부분에 섬진강 이동 지역의 가야 영역에 해당하고 있는 나라들을 배열한 것과 관련지어 볼 때, 뒷부분에 배열된 나라들은 아마도 마한의 영역에 해당하는 나라들이 아닐까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나라에 대한 일본 측 자료 또한,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 가야 지역에 있는 나라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없다시피 하여 실체 파악에 어려움이 따른다.

#그림1중앙#

양직공도 백제국사 자료를 처음으로 분석하였던 이홍직 박사는 일본서기에 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가장 앞부분에 있는 '지미'와 '마련'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지미'는 진서(晉書) 장화전에 보이는 마한의 20여 나라 대표단과 조공을 왔던 '신미국'과 음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신미국'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나아가 일본서기 신공기에 나와 있는 '침미다례'의 '침미'와도 음이 비슷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침미다례'와 '신미국'이 동일 왕국으로 보는 데 대체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미'는 마한 남부 연맹의 강국으로, 백제 근초고왕과 맞섰던 '침미다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고대 언어에서는 음과 훈의 사용례가 다르기 때문에 단순히 현대 한자의 음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연결 지으려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으나, '지미'라는 나라 이름이 6세기 중엽까지 분명히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현재의 한자 '음(音)'이나 '훈(訓)'과 어떤 형태로든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순리에 가깝다. 게다가 815년에 편찬된 일본의 성씨계보를 기록한 '신찬성씨록'에 등재되어 있는 백제에서 건너와 귀화하였던 가문의 후예로 알려져 있는 '지미연(止美連)'이 있다. 곧, '지미' 지역 출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를 방소국의 '지미'와 연결 지을 수 있다면, '지미'국이 실체가 있음은 분명하다 하겠다.

필자는 앞서 고대 지명이 언어와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침미다례'가 음운상으로 침명현(해남), 훈독상으로 도무군(강진)과 비슷하고, 지리적으로도 고해진과 가까운 강진·해남 일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인근 송지면 군곡리의 거대 패총, 삼산면 신금리 주거 유적과 옥녀봉 토성 유적, 장고산과 용두리에 있는 거대한 장고분 등은 이 지역에 일찍이 강한 정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장고산 고분이 있는 해남 북일면, 용두리 고분이 있는 삼산면은 일찍이 행정구역이 강진이었고, 그곳과 해남 송지면 군곡리 패총이 있는 백포만 해안까지 불과 30여㎞ 정도 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할 때, 강진만과 해남반도 일대가 침미다례의 영역이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한편, 백제가 '止美' 대신에 '止迷'라 하여 아름다울 '美' 대신 미혹할 '迷'를 사용한 것 또한 침미다례를 '남만(南蠻)' 즉, '남쪽 오랑캐'라 하여 멸시한 것과 상통한다 하겠다. 이를테면 백제가 가야 지역에서 그들과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였던 '가라'의 '반파(伴跛)'라는 이칭 대신에 '叛波(반파)'라는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제일 앞부분에 배치하여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지미'의 한자 표현을 부정적으로 바꾸고, 앞부분에 배열한 것은, 백제에 맞섰던 침미다례에 대한 정치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마련'에 대해 최근 위치 비정을 시도한 이용현은 구체적인 설명 없이 영산강 유역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마련' 음과 백제 때 무주의 행정구역 관할이었던 '마로현(馬老縣)'이 비슷하고, 현재도 마로현과 음이 비슷한 마룡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광양시 일대가 아닐까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 마한 54국의 하나인 '만로국'이 이곳에 위치하였다는 의견도 있고 보면, 마련은 광양지역에 있었던 마한 왕국의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으로 광양만권에 독자적인 정치체가 있었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상기문'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료가 많다. 일본서기에 '기문 대사(己文 帶沙)'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대사'가 섬진강 하류의 하동 지역이 분명하므로 기문은 그 근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기문'이라 하면, 기문의 상류에 있어야 하므로 지금의 남원 일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정치체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따르고 싶다.

5세기 후반 들어 차령산맥을 넘어 전북 지역으로 남하하던 백제는 노령산맥 이남 진출이 강력한 마한 남부 연맹체의 반발로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자, 지리산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남원을 경유하여 섬진강을 통해 광양만으로 나아가려 했다고 본다. 그러나 상기문, 마련 등의 국가들이 6세기 중엽 무렵까지도 독자적 정치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백제의 이러한 의도는 여의치 않았다고 본다. 말하자면 6세기 중엽까지도 마한 연맹체는 굳건히 연맹체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 가야계 고분이 보인다 하여 '전북가야사'를 주장하는 것은 어떤 교류 현상 내지는 일시적인 현상을 전체의 상황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하침라'에 대해서는, '침(沈)'과 '탐(耽)'이 통하기 때문에 '탐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탐라'는 '탐모라'라는 삼국사기 기사가 있다. 곧, 하침라는 제주를 가리키는 탐라가 아닌 이홍직박사가 주장한 강진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 침미다례의 '침미'와 하침라의 '침라'가 음이 서로 통하는 것으로 볼 때, '하침라'는 침미다례 옆에 있는 소국을 가리킴이 분명해 보인다. 498년 백제 동성왕이 광주 지역에 내려왔을 때, 조공을 하였다는 '탐라'가 바로 '하침라'이지 않았을까 한다. 침미다례를 견제하려는 백제의 입장에서 하침라를 이용하려 했을 법하다. 백제의 입장에서 침미다례보다 정치적 비중이 떨어지기에 방소국의 맨 뒤쪽에 배열하였던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듯 양직공도 백제국사 제기는 6세기 중엽까지도 영산강 유역뿐만 아니라 해남, 강진 일대, 섬진강 상·하류일대까지 마한 정치체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상론한 바 있듯이 영산강 중류 지역에도 복암리와 정촌 고분의 발굴, 조사를 통해 6세기에 들어서도 백제, 왜, 가야 등 여러 요소들이 융합된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곳에 '응준(鷹準)'으로 상징된 정치체도 마한의 용맹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마한의 남부 연맹 강국들은 6세기 중엽에도 섬진강 동쪽의 가야연맹체와 마찬가지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당연하겠다.

문학박사·동신대 기초교양대 강사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