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에세이- 즐거운 사랑

@무등일보 무등일보 입력 2018.12.06. 00:00

박성용 KBS광주방송총국PD

1982년 6월이었다. 남도의 어느 섬 중학교의 1학년 교실은 며칠 전부터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섬 학교에 발령을 받아 고작 3개월가량 근무했던 스물세 살 선생님이 갑자기 카투사에 입대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 때문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진즉부터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고 괜찮은 척 까불었던 남자아이들은 막상 당일이 되자 말수가 적어졌다. 이유 없이 아이들끼리 시비가 붙어 주먹다짐도 벌어졌지만 맥없이 흐지부지 끝났다.

당사자인 최모 선생님은 작별의 인사말을 하고 짐 가방을 들고 언덕에 위치한 중학교를 내려가 선착장으로 향하는 미니버스를 탔다. 미니버스엔 배웅하러 따라간 아이들이 만원이었고 이미 너무 울어서 누선이 말라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선착장이 보이기 시작하자 다시 버스 안은 울음바다가 됐고, 함께 탔던 마을 아줌마도 함께 울었다. 자리가 좁아 버스에 타지 못한 아이들은 버스를 따라 30여분을 뛰어서 따라왔고 땀인지 눈물인지 얼굴이 온통 번들거렸고 어떤 아이는 선생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대신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돌팔매질을 했다. 나도 그 눈물 콧물 흘렸던 아이 중 하나였다. 발령을 받아 오지 섬으로 온 교사들은 젊었고(12명의 교사 중 8명이 그 학교가 초임 발령지였다), 아이들은 풋풋한 선생님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3개월을 함께 한 교사와 중학교 아이들의 작별은 그렇게 한편의 신파를 완성했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전 당시 초임발령을 받고 온 은사 세 분이 당시 1학년이었던 우리들의 초대로 자리에 오셨다. 나는 오신 선생님 중 두 분과 간간이 연락을 해왔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전국에 흩어져 살면서 만날 기회가 적었다. 36년만의 감동적인 자리였다.

선생님들은 이제 함께 늙어가는 처지라며 친구들의 인사를 쑥스러워 하셨고, 실제로 어떤 동창녀석은 선생님 중 한분에게 '너 낯이 익은데 누구더라?'하고 묻는 바람에 왁자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한 친구는 선생님 만날 생각에 밤잠을 설쳤고, 어떤 친구는 선생님 때문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도 영어를 잘한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선생님이 해준 칭찬 한마디 때문에 지금껏 행복하다고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어릴 적 이해타산 없던 첫사랑 같은 관계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생생하다는 것에 모두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냥 있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운 존재가 정말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여전히 그런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이 의외의 감자알처럼 투두둑 뽑혀 나온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선생님들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 분들도 역시 첫 부임지에서 아이들에게 받은 사랑의 에너지 때문에 아직도 감사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인생의 비밀, 세상의 모든 적폐를 청산할 '제5원소'라도 발견한 듯 뿌듯해졌다. 그리고 나 역시 몇 년 전 전남의 작은 학교를 취재하는 며칠 동안 봤던 그 아이들 때문에 선생님들 때문에 정말로 행복했음을 이제야 깨닫는 것이다. 구례동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교감선생님, 영암학산초등학교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서로 주는 것 없이 주고, 받는 것 없이 한없이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다.

입시를 축으로 지옥도의 풍경을 그리며 돌고 있는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아직도 사랑의 기적을 몽실몽실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그나마 전남의 '작은 학교'들이 아닐까 하는 거친 생각도 내친김에 자유로웠다. 어찌됐든 36년 동안 즐거운 사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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