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47>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입력 2018.11.13. 00:00 이영주 기자
세상의 낮은 것을 따뜻하게 끌어안은 여성운동가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조아라 기념관 전경.

어머니라는 말처럼 따뜻한 말이 또 있을까? '광주의 어머니'로 알려진 조아라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 28일 전남 나주군 반남면 대안리에서 아버지 조형률과 어머니 김성은의 3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광주의 수피아여학교를 다녔다. 글쓰기를 익히고, 올겐과 피아노를 배우며 합창대와 하모니카 밴드 등에서 활동하였다. 성격이 밝고 다정하며, 성실하고 헌신적이어서 누구와도 잘 어울렸고 급우들의 신뢰와 신망을 받았다.

1929년 11월 나주역에서 발단한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조아라는 비밀결사조직에 참여하여 모금운동을 하였다.

1931년 3월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미국인 선교사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한국 이름 서서평)이 설립, 운영하는 '이일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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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월 9일이다. 조아라는 수피아여학교 시절의 '백청단'의 '은지환 사건' 주동자로 일경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백청단은 독서토론을 하는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였다. 10여명의 단원들은 은반지에 단원임을 표시하는 암호를 새기고 조선독립을 염원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서고자 했다.

결국 조아라는 이일학교 교사직을 박탈당하고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36년이다. 일제는 한반도 식민정책을 강화하면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수피아여학교는 이를 거부했고, 조아라는 모교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어 광주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달간 옥고를 치러야했다. 결국 이듬해인 1937년 9월 수피아여학교는 자진 폐교했고, 조선총독부는 학교의 건물과 부지 등 재산을 몰수하였다.

1940년이다. 조아라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운동의 부당성을 주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돌이 갓 지난 아이를 두고 광주경찰서 시외주재소의 유치장에 27일간 구금되었다. 그렇게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으나, 당당하게 맞서 한 치도 굽히지 않았다.

1942년 4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조아라는 광주 합동교화전도사로 일하며 조선의 독립과 기독교운동을 펼쳤다.

1945년 마침내 감격의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 기쁨과 함께 조아라는 '건국준비광주부인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림2중앙#

또 광주YWCA 재건에 앞장섰다.

"나라를 되찾았으니, 이제 우리 수피아여학교도 되찾아야 합니다."

조아라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항거하여 스스로 폐교했던 광주 수피아여학교의 재건에 앞장섰다. 1945년 9월 수피아여학교 동창회장을 맡아 광주 금정교회에서 기도회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동분서주 활약하였다.

1945년 12월 5일이다. 마침내 동창회가 주도하는 빛나는 활동으로 수피아여학교의 교문은 다시 열렸다. 조아라는 모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2년여 간 교단에 섰으며, 광주의 대표적 여학교인 수피아여중·고로 성장하는 초석을 놓았다.

1949년이다. 조아라는 전남도청 부녀계장을 맡아 1954년까지 여성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며, 걸스카웃연맹, 어머니회, 여학사회 등의 설립에 공헌하였다. 또 여성단체협의회를 조직하여 여성운동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게 하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말처럼 거친 돌밭을 일궈 한 송이 꽃과 한 그루 나무를 심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상흔은 광주도 폐허로 만들었다. 1952년 조아라는 '사랑의 작은 둥지 성빈여사'를 개설하였다. 전쟁고아들을 수용하여 비록 죽이지만, 끼니를 해결해주고 지식교육, 생활교육의 혜택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정식인가를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꽃과 나무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빈여사의 아이들 중 교육을 받지 못한 여자아이들을 위해 3년제 야간중학교를 설립했으니, 바로 '꿈을 키우는 호남여숙'이다.

1960년에는 대의동 75번지 170여평의 부지에 Y회관을 건축하였다. 당시 갑상선 수술을 받아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뜻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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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는 윤락여성들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소외받는 여성들이 다양한 직업교육을 받아 사회에 적응하고 일자리를 얻을 수 있도록 계명여성복지관을 설립하였다.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가정형편이 어려워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청소년들을 위해 '별빛학원'을 운영하였다.

1966년에는 남성들의 폭력과 횡포로 쫓겨나 갈 곳이 없거나, 경제적 능력마저 상실한 여성의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가정법률상담소를 개설하였다.

1968년에는 소비자보호운동에도 앞장을 섰다. '소비자 운동은 인권운동이다'라는 기치 아래 소비자보호운동을 전개하여 건전하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헌신하였다.

1980년 5월이다.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광주에 피바람이 불었다. 조아라는 5·18광주민중항쟁의 수습과 치유에도 앞장을 섰다. 항쟁 당시 수습대책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일로 인해 6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5·18관련 구속자와 부상자 등 그 가족을 돌보는 일,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이 땅의 민주화 정착에 헌신하였다.#그림4중앙#

또한 Y직원의 희생과 함께 총탄으로 얼룩진 대의동의 Y건물을 옮기기 위해 독일EZE, 스위스 WCC, 미국NCC를 순회하며 모금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2월 5일 광주광역시 유동에 새 YWCA를 신축하여 옮겼다.

평생을 여성의 인권, 소외받는 이들의 복지,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조아라의 마지막 소원은 평화통일이었다. 1992년 9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여성토론회에 한국여성계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렇게 일생을 인권, 민주, 평화로 헌신했던 조아라는 2003년 7월 8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광주YWCA 소심당조아라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2015년 9월에는 광주 남구 제중로 46번길 3-6에 소심당 조아라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곳은 조아라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다. 그녀가 가꾼 백일홍이 한 여름 내내 그리고 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곳이다.

광주는 물론 한국을 대표했던 여성운동가 조아라! 그녀는 오곡을 익게 하는 꽃 백일홍이 피어나는 기념관에서 세상의 낮은 것을 따뜻하게 끌어안고 '광주의 어머니'로 살아갈 것이다. 그를 추억하고, 그 정신을 기리며 실천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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