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29>영암 지역의 마한 왕국 '일난국(一難國)'

입력 2018.09.11. 00:00
'내비리국'과 서로 경쟁·협조하며 연맹 유지
월출산 장군봉

누차 언급했지만 4세기 후반 전라도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다는 통설은 더 이상 존립의 근거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통설이 대세인 것처럼 이해되고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이 지역의 마한 제국(諸國)의 실체가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밝히기 위해 여러 측면에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강진 해남 지역의 '침미다례', 영암 시종과 나주 반남 일대의 '내비리국', 다시들 지역의 '불미국', 보성강 중류지역의 '비리국', 득량만 일대의 '초리국', 낙안 지역의 '불사분사국' 등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언급된 연맹왕국들의 실체를 찾아냈다. 마한 연맹체들은 각기 독립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마한 연맹체로서의 공통된 문화적 특질을 지니며 강고한 정치체를 유지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마한 54국의 위치를 주로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비정한 천관우 선생이나 고고학적 유물 분포를 통해 살핀 목포대 이영문 교수나 전남대 임영진 교수 모두 전남 지역에는 12개 정도의 연맹왕국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필자가 살핀 연맹 왕국 이외에도 추가로 연맹왕국들이 더 자리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나머지 연맹체의 실체를 밝힐 책무가 필자에게 있다.

나주시와 영암군에서는 몇 년 째 마한 축제 행사를 별도로 치르고 있다. 올해도 나주는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영암은 10월 20일부터 21일까지 거의 같은 날에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지역 축제를 통해 마한의 역사를 되살려보려는 자치단체의 열정이 엿보인다. 그러나 나주와 영암은 같은 영산 지중해의 마한의 핵심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왕이면 두 지자체가 손잡고 공동으로 행사를 추진한다면 하나의 마한을 그려내는데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지자체들이 마한을 주제로 축제 행사를 해마다 개최하는 것은 이 지역이 마한의 중심지였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임은 분명하다 하겠다.

#그림1중앙#

다시들에 '불미국', 반남·시종 지역에 '내비리국'이라는 연맹왕국이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영암군의 유물 분포군을 보면 거대한 신연리 9호분 고분을 비롯하여 태간리 전방 후원분, 내동리 고분, 옥야리 방대형 고분 등 현재까지 확인된 대형 고분 15기 가량이 대부분 영산 지중해에 연한 시종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그 곳에 커다란 규모의 정치체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지역 정치체는 시종천 건너의 반남 지역 정치체와 통합을 하며 '내비리국'이라는 마한의 대국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목포대 이영문 교수는 지석묘 밀집 분포지가 있는 영암 덕진, 신북, 군서, 서호, 학산, 미암면 일대를 중심으로 시종 지역과는 별도의 정치체가 존재하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이영문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일찍이 언어학적으로 마한 소국의 하나인 '一難'을 영암 지역에 비정하였던 천관우 선생의 추론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 해주는 것이다. 천관우 선생은 '일난'의 옛 음 iet-nan이 영암의 옛 이름인 '月奈'의 음 ngiwdt-nai와 비슷한 것으로 추측하여 영암 지역에 '일난국'이 있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고분 분포만 놓고 보더라도 시종을 중심으로 한 도포·신북·영암읍 등지에 140여 기, 학산·미암·서호 등지에 30여 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는 등 크게 2개 지역으로 나누어 분포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영암 지역에는 시종천을 중심으로 반남 지역과 연맹을 결성한 '내비리국' 영역과 영암천을 중심으로 나머지 지역을 아우르는 소국인 '일난국' 등 두 개의 연맹왕국이 존립해 있었던 셈이다. 영암군청 홈페이지에는 당시 마한 왕국으로 '월지국'이 이곳에 있었다고 하여 다른 의견이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백제 때 이 지역이 '월나군'이었다고 하는데서 착안하여 '월'자라는 동음어에 기준을 둔 것 같으나 현재 학계에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있는 '월지국'은 충청남도 천안 일대에 위치한 마한 연맹 왕국의 리더였던 '목지국'을 잘못 기재한 것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져 있다. 따라서 '월지국'이 마한 시대에 영암 지역에 있었다는 영암군청 홈페이지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시종 지역에는 대형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어 커다란 정치체가 성립되어 있을 가능성을 분명히 하여 주고 있지만, 영암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에 위치한 '일난국'의 규모를 밝혀줄 유적들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도 '일난국' 연맹체가 강진 해남반도에 자리 잡았던 마한 남부 연맹의 패자 '침미다례'와 이웃한 '내비리국' 사이에 끼어 있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큰 세력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여하튼 영암 지역에 '내비리국'이라는 대국과 '일난국'이라는 소국이 서로 경쟁 내지는 협조하면서 연맹을 유지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전자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언급된 대국, 후자는 소국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와 같이 위지동이전의 54국 가운데 두 연맹왕국이 오늘날 영암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 지역이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국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영암 남쪽은 월남촌, 서쪽은 구림촌으로 신라 때 이름난 촌락이다. 이 지역은 서남해가 서로 맞닿는 곳에 위치하여 신라에서 당으로 들어갈 때는 모두 이 고을 바다에서 배로 출발하였다"라고 언급한 바와 같이 영암 지역은 영산지중해의 길목에 위치하여 물산의 유입 이동이 빠르다는 지리적인 이점과 다른 내륙의 평야 지대와는 달리 하천 부유물과 퇴적물 유입이 증가함으로써 하상보다 높아져 조수(潮水)의 영향을 받지 않은 비옥한 노출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어 다른 연맹왕국들보다 경제력이 튼튼했다. 훗날 이 지역이 백제에 편입되었을 때 '월나군'이라 하여 '현(縣)' 보다 격이 높은 '군(郡)'이 설치된 것은 이 지역의 정치적 힘이 강력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고려 때 이미 '소금강산'이라는 별칭이 붙었던 월출산 이름이 신라 때 '월나악'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는 이웃한 시종, 반남 지역의 백제 때 행정구역명인 '반나부리'의 '나'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를테면 '월나악' 명칭은 이미 내비리국이 있었던 마한 시대부터 월출산의 명칭이었고, 여기서 군명 '월나악'이 백제 때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통일 신라 시대에 '월나군' 명칭이 오늘날의 '영암군'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어지고 있는 데서 가능해진다.

조선 성종 때 출판된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월출산조에 영암인이라면 너무나 잘 아는 '動石' 이야기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최근 그 '동석'을 확인했다는 기사를 보았지만 월출산 '동석'과 관련된 인터넷상의 기사들을 검색하고 영암 출신 인사들에게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97년에 나온 '호남읍지'에 실려 있다고 하는 등 동국여지승람 기록과 전승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있음을 느꼈다. 동국여지승람 '동석'관련 해당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월출산구정봉 밑에는 바위가 셋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 데 높이가 한 장이고, 둘레는 10여 위가 되는 데 서쪽으로는 봉우리를 향하고 동쪽으로는 절벽으로 향해 있는데 1천100명이 들려 해도 꼼짝 않은데, 1명이 밀면 움직인다. 아무리 절벽 밑으로 밀어내려 해도 떨어 뜨려지지 않는다 하여 '靈石' 즉 신령스런 바위라 일컫는다. 군 명칭이 이에서 비롯되었다"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영암' 이름이 '영석'의 '석'자를 같은 훈인 '암'으로 바꾸어진 데서 유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영암군 명칭은 신라 경덕왕 때 '월나군'의 명칭을 바꾼 것이라 할 때, 이미 '동석'의 존재를 알고 군명을 개칭할 때 사용된 것이라 여겨진다. 경덕왕 때 추진된 행정 구역 개편은 충북 길동군을 영<길永>동군으로 고친 것처럼 전국의 모든 행정구역을 漢式으로 고친 것이었다. 이때 영동군처럼 이전 지명과 상관이 있거나 전남 '보성군'처럼 중국의 지역 명칭을 차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암군처럼 월출산 '동석'과 연결을 지어 군명을 정한 경우는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는 이 지역의 정치 세력이 백제에 편입된 후에도 토착성을 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바로 이웃 마한의 대국 '내비리국'이 백제에 의해 '반내부리'라고 명칭에서도 수모를 겪고, 행정 단위도 '현'으로 축소되었다가 통일신라 때 郡으로 승격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바로 이웃 영암 쪽에 있었던 또 다른 정치 세력은 세력을 유지한 채 거센 물결을 이겨내고, 통일 신라 시대는 물론 고려시대까지도 '郡'의 지위를 잃지 않았던 것이 이를 말해준다 하겠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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