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 교수의 다시쓰는 전라도 고대사

박해현의 다시 쓰는 전라도 고대사Ⅱ <28>마한의 용맹한 표상(表象), '鷹準(응준)'下

입력 2018.08.28. 00:00
‘매’상징으로 한 또다른 세력 백제의 주류 형성 추측
꿩사냥 모습(전북 진안).

마한에서 신라와 가야의 원형인 진한과 변한이 갈라져 나왔고 백제 역시 마한에서 땅을 얻어 세워진 나라라고 하는 사실은 기록에 나와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마한은 백제는 물론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에 있는 고대 국가들의 뿌리인 셈이다. 마한사가 한국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위치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백제사의 일부로 인식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가야사와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므로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가야사 연구 진흥과 관련하여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 마한사 연구가 거시적인 접근과 함께 미시적인 연구가 함께 체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숲속에 들어가 우왕좌왕 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마한사를 이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살피고 있는 '응준' 이야기도 잃어버린 마한의 실체를 밝히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지난 호에서 황룡사 9층 목탑에 나와 있는 '응류'가 백제의 별칭이라고 하는 사실을 선덕여왕 때인 7세기 전반까지도 신라인들이 인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하며 얘기를 마무리하였다. 필자가 갖는 의문은 왜 '남부여'라는 국명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백제 사회 내부에서 사슴을 상징으로 하며 '남부여'라고 국명을 바꾼 부여 계통의 백제 왕실과 달리 '매'를 상징으로 하였던 또 다른 세력이 백제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그림1중앙#

전주 우석대 조법종 교수가 '응류' 곧 '응준'은 부여계 유이민 세력을 대변하는 명칭과는 다른 계통이라고 살핀 바 있다. '응준'을 백제가 형성되기 이전의 정치체, 말하자면 삼한 사회의 문화적 특징으로 살펴 '伯濟'·'十濟'·'百濟'·'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한 부여계통성과 구분하는 의미로 살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응준'은 백제가 구체적 존재로 등장하기 이전 또는 다른 지역 세력 명칭을 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조교수가 '응준'을 부여 계통과는 다른 집단으로 보는 것은 탁견이라 생각된다. 다만 조교수는 응준을 백제의 일부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한 남부 연맹의 상징이라 하여 백제를 상징하는 남부여와 대칭되는 것으로 살핀 필자와는 견해가 다르다.

실제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에 남부여라는 백제를 뜻하는 국명 대신에 '응준'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을 볼 때 '응준' 명칭이 7세기 전반까지도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응준'이 조교수가 말한 단순한 문화적 특징이 아닌 정치적 실체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7세기 전반 선덕여왕 당시 신라를 압박한 '응준'은 부여 계통의 백제 세력이 아니라 마한 남부 연맹 계통의 백제 세력이 아니었을까 라고 살피는 것이 기록에 보다 충실한 해석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 무렵 것으로 여겨지는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녹유탁잔에 '응준'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을 보면, 피장자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시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 '응준'이라 부르는 마한 남부 연맹의 거점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라의 별칭이 '닭'을 의미하는 '계림'인 것처럼, '응준'의 중심지였던 영산강 유역에도 '매'와 관련된 사회, 문화적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이곳이 '응준'의 핵심 지역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마한 남부 연맹 지역에 해당하는 차령이남 여러 곳에 '매'와 관련된 기록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고려 충렬왕 원년 '응방(鷹坊)'이 처음 설치되었고, 그 중심이 나주 장흥부 관할이었다는 '증보문헌비고' 기록이 주목된다. 응방은 잘 알고 있듯이 원 간섭기에 '해동청(海東靑)'으로 유명한 고려의 '매'를 공물로 바치기 위해 설치된 관청이었다. 그 응방의 중심 지역이 나주라는 것이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전라도 지리산에 '응준'이 서식하여 매년 공물로 진상한다" 라고 하여, '매'의 산지로 전라도 지역을 유일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지역과 '매'의 관계가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지금도 전북 진안 지역에서 '매'를 이용한 꿩 사냥 전통이 남아 있는 것도, 매와 전라도 지역이 전통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보면 '매' 곧 '응준'이 마한 남부 연맹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한편, 일본서기에도 백제의 '매'를 이용한 사냥 풍습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백제 때의 사실이라고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전라도 지역이 '매' 주생산지이고 마한 남부 연맹의 상징이었다고 하는 사실과, 인덕천황 43년(455년) 시기의 기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백제 이야기라기보다는 마한과 관련된 사실을, 후대에 백제의 것으로 오인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말하자면 일본서기의 기록은 마한의 매 사냥 이야기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위 기록에 뒤이어 "백제의 풍속에 이 새를 구지(지금의 매를 말한다)라 하였다(百濟俗號此鳥曰俱知(是今時鷹也)"라고 한 기록이 관심을 갖게 한다. 말하자면 백제에서 매를 '구지'라 했다는 것인데, 이 기록이 마한 시기의 사실을 반영한다고 하였으므로 마한에서는 '매'를 '구지'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이와 같이 '매'를 '구지'라고 부르는 전통이 16세기 중엽 최세진이 쓴 '훈몽자회'에 '매'를 '구겨내'라고 적고 있는데서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매'를 그들의 고유어로 '구지' 또는 '구지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본에서 백제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구다라'라고 하는 것을 익히 아는 사실인데, '구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매'를 뜻하는 '굳'에 '나라'라는 의미를 보태면 '구다라'라고 하는 용어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 고대 문화 성립에 기여한 도래인들의 대부분이 마한계, 특히 영산강식 토기로 상징되는 영산강 유역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구다라'는 '백제'가 아니라 '마한'을 총칭하는 일본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리게 된다.

이처럼 마한 지역이 매를 상징으로 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백제가 5방으로 지방 편제를 할 때 남방에 구지하성(久知下城)을 두었다는 중국 北史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전라도 지역에 해당하는 곳을 '구지하성'이라고 한 것은 이 지역이 '응준'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전북 김제에 해당하는 금구현도 '구지지산'이라고 하는 등 마한 남부 연맹 여러 곳에 '구지'라는 지명이 많다는 것도 이러한 추론의 방증이 될 것이다.

결국 6세기 무렵까지도 '사슴'으로 상징되는 부여계인 백제 중심의 마한 북부 연맹과 '매'로 상징되는 마한 남부 연맹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리고 다시들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복암리 1호분 피장자가 그러한 연맹을 대변하고 있었으리라고 하는 것을 '응준' 녹유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서 마한을 '용맹하다'라고 기술한 것은 마한 남부 연맹체가 '응준'을 상징으로 하며 중국 중심의 질서에도 동참하지 않고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모습을 기술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렇게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며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주변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던 막강한 마한 남부 연맹이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한 차례 공격으로 무너질 수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오히려 6세기 무렵까지도 백제와 치열하게 정립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를 끌어 들여 고구려와 대회전을 앞두고 있는 백제의 입장에서는 마한 남부 연맹 세력과 공존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복암리 1호분 세력에게 '응준'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녹유명문은 이때 주어진 선물이라 생각한다. 이것을 백제 국왕이 복암리 세력에게 사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영산강 유역의 '응준' 세력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하고, 대신 백제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 데서 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선덕여왕 때 황룡사 9층탑에 마한 남부 연맹을 지칭하는 응준이 나오는 것은, 당시 마한 남부 연맹 계통의 백제 세력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마한 남부 연맹이 백제에 통합될 때 부여계의 백제 왕실과 사실상 대등한 수준으로 통합이 이루어졌고, 내부적으로 치열한 세력 다툼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무왕의 익산천도 및 의자왕 대 처절한 정쟁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닌가 한다. 이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백제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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