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37>문학으로 시대를 열었던 여류소설가 박화성

입력 2018.06.26. 00:00 최민석 기자
여성으로 한국 최초 장편역사소설 '백화' 집필
목포의 선창에서 객주업을 하는
아버지 박운서와 어머니 김운선
사이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박화성은 4살 때 한글과 천자문을
거침없이 읽을 만큼 명석한 아이로
목포 옛집에서의 박화성

박화성(1904~1988)은 1932년 6월부터 11월까지 여성으로는 한국 최초로 장편역사소설 '백화(白花)'를 쓴 소설가다.

본관은 밀양, 본명은 경순(景順)이며 호는 소영(素影)이다. 전라남도 목포의 선창에서 객주업을 하는 아버지 박운서와 어머니 김운선 사이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박화성은 4살 때 한글과 천자문을 거침없이 읽을 만큼 명석한 아이로 7, 8세에는 '삼국지, 옥루몽, 구운몽' 등 고전 소설을 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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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목포 정명여학교 시절 '유랑의 소녀'라는 소설로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 서울의 정신학교로 편입하여 급우이던 김말봉, 한 학년 위인 김명순 등과 어울리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이 학교의 엄격한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918년 졸업하였다.

학교를 마치고 충청남도 천안과 아산의 보통학교 교원으로 잠시 근무하다가 1922년 영광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3년여 머무르며 시조작가 조운 에게 시 쓰기 등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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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잡지 '부인'에 수필 'ㅎㅍ 형께'와 '정월 초하루'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시보다 산문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조운의 부추김에 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1923년에 쓴 단편 '추석 전야'가 '기교는 덜 되었지만 눈물로서 쓴 작품이다. 우리 누이들 중에서 이렇게 정성 있고 힘 있는 이를 만나는 것은 심히 기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이광수의 추천사와 함께 1925년 1월 '조선문단'에 발표되었다.

이해에 박화성은 문학에 대한 꿈을 이루고자 상경하여 일본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파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학제가 바뀐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1926년 개교 이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옛 담임교사의 도움으로 일본 '니혼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유학시절 박화성은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독서회'에 가입해 토론을 벌이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다.

1928년 1월에는 여성항일구국운동단체인 '근우회(槿友會)' 도쿄지부 창립 대회에서 위원장으로 뽑혔다. 하지만 학비 조달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학업을 잇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1930년이다. 박화성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김국진은 오빠의 친구로 '안수길, 이주복' 등과 함께 동인지 '북향'을 내고 단편 '설'을 쓴 사회주의 문학가였다.

박화성은 결혼 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다니던 학교에 복학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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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쓴 단편 '하수도공사'를 이광수가 잡지 '동광'에 추천하여 작가 생활을 재개한 박화성은 이 해 첫 장편소설 '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3년 이후 1938년까지 박화성은 일제의 침탈로 고통 받는 도시노동자, 서민, 농민을 다룬 작품 20여 편을 발표하였다. '한귀(旱鬼)', '홍수 전야', '고향 없는 사람들'에서는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간이 겪게 되는 극한 상황을 그려낸다. 또 '비탈(1933), '헐어진 청년회관(1934), '불가사리(1936)'에서는 일제에 빌붙어 자본주의적 향락에 젖어 사는 아버지와 형제 틈에서 항일 정신을 고수하다 가출하는 젊은 민족주의자의 모습과 '온천장의 봄', '중굿날' 등에서는 돈 몇 푼에 팔려가는 여인들의 행로를 담는 등 다양한 소재의 소설을 내놓는다.

이 사이 박화성은 남편 김국진과 불화가 깊어졌다. 반전 삐라사건으로 투옥된 김국진은 출옥하자 간도로 가버렸고, 1937년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그리고 자살 소동을 벌이며 끈질기게 구혼하던 '천독근'과 재혼하였다. 당시 일제는 모든 글을 일본어로 쓸 것을 강요하였다. 박화성의 원고는 총독부의 검열을 거치지 못하고 온통 빨강 빗금으로 그어져 되돌아왔다고 한다.

1938년 박화성은 날로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고향인 목포로 낙향하였다. 절필하듯 침묵하였다.

1945년 마침내 광복이 되자, 사회주의계열인 '조선문학가동맹'의 목포 지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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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성의 이러한 사회주의적 행로는 오빠와 시인 조운, 남편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네 살 위 오빠 박제민은 1926년 노동조합 선동혐의로 옥살이를 했고, 조운도 1919년 영광 독립만세시위, 1937년 영광삐라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다. 남편 김국진 역시 삐라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문학가였던 것이다.

아무튼 박화성은 잡지 '민성'에 단편 '봄 안개(1946)'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활발히 재개하여 '진달래처럼', '파라솔', '광풍(狂風) 속에서' 등을 연달아 발표하고 단편집 '고향 없는 사람들'과 '홍수 전야'를 펴냈다.

1955년 이후에 '고개를 넘으면(1955~1956)' '사랑(1956~1957)', '벼랑에 피는 꽃(1957~1958)', '내일의 태양', '바람뉘(1958~1959)', '태양은 날로 새롭다' 등을 일간신문, 잡지에 연재하였다.

1963년 '국제펜클럽' 한국 본부 중앙 위원을 맡았다. 또한 쉬지 않고 전기적 장편 소설 '눈보라의 운하', 장편 소설 '열매 익을 때까지', '창공에 그리다'와 수필집 '추억의 파문' 등을 출간하였다.

1970년 문공부 문학상, 서울시 문화상의 심사 위원을 맡았고, 장편 '벼랑에 피는 꽃' '내일의 태양'과 중편 '햇볕에 내리는 뜨락', 수필집 '순간과 영원 사이'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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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예술원 종신회원(소설)이 되었고, 1987년 '한국문학'에 권두 에세이 '참 사랑이 있는 곳에'를 쓰는 등 박화성은 팔순에 이르도록 지칠 줄 모르는 창작욕을 불태웠다.

1988년 1월 30일, 문학으로 험난한 시대를 열었던 목포가 낳은 여류 소설가 박화성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집에서 여든네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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