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문화의 창

무등일보·아시아문화원 공동기획 아시아문화의 창 <4>캄보디아 전통예술 복원의 다양한 사례

입력 2018.05.16. 00:00
문화유산으로 상처를 치유하다
캄보디안 리빙아트의 설립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안 쫀본, 그는 1998년
재단을 설립하고 크메루 루즈 시대에
살아남은 장인들을
지역마다 찾아다니며
전통문화를 복원하는데 주력했다.
스와이 사례트(Svay Sareth)와 그의 아내(Maline Yim) 인터뷰(시엠 립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나는 난민 캠프에서 자랐다. 7살의 해인 1979년부터 나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버지는 시아누크(Sihanouk)와 론 놀(Lon Nol) 정권에서 군인이었지만, 크메르 루주가 집권했을 때는 농부로 활동하며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가족이 피해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신분을 숨겼다. 크메르 루즈 정권이 집권에 실패하자 이번에는 보복이 두려워서 아버지는 난민 캠프로 탈출을 했다. 군인의 신분을 숨기면서 크메르 루즈에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로 우리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어린 우리를 데리고 캠프로 향했다. 나는 그렇게 그곳에서 13년 동안 살게 되었다."

평소 캄보디아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크메르 루즈(Khmer Rouge)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크메르 루주는 '붉은 크메르'라는 뜻으로, 1975년 미국과 왕정(캄보디아왕국)에 대항하여 프놈펜을 장악했던 급진적인 좌익 무장단체를 말한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의 영향으로 캄보디아도 미군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수십만 명에 달하는 민간 희생자가 발생했고, 이에 대한 반감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산 게릴라 세력에 가담했다.

#그림1중앙#

쿠메르 루즈는 공산정권인 민주캄푸치아를 세웠다. 그리고 우두머리인 폴포트(본명은 살롯 사, Salot Sar)는 집권기간 4년 동안 독재를 위해 200만 명을 학살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킬링필드(Killing Fields)이다.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한 집계가 이뤄지지 않았다. 대략 인구의 25%가 학살당하거나 굶어 죽거나 의료 부족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림2중앙#

지식인 계층과 전문직 종사자, 유산계급은 척결의 대상이었다. 복수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가족과 어린 자식들까지 몰살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그들이 지식인을 판별하는 기준은 대머리와 안경을 낀 사람들이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머리숱이 빠지고 눈이 나빠졌다는 생각에서였다. 예술인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종교 행위와 신앙 활동도 제지되는 판국에 예술 활동이 자유로울리 만무했다. 대부분의 저명한 예술가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난 2월 내가 캄보디아 시엠 립에서 만난 예술가는 스와이 사례트(Svay Sareth, 46)이다. 그는 설치미술가이자 퍼포먼스 작가이다. 그가 자란 곳은 태국과 캄보디아 국경선에 위치한 캠프로,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쳐했던 임시 거주지였다.

"그곳에서 나는 학교를 다녔어요. 프랑스 자원활동가가 운영하는 예술수업을 들었죠. 어렸을 때는 예술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몰랐죠. 다만 내 표현을 종이 위에 그리는 것이 좋았어요. 아마 종이 위에서 자유를 찾았던 것 같아요."

그가 캠프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자유를 잃어버렸던 경험과 자유의 소중함이었다. 사회로부터 추방은 그가 선택한 삶이 아니라, 외력에 의한 강요였던 것이다.

#그림3중앙#

"아버지를 찾으러 가는 길에서 나는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죠. 숲에 방치된 시신들, 부상당한 사람들, 다리를 잃은 사람들, 폭탄과 화염 속에서 도망치는 사람들… 그곳에서 법이라고는 없었어요. 폭력만이 난무했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너무나 쉬웠어요.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텐트뿐이었죠."

시간이 흘러 13년 만에 20만 명의 피난민들은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힘겹게 돌아간 고향은 꿈에 그리던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여전히 가난과 기근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례트는 새로운 곳으로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가 찾은 곳은 프랑스. 그곳에서 그는 예술의 역사와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예술을 통해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정체성을 찾는 방법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과 아픔, 희생자, 정부와 세상에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자유에 대한 주제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다. 과거의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들이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는 2016년 프루덴셜 아이 어워즈(Prudential Eye Awards) 현대미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활발한 작품 활동 외에도 그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실천가의 삶을 살고 있다. 1994년 캠프 출신자들과 함께 캄보디아 아트스쿨 NGO기구('예술의 빛'이라는 뜻을 지닌 Phare Ponleu Selpak)를 설립했다. 자신이 어렸을 때 프랑스 봉사가로부터 배운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바탐방 지역에는 재단 본부인 학교를 세웠고, 시엠 립에는 서커스 공연장을 만들었다. 특히 서커스에는 저항정신을 담아 현대의 사회적 이슈를 역동적인 퍼포먼스로 전달한다.

샤례트는 아티장 앙코르(Artisans Ankor)의 디렉터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아티장 앙코르는 1998년 시엠 립에 설립된 전통 크메르 공예와 실크를 생산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교육 기회의 제약을 받는 농촌지역 청년들에게 전문 기술을 제공하고, 고향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준다. 설립 이후 현재까지 800여명의 공예가를 배출했고 1천200명의 직원과 시엠 립 주변 14개 지역에 총 48개의 작업장을 가지고 있다.

"후배들에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라고 알려주고 싶어요. 자유로운 생각과 창조의 자유, 그리고 이러한 것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죠."

캄보디아에는 사례트 외에도 전통예술문화의 부흥을 위해서 노력하는 전문가와 단체가 많다. 해외 매스컴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던 캄보디안 리빙아트(Cambodian Living Arts)의 설립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안 쫀본(Arn Chorn-Pond)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1998년 재단을 설립하고 크메루 루즈 시대에 살아남은 장인들을 지역마다 찾아다니며 전통문화를 복원하는데 주력했다. 어려운 환경에 있는 예술가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고 전통이 끊이지 않도록 지원했다. 처음 10년 간 전통문화에 대한 복원에 힘을 썼다면 이후 10년 동안은 다양한 지역에 문화를 부흥하는 운동을 펼쳤다(12개 아트폼을 설치하고 1천여명의 학생을 모집). 대부분 전통음악과 공연, 연극을 다루며 축제와 같은 행사와 아카이빙 프로젝트도 수행했다. 2011년부터 재단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서 새로운 전략을 시도하면서 장학금제도와 국립박물관(프놈펜 소재)의 정기 공연 등 70여명의 아티스트들이 계속해서 예술 활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이다.

만약에 캄보디아를 가게 된다면, 앙코르 와트 사원 외에도 이렇게 다양한 전통예술 복원의 현장을 구경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림4중앙#

심효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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