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지행의 세상읽기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실존적 인간 이해에 대하여

입력 2018.04.06. 00:00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존재
장 폴 샤르트르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단순히' 먹고 마시며 사는 생존에 만족하지 않는다

'단순히' 살아가지 않는다는 뜻은

각자 나름대로 사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 뜻을 묻고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으며, 기쁨을 찾을 수 있다

단순한 생존에서 실존으로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단순히' 먹고 마시며 사는 생존에 만족하지 않는다. '단순히' 살아가지 않는다는 뜻은 각자 나름대로 사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한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그 뜻을 묻고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사람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눈에 보이는 사실적인 설명을 넘어서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정신적인 것에서 인간의 특성을 찾으려는 실존적 인간 이해라 할 수 있다.

실존적 인간 이해라 함은 사람을 전통적으로 고정된 틀 안에서 인간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구체적 모습을 하며 살고 있는 인간을 개별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환경에 따른 개별성을 갖는 존재로 각기 다른 자신만의 환경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실존적으로 이해하려면 개인들의 개별적 체험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개인들은 각기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환경 안에서 불안, 공포 그리고 고통으로 시달리는 삶을 산다. 이들이 가진 정신적 어려움은 이성적 설명이나 충고에 의해서 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을 이해하려면 논증하여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데에서 그치지 말고 그 사람의 고통스런 삶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데 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실존에 대한 자각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포함한 이웃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의미 없는 세상을 살고 있으며, 점차 사라지고 희미해지며 결국은 병들어 죽어가는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희망을 찾지 못하고, 절망에 떨어지게 된다. 비극적으로는 극단의 선택에 이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바로 이곳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더 이상 출구가 없다고 생각되는 삶의 막힌 골목길과 절벽에서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삶에의 충동이다.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은가?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바로 여기에서 사람은 자신이 주체가 되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엄숙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사르트르는 생의 막다른 절벽에서 느낀 이 충격을 '구토' 혹은 '메스꺼움'이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하여 결정하라는 얼음 같은 차가운 외침 앞에서 눈앞이 꽉 막히고 몸 안에서 뜨거운 액체가 등뼈를 타고 끓어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이제까지와 다른 차원의 삶을 시도하게 한다. 그래서 실존은 경험을 통해서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체로서 몸의 탄생은 진정한 의미의 탄생이라 할 수 없다. 몸이 태어나는 것으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냥 몸으로서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땅 위에 한 사람으로서 살기 시작한 이후, 비로소 사람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느끼고 행동하며, 체험하고 욕망을 갖게 된다. 사람은 우선 존재한다. 존재를 시작하는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다. 사람은 나중에 어떤 무엇이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한 후 스스로 만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실존적 입장에서 봤을 때, 사람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자기에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그 반대의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림1왼쪽#

두 가지 실존적 인간이해

사람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실존적 이해는 이렇다.

첫째,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자각과 둘째, 완성을 향해서 지속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자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생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종결되었다는 것으로 죽음을 의미한다. 즉 생의 부정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의 생은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이 지향하는 상(像)에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이것은 끊임없이 '지금'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나의 행동과 판단에 의해서 또 하나의 "내"가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자유'를 조건으로 이뤄진다.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고 그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즉 실존적 인간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

어떻게 보면 삶의 실존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노예 아닌 자유정신의 결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내던져진 것이 극히 우연한 일인 것처럼 우리 자신이 자유를 자각하는 것도 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설명이나 반박이 필요 없는 극히 당연시 되는 일이다.

사르트르는 그래서 인간은 자유라는 형벌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최대한 잘 알아야 한다. 이것이 우연하게 지구라는 곳에 태어난 인간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이다. 자유를 선고받은 인간은 자기에게 맡겨진 과제를 깨닫고 이를 실천할 책임을 갖는다. 사람에게 있어서 자유와 책임은 함께 손을 잡고 견제한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의 가혹한 씨줄과 날줄의 얽힘 속에 어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부유하든, 중산층이든 혹은 가난하든, 극빈이든 누구나 자신들의 고통과 절망을 안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전받는 삶의 조건이다. 이 지평 위에서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토대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이미 주어진 조건들과 주어진 환경이 한 사람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바로 실존을 자각한 사람이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가지 못하면 자신이 아닌 다른 힘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실존은 참여하되 반성적이어야 한다

타자에 의해서 도구로 사용되지 않으려면, 사람은 자신의 실존적 삶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자유롭게 행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유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유를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선택한 인간은 자유를 수행해야 할 책임을 갖는다. 이러한 자유와 책임이 인간 자신의 결핍과 삶의 부조리한 우연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다.

물론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거나 간단한 해결방법을 구하고 쉽게 끝을 내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거기에 따른 결과는 모두 자신에게 부과되는 몫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내 자신의 결정이 안게 될 뒤에 오는 것들은 모두 내 행위에 남겨진 책임의 몫이다.

사르트르는 행위 하지 않는 자유보다는 자유의 폭과 넓이를 확대할 수 있는 '사회참여'(앙가쥬망)를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참여는 고통과 무의미함으로부터의 도피하는 자유가 아니라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에 맞서 싸우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투쟁에의 참여이다. 그 과정에서 결정과 결단이 잘못될 수 있으며, 결론적으로 참여와 투쟁이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참여하고 도전해야 한다. 참여와 도전에 의해서만 사람은 자신의 실존을 찾아갈 수 있으며, 삶에의 의미를 찾는 일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실패마저도 실존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투쟁의 흔적이 될 수 있다. #그림2오른쪽#

그러므로 사람은 의미 있는 현실참여 행위를 하지 않고 삶에서 실존을 경험할 수 없다. 참여하는 실존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고 무의미를 의미로 바꾸는 삶이다. 실존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의 도구에 불과한 삶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동시에 자신의 참여행위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현명함을 갖지 못하면 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실존적 인간은 곧 자기 반성적 인간이기도 하다. 박해용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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