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31>숙빈 최씨, 영조의 어머니- 궁중 나인에서 국모까지 오른 신데렐라 같은 여인

입력 2018.04.03. 00:00 최민석 기자
대기근과 함께 부모를 졸지에
잃은 숙빈 최씨의 삶은 궁핍
그 자체였다. 숙빈 최씨가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간
배경이 아닌가 싶다
최씨는 내명부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빈(嬪)으로 승격되었다
최숙빈 고향으로 알려진 담양 대전면 갑향리 소두 마을 전경.

숙빈 최씨는 조선 21대 왕 영조의 어머니다. 숙빈 최씨는 궁궐의 하인이라 할 수 있는 궁중 나인이었으나, 19대 왕 숙종의 비가 되어 영잉군(영조)을 낳은 신데렐라 같은 여인이다. 또 영조의 혈통이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까지 이어졌으니, 숙빈 최씨는 조선의 대표적인 국모이다.

숙빈 최씨는 1670년 서울 여경방 서학동에서 아버지 최효원(1638~1672)과 어머니 남양 홍씨(1639~1673)의 1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두 살 때, 어머니는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세 살에 천애고아가 된 것이다.

훗날, 오빠 최후는 통정대부 안준영의 딸과 혼인하여 정4품 외관직 무관 벼슬인 만호(萬戶)에 이르렀고, 언니 최씨는 부사 서전과 혼인했다.

당시 숙종의 정비는 서인의 후원을 받은 인현왕후 민씨였다. 또 희빈 장씨도 갑부인 역관 장형의 서녀로 남인의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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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숙빈 최씨는 이렇다 할 배경이 전혀 없었다. 본관이 해주(海州)인 증조할아버지 최말정은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지만 조부 최태일은 등과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조선시대 정규군인 행충무위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로 종 6품 무관이었다.

당시 대기근이 조선을 휩쓸었다.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이 경신대기근은 '임진정유 7년 전쟁 때도 이것보다는 나았다'고 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때의 대기근과 함께 부모를 졸지에 잃은 숙빈 최씨의 삶은 궁핍 그 자체였다. 숙빈 최씨가 어린 나이에 궁궐에 들어간 배경이 아닌가 싶다.

숙빈 최씨는 1676년(숙종 2년) 7세의 나이로 입궁하여 침방나인이 되었다. 궁녀들은 어린 시절 생 각시로 입궁하는데 지밀나인은 4~5세, 침방과 수방은 7~8세, 나머지는 13~14세 때로 주로 가난한 평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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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입궁하여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15세에 관례를 치르면 정식 나인이 되었다. 숙빈 최씨도 7세 때 침방나인을 거쳐, 인현왕후 폐출 1년 전쯤에 내전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록 어디에도 숙빈 최씨가 물이나 길어 나르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영조는 재위 내내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신분과 관련된 악성소문에 시달렸다. 그래서 '통감강목'의 '이모비야(爾母婢也)', 곧 '네 어미는 종이다.'란 문장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1689년 5월이다.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가 투기를 일삼았다며 폐출 시키고 중전과 가까웠던 귀인 김씨 역시 폐서인하여 사가로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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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 6월 숙종은 희빈 장씨 소생인 이균을 세자로 책봉하고, 10월에는 장씨를 중전으로 책봉했다.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된 지 3년째인 1692년 4월 22일 밤, 숙종은 궁궐 안을 거닐다 한 나인이 성찬을 차려놓고 있는걸 보고 그 까닭을 물었다.

"저는 중전마마의 시녀였습니다. 내일이 탄신일인데 서궁에 유폐된 처지라 수라는커녕 조석으로 거친 음식이 고작일 것입니다. 그 일을 생각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했지만 바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성이라도 전해 드리고자 함입니다."

이 일이 22살의 숙빈 최씨가 숙종의 빈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1693년 최씨는 회임하여 종4품 숙원(淑媛)이 되었다. 입궁한 지 17년 만에 후궁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이해 10월 6일 최씨는 첫째 아들 영수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2달 만에 죽고 말았다.

1694년 6월 재차 회임한 숙원 최씨는 종2품 숙의(淑儀)의 첩지를 받았다. 그리고 9월 20일 창덕궁 보경당에서 둘째 아들 연잉군 이금을 낳았다.

1695년 6월 8일, 최씨는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

1698년 7월 7일 최씨는 셋째 아들을 낳았지만 사흘 만에 죽었다.

1699년 10월 23일, 최씨는 내명부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빈(嬪)으로 승격되었다. 입궐한 지 23년 만의 경사였다. #그림4중앙#

이때 최씨는 만호 직위에 있던 오라버니 최후를 퇴임시켰다. 권모와 궤계가 난무하던 시절이라, 아들 연잉군을 당쟁의 표적에서 피해가게 하려는 지혜였다.

숙종 38년인 1712년 2월 12일, 18세가 된 연잉군이 궁궐에서 나와 창의궁으로 들어갔다. 숙빈 최씨도 아들과 함께 살며 종종 입궐하여 숙종을 모셨다.

숙빈 최씨는 1716년부터 깊은 병을 앓다가, 1718년 3월 9일 49세를 일기로 숙종보다 2년 먼저 창의궁 서별실 동익각에서 세상을 떴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도 양주군 고령동 옹장리에 묻혔으니 바로 소령원이다.

이 숙빈 최씨의 고향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전라남도 담양군 월산면 용구산 용흥사에 내려오는 이야기다. 숙빈 최씨가 이곳에서 기도하여 영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또 이문정(1656-1726)의 '수문록(1721)'에 '숙종이 꿈에 신룡의 말을 듣고 임신한 궁녀(최숙빈)를 장희빈이 낙태시키려 할 때 발견하고 구출했다'고 한다. 즉 용구산의 신령이 현몽하여 숙빈 최씨를 구했기에 산의 이름을 몽성산(夢聖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또 숙빈 최씨는 담양 창평현의 가난한 농부 최 사령(使令)의 딸 최복순(崔福順)이라 한다. 이곳은 현재의 담양군 대전면 갑향리 소두 마을이다. 최복순의 가족이 전염병(장티푸스)에 걸려 동네에서 쫓겨나 용구산 암자(혹은 수북면 궁산리 중전사)에 기거했다. 가족이 모두 죽고 복순이 혼자 남았는데, 꿈에 용구산 산신령이 '네 효심과 불심이 지극하여 좋은 길을 안내할 터인즉, 내일 장성 갈재에 가면 나주목사를 만나 길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갈재에서 나주목사의 민씨 부인을 만나 인현왕후와 인연을 맺었고 궁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읍군지에도 둔촌 민유중이 영광군수로 부임하려고 태인면 대각교를 지나다 어린 거지 소녀 최 숙빈을 만났고, 인현왕후가 입궁할 때 대궐로 데리고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사연이야 어떻든 조선의 핏줄을 잇게 한 숙빈 최씨는 지혜와 사랑, 헌신적인 삶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으니, 어지러운 세상에서 더욱 빛나는 아름다움이다. 부디 길이 이어가고 본받을 우리들의 표상인 것이다.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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