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4월은 잔인한 달 그리고 목련화

@무등일보 무등일보 입력 2018.04.02. 00:00

한희원 작가

몇 해 전에 사람들이 찾지 않는 한적한 산속 마을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잡다한 세상의 일과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림 그리는 일에 집중하기가 힘들어 그림을 그리는 도구를 챙겨 낮은 산 언덕 아래 자리 잡은 누이의 집에 들어갔다. 집 마당에서 앞 산을 보면 편백나무가 숲을 이뤄 무리져 있었다. 거센 바람이라도 부는 날이면 숲은 마치 혁명을 일으킨 군중처럼, 베토벤 9번 교향곡의 합창소리처럼 우우~ 소리지르며 온 몸을 흔들어댔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나는 어느덧 한 그루의 편백나무가 되어 온 몸을 흔들리며 서 있었다. 새벽녘에는 뒷산의 대숲들이 휫휫하며 소리내었다. 저녁무렵에는 앞마당에 홀로 서 있는 살구나무 사이로 달과 별이 떴다 지다를 반복하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그 동안 숨어있던 온갖 풀과 꽃들이 작은 몸들을 드러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대지라는 어머니 품 속에서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용트림하고 하품하고 웅얼거린다. 머위, 원추리, 수레국화, 상사화, 옥잠화, 창포, 무스카린 그리고 알 수 없는 풀과 꽃들 이들은 바람과 햇살 사이에서 스스로 가장 자유스럽게 피고 진다.

살구나무 가지에 별이 후드둑 떨어진다/ 툭툭, 툭툭 꽃들이 한바탕 놀고 간 자리에/ 별이 지독히도 아프게 떨어진다/ 기다린다는 것이/ 기다림이/ 핏멍으로 돋아난 산 꽃 한 송이/ 너에게 던지고 달아난다/ 살구나무 가지위에/ 별이 톡톡 떨어진다. (한희원의 시 '살구나무' 전문)

햇살이 내려온다/ 세상의 모든 것들 위에/ 아주 작은 들꽃위에/ 언덕위에 오랫동안 세월을 보내는 느티나무 위에도/ 흙 속에 숨어있는 작은 벌레에게도/ 햇살은 너희들 잘 있느냐 하며 찾아온다/ 햇살은 그렇듯 그렇듯/ 무심히 찾아온다/ 사랑이 그렇게 찾아오듯이/ 사랑이 그렇게 떠나가듯이. ) (한희원의 시 '햇살' 전문)

4월이 오면 마을 건너편 사람이 찾지 않는 산에 가면 작은 개울물이 흐르고 개울을 건너 숲길을 한참 오르면 미지의 화원이 나를 맞이한다. 숲이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은 간간이 잎을 뚫고 내려와 대지를 적신다. 숲이 깊게 우거져 햇살만 간간이 잎을 뚫고 내려오고 새소리, 바람소리도 숨을 죽이는 정적의 숲길이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침묵이 길어지고 이윽고 찾아오는 정적의 시간,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놀라 고개를 들면 순백의 산목련이 우수수 떨어진다. 숲길은 온통 순백이고 순백이 햇살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쌓인다. 밖의 세상은 온갖 일로 몸살을 앓아도 이 곳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조용하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는 비밀의 화원이다.

T.S 엘리엇은 그의 시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읊조렸다.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며/ 추억에 옥망을 뒤섞이며/ 봄비로 잠든 대지를 일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었다/ 망각의 눈이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다/ 슈타른 베르가제 호수를 넘어/ 여름은 소낙비를 몰고 갑자기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화랑에 머물렀다가/ 햇볕이 나가 호르가르덴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이야기 했다... 하략(T.S 엘리엇의 시 황무지 433행 중 제 1부 '사자의 매장'에서 첫 도입부)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1888~1965)은 제 1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황폐함을 '황무지'라는 장편의 시로 표현하였다. 그는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그 시대의 새로운 시 세계를 보여주었다.

전편 433행 5부로 구성된 이 시의 첫 도입부의 '4월은 잔인한 달'은 봄을 맞이하는 눈부신 4월을 저주받은 축복으로 묘사하여 극적인 시의 역설을 보여준다. 모든 생명들이 움틀거리고 세상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4월의 아름다움을 잔인함의 생태로 노래한 '황무지'는 현대문명에 대한 참회와 경고의 구절이기도 하고 진정한 봄을 꿈꾸는 역설이기도하다.

봄이 오면 환희와 우울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그렇게 눈부신 순백의 목련꽃이 바닥에 떨어져 누렇게 변해가는 처연함이 봄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변혁의 시간을 걷고 있다. 봄은 그 와중에서도 모른 척 꽃을 피운다. 그 꽃에는 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미지 속에 잠긴 비밀의 화원을 벗어나 세속으로 돌아오면 감당할 수 없는 뉴스에 휘청거린다. 새로운 세상으로 향해서 가는 감내 해야 하는 변혁의 시대이다. 이 변혁의 시대가 지나 성숙한 사회가 정착되면 우리들의 마음에도 안녕이 찾아오리라. 그때쯤이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역설이 아닌 목련꽃 눈부신 환희에 찬 4월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금방 이팝나무가 피고 찔레꽃이 필 것이다. 가슴에 찬 강 하나 흐른다. 목련꽃이 햇살아래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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