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30>이소사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입력 2018.03.06. 00:00
'거괴·천녀’로 불린 동학농민혁명군의 열사
장흥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의 이소사 전투도

이소사(李召史1872~1895)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여성 열사이며 숭앙받았던 지도자다. 열사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이소사란 여인이 앞장서서 싸워 동학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큰 전과를 거두었으나 여타 동학관계기록이 없어 안타깝다.'는 1975년 '장흥군향토지'의 기록이다.

이소사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동학토벌군의 양호도순무영우선봉(兩湖都巡撫營右先鋒)이었던 이두황의 '우선봉일기'다.

이두황이 1895년 1월 1일 당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러 온 일본 후비군(後備軍) 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에게 보낸 보고서 내용이다.

'거괴(巨魁) 체포자(李召史)의 나주 호송이 가능하냐고 했는데, 이 역시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백성이 처형을 원하고 있다. 이미 교령이 오고 있을 때는 민인(民人)이 체포하여 바친 여동학 1명을 소모관 백낙중(白樂中)이 받았다. 소모관에게 넘어가 매를 맞는 문초를 당해 살과 가죽이 진창이 되었으며, 교령을 받았을 때는 기운과 호흡이 헐떡거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는 모양이다. 조금 늦추는 것을 용인하여 이에 안정되면 여동학(女東學)을 본부로 압송하겠다.'

미나미 고시로가 이두황에게 여동학 압송을 지시한 서신은 1894년 12월 27일 오전이다. 따라서 이소사는 1894년 음력 12월 14일부터 이틀 동안 치러진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뒤, 12월 26일 이전에 체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체포되면 대부분 당일 또는 2~3일 내로 처형되었다. 그런데 1월 1일까지 5일 이상 처형을 하지 않았고,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물만 압송하는 나주압송 대상으로 분류한 것으로 보아 이소사는 대단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림1중앙#

우선봉일기에 있는 또 다른 기록이다.

'1월 3일, 양영(兩營)에 보낸 첩보에 장흥 민인들이 체포한 여동학(이소사)이 껄껄 웃으며 신이부인(神異夫人)이라 칭하며, 요상한 말을 외우며 쏟아내고 있다. 혹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이거나 대요물인 이소사를 바로 금일 초하루에 나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대대로 보냈다.'

'1월 4일, 여동학 이소사의 남편을 급히 기동시켜 나주로 보내 그 처자의 간병을 하게 하라는 교령을 받들기 위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40리나 되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라고 했으나 조금 늦어져 기다리고 있다. 그가 오는 즉시 기동시켜 보내겠으니 헤아려 달라.'

'1월 7일, 여동학 이소사의 남편 김양문(金良文)을 그 동안 4번이나 찾았고, 지금 결단하여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에 기동하여 보내겠다는 연유를 보고 드린다. 연일 크게 평안하시기를 기원한다.'

일본 후비군 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의 '동학당정토약기'에도 이소사의 기록이 있다.

'또 장흥 전투의 틈을 타서 부사를 죽인 것은 여자(이소사)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 동학은 사실 미친 사람이었는데, 동학도들이 옹립해서 천사로 만들어 이용한 것이다.'

'또 그 미친 여자는 좌측지대에 소속되어 순회하던 소모관 백낙중이란 자가 붙잡아 민병으로 하여금 엄하게 규문하게 하였다. 그 전부터 조선에서의 처벌이 매우 엄중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여자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정말로 놀랬다. 양쪽 허벅지의 살을 모두 잘라내어, 그 한 쪽은 살을 아주 잘라내서 뼈만 남고 또 다른 한 쪽은 피부와 살이 금방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가 압송되어 나주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죽은 송장 같았다.'

#그림2중앙#

'미친 여자(이소사)는 최동자와 같은 날 도착했다.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대소변은 앉은 채 나오는 대로 내버려두었으며 입은 것이라고는 흰옷 한 벌 뿐으로, 그 참담한 꼴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무참한 감을 느끼게 하였다. 문명한 모든 나라에서는 부녀자에 대해서는 비록 죄수라 해도 대우 면에 있어서 얼마간은 관대하므로, 나주에 도착한 뒤 그 여자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였다. 여러 가지 심문한 끝에 그 여자가 정신착란자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일본의 '국민신문 1895년 3월 5일자'의 기록이다.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용모는 빼어나기가 경성지색(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이조이(李召史이두로 읽어 이조이)라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천신이 나타나 오래된 제기(祭器)를 주었다고 하여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신녀(神女)가 되었다. 그러나 장흥전투의 패배로 관군에 체포되어 지금은 장흥의 철장 안에 있다고 한다. 어쩌면 작년의 최신동(崔神童대덕면 연지리 출생. 본명은 최동린, 또는 최동. 13세에 석대들 전투 지휘. 1894년 12월 28일 처형)의 일과 같은 것일까?'

일본 '조일신문 4월 7일자'의 기록이다.

'장흥부근의 동학도 무리에는 한 명의 여자가 있어 추천되어 수령이 되었다. 우리 병사가 잡아서 심문했는데, 완전히 미치광이가 되었다. 동학도가 귀신을 얘기하고 신을 말하는 것을 이용하여 천사(天使) 혹은 천녀(天女)라 칭하여 그로써 어리석은 백성을 선동하였다.'

#그림3중앙#

그런데 이두황의 '우선봉일기'나 미나미 고시로의 '동학당정토약기'는 물론 이인환, 최신동, 문공진, 이득춘을 처형한 후 나주목사 민종렬이 작성하여 상부로 올린 '첩보존안'에서도 이소사의 생사는 알 수 없다. 나주관아의 모진 고문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순절했음에 틀림없다.

이소사는 1873년에 장흥 관산면 송촌리 송현마을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또 용산면 계산리 차동마을이라고도 한다. 앞으로 그녀에 대한 행적이 더 밝혀지고 그녀의 업적을 더욱 기렸으면 한다.

22세의 젊은 여성이 말을 타고 동학혁명군의 앞장에 서서 전투를 지휘한 사실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의 피를 뜨겁게 끓게 한다.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절하게 생을 마감했지만, 이소사는 항일운동의 선구자요 불가사의한 영웅으로써 역사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비록 그녀의 이름과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기록만 남아있지만, 우리는 행동과 일치한 그녀의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이어받고 전하며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화작가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1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