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김목의 호남 여성보(女性譜) <25>단종애사 정순왕후 송씨

입력 2017.12.27. 00:00 최민석 기자
세조가 준 집·식량 등 거부하고 염색하며 살아
영도교와 풍물거리시장 사이에
여인시장이 있었다
부녀자들이 식재료를 사고 팔았는데
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었다
이 시장의 여인네들이
관비로 전락해 어렵게 살고 있던
정순왕후

정순왕후 송씨(1440~1521)는 조선 제6대 왕인 단종(1441~1457)의 정비다. 단종은 재위 3년(1452~1455)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1457년 열여섯의 나이로 강원도 영월에서 생애를 마감한 불운한 왕이었고, 정순왕후 역시 시련의 한 평생을 살았다.

정순왕후 송씨는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현 칠보면)에서 아버지 송현수와 어머니 여흥 민씨의 딸로 태어나 어릴 적에 한성부로 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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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송현수는 수양대군(세조)의 친구였고 고모는 세종대왕의 여덟 번째 왕자인 영응대군의 부인이었다. 그 덕에 아버지는 1445년 능지기인 전구부승(典廐副丞)이 되었고, 딸이 왕비가 되자 여량부원군이 되었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다.'

정순왕후 송씨는 1454년 2월 19일(음력 1월 22일) 열넷의 나이에, 고모인 대방부부인의 적극적인 천거로 단종의 왕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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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모든 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1455년 단종은 강제로 왕위를 세조에게 일임하고 상왕이 되었다. 정순왕후도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었다. 이 해 6월 8일이다. 성삼문은 자신의 아버지인 성승을 비롯하여 이개, 하위지, 유응부, 박중림, 김문기, 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형을 당했다. 특히 성삼문은 아버지를 비롯하여 집안의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고 아내와 딸들은 관비가 되었으며, 가산은 몰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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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에 이르니 상왕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의덕왕대비 송씨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으며 곧 관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서울 청계천의 영도교(永渡橋)는 영월로 유배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헤어진 곳이다. 따라서 이 다리를 '영이별다리', '영영건넌다리'인 영리교라고도 했다.

"왕후! 그만 눈물을 거두고 나를 보내주오."

길 떠나기를 재촉하는 관리들의 성화에 단종은 잡고 있던 정순왕후의 손을 놓았다. 영도교 다리 위에 정순왕후를 남겨놓고 화양정에 이르러 이별주를 마시고 광나루에서 배를 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영도교에서 단종과 피눈물의 이별을 한 정순왕후는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 비구니 사찰인 청룡사의 정업원으로 들어갔다.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고 희안, 지심, 계지 등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친정마저 풍비박산이 난 탓에 하루하루 끼니를 잇기 어려워 시녀들이 동냥을 해오기도 하였다. 상황이 그러하니 한 더위에 몰아친 설한풍에 채 피지 못하고 시든 꽃송이보다 더 애처로운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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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청계천의 영도교와 풍물거리시장 사이의 '동관왕묘' 부근에 여인시장이 있었다. 부녀자들이 주로 채소 등의 식재료를 사고 팔았는데, 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었다. 이 시장의 여인네들이, 관비로 전락해 어렵게 살고 있던 정순왕후를 조정에서 모르게 은밀히 도와주었다. 자줏물을 들인 옷감을 사주고 생활에 필요한 일용품이며 쌀, 채소, 과일들을 공급하였다.

세조가 '신분은 노비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리고, 집과 식량 등을 보냈으나 정순왕후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호구지책과 수행의 일념으로 염색업을 시작했다. 댕기, 저고리, 옷고름, 끝동 등의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내다 팔았다. 자줏물을 들인 천을 바위 위에 널어 말리니 그 바위는 '자주바위', 바위 밑 우물은 '자주우물', 마을 이름은 '자주동'이 되었다.

당시 한양의 아낙네들은 정순왕후의 자주옷감을 팔아주기 위하여 일부러 자주끝동을 입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맥이 끊겨 물이 없지만, 이 자주동샘에는 '단종비 송씨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는 전설이 있으니, 피눈물의 샘인 것이다.

현재 자주동천 자리는 이수광이 기거하며 지붕유설을 쓴 '비우당'이 옮겨 세워졌다. 이 초가집 터에 자주동천이 있었고, 뒤편 바위가 자주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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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영월에서 1457년 12월에 사사된다. 그의 나이 16세 때다.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가까운 언덕의 바위에 올랐다. 단종이 떠난 영월 쪽을 향해 큰 소리로 통곡하며 안녕과 명복을 빌었으니, 바로 동망봉이다.

훗날 영조가 쓴 친필로 이 바위에 동망봉이라 새겼는데, 일제 강점기에 이곳이 채석장이 되었고, 동망봉 바위도 깨져버렸다. 지금은 바위가 있던 근처에 동망정과 동망각이 있다.

정순왕후가 머물었던 정업원에는 영조가 친필로 내린 '정업원구기' 비와 비각이 있다. 비각의 현판은 전봉후암어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이니 '천만년 동안 이곳이 영원할 것'이며, 비석의 글은 세신묘구월육일음체서(歲辛卯九月六日飮涕書)이니 단종과 정순왕후의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고 이 글을 쓴다'는 뜻이다.

정순왕후는 1521년 7월 7일(음력 6월 4일) 단종의 종손인 중종 16년에 81세의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중종의 재위 초기, 조광조 등이 정순왕후의 복위를 주장했으나, 중종은 이를 거부했다. 현종 때에는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세조의 단종 살해는 측근들의 오도에 휘둘린 것이며 본심은 단종 살해에 있지 않았다'며 단종과 정순왕후의 복위를 건의했다.

마침내 1698년 숙종 24년에 단종과 정순왕후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단종의 능은 영월의 장릉이고, 남양주시에 있는 정순왕후의 능은 사모한다는 뜻의 사릉이다. 이 사릉의 소나무들이 단종의 능이 있는 동쪽을 향해 고개 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있었고, 정순왕후는 무속의 여신으로도 모셔졌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함이 없으니 무상이다. 따라서 그 존재를 모르니 무아다. 세조도 단종도 정순왕후도 이제 이야기로만 남아있으니 세상의 모든 것은 부질없음이요 덧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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