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스님과 함께 생활하는
이른바 '사도승'이 되었다
당시는 국가 허가를 받는 '관도승'이었다
스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천여 명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구제 활동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 상상이 된다
지난 호에 행기 스님을 소개한 글이 소개되자 역사 교사인 대학 동기가 스님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흥미 있어 했다.
서울에 거주하는 고교 동창도 스님 글을 읽으며 최근 다녀온 일본 동대사의 내력이 새삼 가슴깊이 다가왔다고 했다.
이들에게 필자는 왕인 박사의 후손이자 도래인 후예로서 가장 대표적 인물인 행기 스님 얘기를 교과서에 기술토록 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였다. 이렇듯 무등일보가 이 지역 출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왕인 박사는 논어를 공부한 유학자인데 그 후손인 행기가 스님이 되었다고 하여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통일신라 전제 왕권을 구축한 신문왕에게 풍왕계(諷王戒)를 쓴 설총은 유학에 능통했다. 그 또한 원효 스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 없다. 실제 6세기 중엽 불교가 일본에 공식 도입될 때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던 호족 세력 소가씨(蘇我氏)의 숭불 정책에 왕인 씨족들이 밀접이 관련되어 있다. 특히 도래인 후예들이 아스카지(飛鳥寺)를 시작으로 많은 사찰을 세웠는데 현재의 가와찌(河內) 지역의 후루이찌(古市)고분군 주변에 왕인 박사 후손들이 세운 서림사를 비롯하여 6세기에 새롭게 백제로부터 이주한 왕진이 후계 씨족들이 세운 갈정사 등 씨사(氏寺)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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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기스님이 살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아스카지 선원(禪院)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현장스님으로부터 법상종을 공부하고 귀국한 도소(道昭) 스님이 주석하고 있었던 것도 출가에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스님 역시 왕진이 후예였다. 천지천황이 죽은 후 일어난 임신란 때 도래인들의 도움을 받았던 천무천황은 비조사등 도래인들이 세운 사찰에 봉토를 희사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려서 아스카지 선원을 자주 다녀 도소 스님을 잘 알고 있었던 행기 스님은 15세 되던 해 도소를 스승으로 삼아 출가 하였다. 스님의 출가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도래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본다.
한편 도소의 사상 체계는 무량의 중생을 교화하며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적멸을 강조한 '유가론'과 보살적 행동을 강조한 '유식론'이었다. 그는 나루터 여러 곳에 배가 정박할 선착장을 만드는 등 보살적 행동을 강조한 유식론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이러한 도소의 중생 구제 활동이 행기 스님의 실천적 복전 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법하다. 하지만 행기 스님의 복전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단순히 스승의 가르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 했지만 수에끼 토기를 굽던 많은 도래인들이 거처도 없이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삶의 쉼터를 마련해주기 위해 '대수혜원'을 만들었던 것이 복전 활동을 시작하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행기 스님의 이러한 복전 활동이 많은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는 것은, 스님이 신라에서 온 혜기 스님과 함께 탁발하러 다닐 때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스님의 중생 구제 활동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708년부터 710년까지 계속된 평성경 천도 대공역 사업이었다. 그보다 앞서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근강으로 천도한 지 10년도 채 안된 676년 등원경 천도 공사를 18년 공역 끝에 마치고 천도하는 등 연이은 대규모 토목 사업으로 백성들은 지쳐 있었다. 게다가 당시 최고 권력자인 후지하라 후히토(藤原不比等)이 '대보율령'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국역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으로 백성들은 쓰러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대규모 토목 사업은 백성들의 삶을 황폐화시켰다. 당시 실상은 "도읍을 만들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동원되었다가 도망간 백성들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하는 기록과 "천도 공사에 동원된 역민(役民)들이 귀향하다 식량이 떨어져 길에서 구덩이를 파고 의지하는 자가 적지 않으므로 진휼에 노력하고 사망한 자 이름을 기록하라"는 조칙에서 알 수 있다. 이 공역에는 이 지역의 도래인과 백제 멸망 후 망명한 사람들이 포함된 많은 평성경과 가까운 지역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참담한 현실을 목격한 행기 스님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찾았을 법하다. 아마도 스님은 '대수혜원'과 같은 원과 보시옥 등의 구제시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본격적으로 구제하기 시작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를테면 이러한 시대 상황과 결합되면서 형성된 행기 스님의 복전(福田) 사상은 스승 도소보다 훨씬 더 실천성을 강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런데 행기 연보를 보면 상당수 '원'들이 723년 이후에 보이고 있어 그때부터 구체적인 구제 활동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하지만 행기 연보를 분석해보면, 스님이 원(院) 49개소, 저수지(池) 15개소, 구(溝) 7개소, 보시옥(布施屋) 9개소를 세웠다고 하며 구체적인 연도와 시설 이름까지 적혀 있다. 그런데 다른 시설들은 총 시설 숫자가 일치하지만 '원'의 경우는 원 28, 니원(尼院) 8개소 등 36개소 밖에 없고 시설 연도도 찬자 스스로 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름이 드러나 있지 않은 상당수 '원'들이 아마도 평성경 천도 공역 때 시설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특히 구제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보시옥들이 평성경 일대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행기 스님이 평성경 공역으로 쓰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고 보아야 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행기 스님의 이러한 구제 활동에 깊이 감동을 받아 귀향을 포기하고 스님과 함께 생활하는 이른바 '사도승(私度僧)'이 되었다. 당시 승려들은 국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관도승(官度僧)'이었다. 행기 스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천여 명이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의 중생 구제 활동이 하층 대중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상상이 된다.
이제 스님은 일본 불교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일본 불교사의 권위자인 타무라 엔쵸(田村圓澄)는 평성경 천도와 그에 따른 공역이 행기 스님의 민중 불교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대수혜원' 건립부터 이미 시작된 스님의 중생 구제 활동이 평성경 공역 때 본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스님이 세웠던 많은 '원'이나 '보시옥' 등의 운영은 주로 백제계 어쩌면 영산지중해 출신 도래인들의 재정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행기가 세운 '49원' 가운데 상당수가 그 지역 도래계 호족들의 개인 사원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훗날 스님께서 심혈을 기울여 쌓았던 대야사 토탑도 그 지역의 도래계 씨족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세워질 수 있었다. 말하자면 스님은 도래인들의 구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여하튼 스님의 중생 구제 활동은 평성경 공역에 지쳐 쓰러져 간 많은 사람들을 구해 '궁민(窮民)' 문제로 난처한 입장에 있던 당시 율령 정부의 고민을 많이 해결해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율령 정부는 행기 스님에게 감사의 뜻을 당연히 표시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자인 후지하라 후히토는 717년 승니령(僧尼令)을 내려 행기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즉, "절에서 주석하며 불경 공부해야 할 승려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에게 요설을 하는 등" 문제를 일으키니 이를 일체 금지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보잘 것 없는 승려가 요망한 설교를 하여 패거리를 만들고 마치 '성도(聖道)'라고 거짓말을 하며 백성들을 유혹하고 있다"라고 하며 혹평을 하였다. 이에 대해 僧俗의 접촉을 막았던 율령 정부가 행기 스님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썼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승니령이 내려진 후 추가적인 금압 조처도 없었고, 행기 스님의 반발도 없었다. 따라서 그냥 단순히 포고령만 내리면 될 것을 굳이 '보잘 것 없는 승려' 라는 혹평을 쓰면서까지 공격을 하였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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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까닭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689년 지통천황의 즉위에 공을 세우고 자신의 딸을 문무천황의 왕비로 세우며 권력을 장악한 후지하라 후히토는 701년 대보율령, 718년 양노율령 등을 시행하며 강력한 율령국가의 기틀을 닦았다. 이런 그에게 행기 집단이 비록 궁민 문제를 해결했다고 해도 많은 도래인들과 백제계 망명인들이 살고 있는 하내국, 대화국, 화천국 등지에서 '도래인'이라는 공감대를 형성하며 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대승정기'에 실린 행기 스님의 제자들의 12씨족 가운데 8씨족이 화천국, 4씨족이 하내국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이 스님과 혈연적, 지연적으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하겠다. 특히 강력한 율령체제를 강화하며 중앙집권 체제를 추진한 후지하라에 맞서는 지방 호족 세력의 구심점 역할도 하고 있었던 행기 스님을 통제하려 했을 것은 당연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율령정부의 스님에 대한 탄압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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