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병채 박사의 신 육상 실크로드

문병채 박사의 신 육상실크로드<12>이광수와 톨스토이의 작품무대였던 '이르쿠츠크'

입력 2017.10.27. 00:00
웅장하고 아름다운 시베리아의 처음과 끝
'시베리아'는 타타르어로
'잠들어 있는 땅' 이라는 뜻이다
동서로 7천㎞, 남북 3천500㎞로
표현할 수 없이 광대한 땅이다
16세기부터 개발을 시작했지만
이르쿠츠크 중심가.

◆멀고 낯선 이국땅

우리에게 무척 낯설고, 멀게만 느껴졌던 시베리아! 시베리아는 우리에게 동토의 땅, 죄수 유배지, 유약한 지성인 닥터 지바고의 한이 서려있는 곳, 설원 속에 끝없이 펼쳐지는 백화나무 숲(자작나무), 불모지 등으로 각인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지난 세기 굶주림과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기 위하여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 온 곳,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겨울(11월~4월)은 평균 -15℃나 되나 바람이 없어 그렇게 까진 춥지 않고, 여름(6월~8월)은 평균 20℃로 강렬한 태양이 18시간 동안이나 작열해 우리의 한여름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기후.

시베리아는 1652년 '코사크'의 부대가 모피 등을 구하기 위해 이 지방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베리아"라고 말하는 단어는 타타르어로써 "잠들어 있는 땅"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시베리아는 동서로 7천㎞, 남북에는 3천500㎞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도록 광대한 땅이다. 러시아인은 이 무한히 펼쳐져있는 대지에 16세기부터 개발을 시작하였지만, 시베리아는 지금도 옛날과 변함없는 신비적이고 세계에서 여행객들이 가장 신비한 곳으로 뽑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베리아를 방문하면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으며, 현대인들의 문화와 전통과 습관에 전혀 물들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이 시베리아의 수도이자 중심지가 바로 이르쿠츠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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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의 체취

데카브리스트! 1825년 12월 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며 혁명을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들의 유배지.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 때 서유럽에 원정하여, 자유사상을 섭취한 청년장교들 이었다. 1812년 러시아를 쳐들어왔던 나폴레옹 군대가 퇴각하자, 이를 뒤쫓아 젊은 러시아 장교들은 프랑스로 진격해 갔다. 이들은 프랑스 파리의 아름답고 화려하며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도시 모습과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러시아로 돌아 온 이들은 '농노제 폐지'와 '입헌정치 실시'를 목표로 내세워, 1825년 12월 무장봉기를 하였으나, 반란은 정부군에게 곧 진압당해 날이 채 저물기 전에 막을 내렸다.

주동자 5명은 처형됐으며, 121명은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러시아 최고의 엘리트, 귀족 청년들 이었다. 12월(러시아어로 데카브리)에 거사했다는 데에서, 이들은 데카브리스트(12월당원)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들의 전제정치에 대항한 혁명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뒷날 러시아 혁명의 모태가 됐다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러시아 최고 가문의 귀족들이었던 이들은 유배지 '시베리아 생활'은 비참했다. 손발에 22㎏이나 되는 쇠고랑을 차고 혹한에 옷도 변변히 입지 못하고 굶주리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어야 했다.

◆소설 같은 순애보

이들은 대부분이 젊은 장교들 이었기에, 그의 여인들도 약혼자나 신혼이 많았다. 데카브리스트 죄수들을 시베리아로 유배 보낸 후, 러시아 황제는 그들 부인들에게 이혼과 재가를 전제로 귀족 작위를 유지하든지, 맨손으로 시베리아로 가든지를 택하라는 협박에, 그 중 11명의 부인은 평민으로 강등됨을 감수하고 사랑과 고난의 길을 택해 시베리아로 찾아가,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평생 고난의 길을 함께 함으로써 고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들 부인들의 삶은 '전쟁과 평화' 등 여러 문학작품 속에서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당시엔 대중교통수단이 없어서 여인들은 '마차와 도보'를 이용하여 1년이 넘은 여정 끝에 자신의 남편들이 있는 이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부인들에게 이곳 총독은 강제노역 중인 남편을 만나게 해주기 전에, 귀족 신분을 버리겠다는 것, 재산을 포기하겠다는 것, 낳게 될 자녀들이 농민 신분으로 살 것 등에 동의한다는 것 이었다.

러시아의 최고 가문에서 자란 여인들은 모든 가정 일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고, 수공예품을 만들어 파는 등 스스로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어떤 여인은 혹한의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남편은 그후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다가 아내의 기일에 그녀의 뒤를 따라간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이는 9년, 어떤 이는 7년 등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일반적인 평민생활을 할 수 있도록 허락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그나마 행운이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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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작품 무대

톨스토이가 쓴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발꼰스키(1788-1865)'는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 이다. 발꼰스키는 러시아공국 창시자 루릭의 후손으로 여러 전쟁에서 용맹을 떨친 '장군'이였다. 그리고 그의 부인 마리아는 모스크바대학 창설자이자 러시아 최고의 천재 중 천재였던 로마노소프의 '증손녀'였다. 그는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먼 친척인데, 톨스토이는 이 인연으로 이들 이야기를 소재로 후에 '전쟁과 평화' 소설을 쓰게 되었다.

그녀(마리아)는 19살 때 20살이나 차이 나는 발꼰스키와 결혼을 했는데, 첫아들을 낳은 다음 날 남편은 나라의 '반역자'로 형을 받게 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당시 마리아는 15세 때 우리가 잘 아는 러시아 국민시인 푸쉬킨과 함께 크림반도로 휴양을 간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으나 결혼까지 가지는 못했던 여인이기도 하다.

마리아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을 따라 시베리아로 갔다. 현재 이르쿠츠크에는 '발꼰스키의 집'이 남아 있는데,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으로 개관되어 있어 언제는 관람이 가능하다. 그 당시 생활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남아 있다.

1846년부터 이곳에 살면서, 이 곳은 명사들의 사교장이 되었으며, 여기서 무도회와 연주회, 낭송회 등의 문화생활을 누렸다고 한다. 여기에는 유배된 자들이 모여서 토론하던 거실, 당시의 가구, 유배자들의 초상화, 1790년대 피아노 등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한쪽에는 발콘스키 가족들과 다른 데카브리스트들이 생전에 쓰던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광수 '유정'의 순애보

트레킹 도중에 만난 길가에 핀 제비꽃 하나, 소나무 한그루와 창밖의 작은 새 한 쌍 조차도, 머릿속을 아련히 맴도는 고향 같은 감(感)을 묻혀와 나를 힘들게 한다.

바이칼 호수는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이광수 소설 '유정' 이후, 항상 내 맘 속에는 '미지의 세계'로 그려져 있었다.

이번 답사 기회에, 호수 어디엔가 다가 최석과 정임의 비석을 세워 놓을까? 그래서 춘원이 못다 한 이야기 끝을 맺을까? 춘원은 바이칼이 '애뜻한 사랑'이 느껴지는 곳임을 어떻게 알고 소설의 마지막 무대를 이곳으로 옮겼을까.

이곳은 춘원 이광수의 '유정'의 무대기도 했다. 춘원이 '무정'을 쓴 후, 큰 반향에 영향 받아 후속편으로 쓴 것이었으나, 바이칼 호의 고향 같은 감(感)이 그에게 묻혀 와서였을 것이다. 그 후 독자들에겐 바이칼이 항상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게 되었다.

내면세계를 실감나게 그린 사랑을 소재로 한 문학이어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바이칼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어쩌면 그렇게 어울리는지…, 춘원이 과연 당대의 천재임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통속적인 애정소설이 아닌 정신적인 이상주의를 지향하는 소설과 바이칼이 갖는 미지의 세계가 딱 들어맞는 느낌이랄까…. 소설에서 애정이 애욕을 초월한 것 같이, 호수의 맑디맑은 푸른 물은 때 묻지 않는 순정을 느끼게 한다. 순백의 겨울 시베리아의 풍광은, 애욕을 벗어나 순정으로 마감하기 위해, 최석은 이 호수에서 더 먼 곳으로 가서 죽음을 맞으려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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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파리

발꼰스키의 집은 이르크츠크 인텔리들이 모여서 시낭송을 하거나 정치토론을 하거나 음악회를 개최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의 학문, 문화, 예술활동은 이르쿠츠크의 지역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르크츠크가 '시베리아의 파리'라는 명성을 얻는 이유는 시가지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바로 이 데카브리스트들의 수준 높은 문화, 예술 활동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의 특권과 보장된 출세의 길을 버리고, 조국 근대화와 인민의 자유주의를 위해 기꺼이 몸을 던졌다. 비록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들의 혁명정신은 결국 100여년 후 공산혁명을 낳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

그들은 시베리아의 중심마을이었던 이르쿠츠크에 유럽의 앞선 문화와 예술, 즉 프랑스 파리의 자유롭고 수준 높은 문화를 전화고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가꾸어 나가게 하는 기초를 놓았다. 발꼰스키의 집에서는 지금도 그때의 전통을 이어 연극회와 문학의 밤을 지금껏 가져오고 있다.

◆역사와 문화의 보물창고

시베리아 문화의 보물창고, 이르쿠츠크(irkutsk)! 옛날과 변하지 않은 환경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며, '역사적인 얼굴'로 대표되고 있다. 못을 밖지 않은 고대의 목조건물과 석조건물의 가옥이 아름답고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17-19세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석조나 목조의 집들 만나볼 수 있다. 도시에는 역사적인 기념물과 문학작품이 700개 정도가 남아있다.

도시의 중심을 걸어 들어가면 그것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스파스카야교회, 보고야부렌스키교회, 포루스키강당, 오우로프코쿠극장 등이 그것이다. 또한, 성니꼴라이 정교회, 키로바 광장의 오래된 석조건물, 바가야블레니어 러시아 정교회, 2차대전 승전기념 승리광장, 데카브리스트 혁명 단원들의 흔적(발콘스키 집 등)도 볼만 하다. 이 밖에, 미술관과 박물관도 어디에서도 볼 수없는 이 곳만의 독특한 것들이 진열되어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해 준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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