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진의 문학은 사랑이다

전동진의 광주전남 문학지도 그리기문학은 사랑이다23 : 역사·문화·문학 기술지의 길(上)- 투쟁하는 순수, 무심필의 길을 걸은 소설가 송기숙

입력 2017.01.23. 00:00
비평가서 격동시대 큰 효과 낼 수 있는 소설 선택

‘직구(直球)’로 승부하는 투수다
민족의 현재로 이어지는 징검돌 같은
역사적 순간·사건을
소설 쓰기의 형태에 담아냈다
역사적 사실성과 소설의 허구성
비평적 지성을 한 데 뭉치고
한 편 한 편에 정성껏 담아
고치고 또 고치고 다시 고쳐서
독자에게 직구(直球)로

쓰기로의 길

전남대 교내에는 주민들이 거주하는 반용마을이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부부처럼 서 있다. 이 나무는 반용마을의 당산나무였다. 그 자리에는 60년대 초까지 마을이 있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송기숙 선생으로부터였다.

장흥에서 우여곡절 끝에 전남대에 입학해 하숙을 한 곳이 당산나무 근처에 있었던 반용마을이었다. 서문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세수하고 양치했고, 학교 안 마을 주막에서 막걸리로 점심을 대신하기도 했다.

송기숙은 1935년 완도군 금일면 육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장흥군 용산면 포곡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대학생부터는 대부분을 광주에서 살았다. 정년퇴임을 3년쯤 앞두고 터를 잡아 말년을 보내고 있는 곳은 화순읍 대리이다.

정년 퇴임 무렵 연구실의 책을 새로 지은 집으로 옮길 때 추억처럼 함께 했던 기억이 나에게는 있다. 그때 눈독을 들여 선물로 받았던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1948년 발간) 과 '민중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송기숙은 마음의 동무로, 때론 경쟁자로 동향 출신의 소설가 이청준 선생을 두고 있었다. 이청준은 장흥 출신으로 서중, 일고, 서울대 독문과를 나왔다. 서울대 원서를 주문해 우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서무과장이 학교로 배달된 원서를 전해주지 않고 자신의 책상 서랍에 보관한 채 시간을 보내버린 것이다. 대학 지원이 무산될 상황에 우연처럼 얻게 된 것이 전남대 원서였다. 의과대생에 이어 전체 2등으로 전남대에 입학할 정도로 학업 성취가 뛰어났다.

비평에서 소설로

송기숙은 처음에 비평가로 문단에 나왔다. 1964년과 65년에 평론 '창작과정을 통해 본 손창섭', '이상서설(序說)'을 '현대문학'에 발표했다. 이상의 작품을 임종국이 묶어 전집으로 간행한 것이 1956년 무렵이다. 난해하기로 단연 최고인 이상의 작품을 기세 좋게 분석한 비평은 문학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가 발표한 '이상서설'은 본론이 아니라 ‘序說’이다. 본격적인 연구 전에 맛보기로 보여준 것에 해당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상 문학을 본격적으로 분석·해석한 비평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에 발표된 송기숙의 글은 비평이 아니라 ‘소설’이었다.

송기숙은 1966년에 '대리복무', 장편 '자랏골의 비가'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전향했다. 소설가 데뷔 과정은 따로 없었다. 나는 그의 소설이 어쩌면 비평의 연장선에서 쓰인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그림1오른쪽#

비평에서 소설로 방향을 바꾼 것에 대해 송기숙은 ‘외국어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소회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송기숙의 독어 실력은 대학의 독문과 교수들도 인정했던 수준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비평을 전개하려면 이론을 체화해야 하는데 그 이론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다.

그것을 모국어 수준으로 번역하지 않으면 서울 사람들과 경쟁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차분하게 영어를 준비하고 비평의 일가를 이루어 나갈 만큼 역사의 강은 잔잔하게 흐르지 않았다. 격동치는 시대 속에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소설 쓰기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팔색조(八色鳥)와 원 피치

팔색조는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 다양한 변화구를 구사하는 투수를 일컫는다. 마무리 투수들은 강한 직구에 변화구 하나를 장착해서 던진다. 이런 투수는 ‘투 피치’ 투수라고 한다. 아무리 강력한 직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원 피치 투수는 없다.

시인과 소설가는 정반대 유형의 언어를 구사한다. 시인은 정주인에, 소설가는 유목인에 비유한다. 시의 언어는 구심력을 발휘하고, 산문의 언어는 원심력을 발휘한다. 깊어지는 언어와 넓어지는 언어의 균형과 조화가 언어 전체를 두텁고 건강하게 한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복잡다단한 세계를 담아내기 위해 ‘팔색조’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송기숙은 오직 ‘직구(直球)’만으로 승부하는 원 피치 투수에 비유할 수 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현재로 이어지는 징검돌과 같은 역사적 순간·사건을 소설 쓰기의 형태에 담아냈다. 역사적 사실성과 소설의 허구성, 비평적 지성을 한 데 뭉치고, 한 편 한 편에 정성껏 담아, 고치고 또 고치고 다시 고쳐서 독자에게 직구(直球)로만 던졌다.

송기숙 소설은 그래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역사적 서술과 다를 바 없는 사실성, 해석의 여지가 없이 곧이곧대로 파고드는 작가의 의도, 문학적 효과보다는 기술적 가치, 역사적 가치에 방점을 두고 있다. 독자는 긴장할 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소설 읽기가 아니라 공부하는 소설 읽기가 되는 것이다.

독자의 요구대로 글을 쓸 수도 없고, 독자의 요구를 외면하면서 글을 쓸 수도 없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독자는 필요조건이다. 송기숙의 소설 중 '암태도'가 한 방송국에서 ‘베스트극장’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다. 소설가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될 것도 같아 내심 기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의도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각본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다룬 ‘직구’의 소설이 ‘변화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글쓰기와의 인연#그림2왼쪽#

시는 끊임없이 솟는 힘이 있다. 소설은 면면히 이어지는 힘이 더 강하다. 소설을 잘 쓰는 사람들은 일가친척 중에 이야기꾼이 한 명은 있게 마련이다. 송기숙에게는 어머니가 이야기의 보고였다. 사업으로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어머니의 이야기가 빼곡하게 채워준 것이다.

송기숙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을 초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다고 한다. 중학교에는 취미가 ‘소설쓰기’라고 학적부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고등학교 때는 전국에서 글을 좀 쓴다는 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학생계'에 꽁트 '야경'이 당선하는 영광도 누렸다. 이 잡지로 등단을 한 시인, 작가도 없지 않으니 공신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때 심사를 본 이가 소설가 최정희였다. 송기숙은 이때 받은 심사평을 두고두고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최정희의 심사평은 이러했다. “송기숙 양의 작품은 감상적인 부분이 없어서 좋아요.” 그리고 여학생 삽화와 함께 작품이 실렸다. 이것을 보고 보낸 남학생들의 편지를 꽤 받았다고 한다. 이후에는 투고를 할 때 이름 뒤에 반드시 ‘남’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무심필(無心筆)

퇴임 무렵 책장 정리가 마무리될 무렵에 선생께서는 종이 쪽 하나를 발견하고 굉장히 좋아 했다. 아주 오래 전에 서울 아무개 선생으로부터 온 편지의 겉봉이라고 했다. 거기에는 세로로 ‘송기숙’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런 꾸밈이 없이 담박한 붓자국이 첫눈 위에 찍힌 까치발자국 같기도 했다. 자신이 살 마지막 집을 지으면 문패로 달고 싶어서 수십 년 째 책상 서랍에 보관했던 것이라고 했다. 지금 화순읍 대리 자택 대문 앞에는 그 문패가 걸려 있다.

송기숙은 다른 사람이 쓴 자신의 이름이 낯설지 않고 가장 자연스럽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이 읽는 자신의 글이 무심필로 가슴에 찍히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냈다. 그 성과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대하소설 '녹두장군'이다. 그 작품을 통해 송기숙은 온몸으로 역사의 ‘무심필’이 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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