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새가 사발에 가득 올려 진 밥을 닮았다 해서 주민들이 ‘밥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다. 밥이 권력이고 밥이 목숨줄이었던 시절, 굶주린 배는 산도 밥으로 보였으리라.
길가 대봉은 낮술에 취한 듯 볼그레하고 밤송이 속의 아람은 누렁이 암소의 커다란 눈망울을 닮았다. 여름꽃이 진자리, 길옆 도랑엔 물봉선화가
아침부터 내린 비는 지짐거렸다. 작달비는 아니지만 금세 옷이 젖을 만큼 내렸다가는 이내 그치고, 개었다가는 다시 보슬비로 내렸다. 비 맞은 앞산 머리는 운무로 그윽하다. 운무는 종일토록 흐린 날이 될 것이라는 징후다.
길 가는데 어찌 맑은 날만 바라랴. 차의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도 곡성휴게소를 지나면서 차창의 와이퍼를 꺼도 됐다.
하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12시 정각에 출발한 군내버스는 20여분간을 달려 삼화보건진료소 건너편 동촌마을 정류장에 닿았다.
삼화교회와 지난 번 여행 때 하룻밤 묵었던 이정마을의 ‘산도리 민박’을 지나 길은 시작된다. 시월의 첫날, 날은 흐리고 습도는 높아 후텁지근하지만 노랗게 물든 들녘의 나락은 실하게 익어가고 있다. #그림1중앙#
이정마을에는 수령 150년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을 지키고 서있다. 느티나무는 여느 마을의 당산나무에 얽힌 무속신앙과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권세 높은 지주가 마을 공동의 땅을 논으로 바꿔 홀로 차지하려 하자 주민 한 사람이 궁리 끝에 숲을 조성, 사유화를 막았다는 이야기다. 지주의 탐욕에 맞섰던 나무들은 70년대 새마을운동 당시 마을회관의 대들보가 되거나 죽고 지금의 느티나무 두 그루만 남아 있다고 한다. 느티나무가 전설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길은 ‘이정2교’를 건너 콘크리트 임도를 타고 버디제로 향한다. 다리를 건너면 조그마한 동산 하나가 버디재 관문처럼 객을 맞는다. 모양새가 사발 가득 올려 진 밥을 닮았다 해서 주민들이 ‘밥봉’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다. 밥이 권력이고 밥이 목숨줄이었던 시절, 굶주린 배는 산도 밥으로 보였으리라.
버디재는 이정마을에서 우계리로 넘어가는 야트막한 고개다. 골퍼들의 귀가 솔깃해질 ‘버디’재는 예전에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지금은 버드나무 대신 고로쇠나무가 숲을 채우고 있다.#그림2중앙#
밥봉과 버디재 가는 길
고개로 가는 길은 감나무와 밤나무의 과수원을 지난다. 길가 대봉은 낮술에 취한 듯 볼그레하고 밤송이 속의 아람은 누렁이 암소의 커다란 눈망울을 닮았다. 꽃은 감꽃이 밤꽃보다 일찍 피는데 열매는 밤톨이 먼저 떨어진다. 피고 지는 가치가 인간사와 같겠는가마는 자연도 때로는 공평을 외면하는가 싶다.
여름꽃이 진자리, 길옆 도랑엔 물봉선화가 흐드러지고 쑥부쟁이도 하얀 미소로 반긴다.
버디재는 높지 않고 가파르지 않은데다 숲이 짙어 서늘하고 호젓하다. 돌계단길에 뒹구는 날짐승의 깃털하나를 주어 모자에 꽂는데 숲 저만큼서 ‘삐이이익~’ 휘파람새가 웃는다.
버디재를 내려서면 길은 솔가리 가득한 자드락길로 구불구불 S자로 이어지다 다시 임도를 타고 서당마을로 향한다.
서당마을에 내려서기 직전,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곳에 물레방아집이 자리하고 있다. 자전거 바퀴살로 물레방아를 만들고, 개 형상의 나무조각까지 세워놓은 물레방아집은 웬만한 설치 작품 이상이다. 자칭 ‘손재주 좋은’ 박한수 할아버지(76)가 지나는 길손을 위해 만든 작품이다. 할아버지는 여행객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식수를 받을 수 있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도록 꾸며놓고 있다.
벽에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지은 시 한 수가 페인트 글씨로 적혀 있다. ‘물레야 너는 한 자리에서 계속 돌고 있구나. 나는(우리는) 먼 길을 돌고 간다. 머나먼 둘레길~~’
“지난해 겨울, 이곳을 지날 때 길 난간에 홍시들이 얹혀있었다”고 경험을 말했다. “여행객들이 지나는 길에 먹으라고 내가 올려놓은 것이제!” 할아버지의 답이다.
할아버지의 자족과 배려의 삶은 지리산둘레길이 주는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서당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맞은바라기의 남해 뒷산이 아득하다. #그림3오른쪽#
할아버지의 설치예술
민박집을 겸하는 서당마을 회관에서 둘레길은 두 갈레로 나뉜다. 내려오던 길에서 녹색 화살표를 따라 곧바로 가는 길은 ‘서동~하동읍’구간으로 지리산둘레길 지선이다. 대축마을로 가는 길은 오른쪽으로 차도를 따라 걷는다. 서당마을에서 하동읍까지는 7.3km, 대축까지는 13.4km에 달한다.
차도를 타고 10여분쯤 오르던 길은 우계저수지 둑방길로 이어진다. 저수지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모여 거울처럼 가을 하늘을 비추고 왼쪽으로는 지나왔던 서당마을 앞길과 마을 앞 들녘이 벌써 추억이 된다.
길은 괴목마을을 지나 차도와 합류한 뒤 신촌마을에 닿는다. 마당 같은 신촌마을 회관 앞길에 서면 가야할 길은 치받이로 일어서고 운무가 걸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산자락은 까마득하다. 칠성봉에서 뻗어 내려와 분지봉과 구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마루를 넘는 길이다.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뜨거운 땀줄기가 바짓가랑이를 타고 서늘하게 흐른다. 비와 땀이 혼재한다.
숲은 무겁고 적막하다. 깊은 숲에서는 여행자도 한 마리의 작은 숨탄것일 뿐이다. 그 숲이 여행자를 품는다. 숲은 작은 한숨하나도 외면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인다. 말없는 위로가 좋다. 말로서 표현되는 위로는 슬픔을 동반한다는 것을 아는 숲의 배려다.
산에 안겨, 산의 위로를 받으며 1시간쯤 걸어 비로소 고개마루에 올라선다. 신촌재다. 이정목에는 대축까지 7.8km라고 쓰여 있다. 20리 길이다. 시간은 오후 세시 반을 지나고 있다. 해찰부리지 않는다면 해껏까지는 대축마을에 닿을 것이다.#그림4왼쪽#
길은 1시간쯤 더 가다 매실농사로 유명한 먹점마을을 지나 ‘삼화실-대축’구간의 마지막 고개인 먹점재에 닿는다. 직진방향의 대축까지는 4.8km. 오른쪽은 패러글라이더와 행글라이더의 활공장으로 가는 길이다.
먹점재를 넘어 30여분쯤 더 가면 멀리 발 아래로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 하나가 ‘느닷없이’ 눈에 들어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섬진강이다.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 또는 사강(沙江)이라고도 불렸던 섬진강의 모래톱이 하얀 맨살을 드러낸 채 비에 젖고 있다. 구례 다압면과 하동 악양면을 지나는 곳으로 모래톱은 평사리공원이다.
신선이 사는 72폭의 병풍
길은 섬진강 풍경을 뒤로하고 가던 길에서 벗어나 오른쪽 비탈길로 가파르게 오른다. 오르는 길에 밤톨만한 똘배 하나를 주었다. 주목받지 못한 삶의 회한일까. 똘배는 입안에서 오랫동안 서걱이며 쉽게 몸을 풀지 않는다. 두세 개를 더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밤, 민박집에서 막걸리 안주가 되어 전하는 그의 가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에게도 지난여름의 햇발은 힘들었을 테다.
비에 젖은 가을 산은 오후 5시를 넘어서면서부터 어둑어둑해진다. 포장 임도를 타고 서둘러 오르는데 그만 길이 끝나고 만다.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임도를 따라 관성으로 걷다 숲길로 접어드는 표시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래도 길을 잃은 덕에 똘배를 만났으니 탓할 일만은 아니다. 가던 길을 되돌아와 들어선 숲길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열병하듯 늘어서고 솔가리 수북히 깔린 길은 발의 피로마저 잊게 한다. 아미산의 허리를 둘러 대축마을로 가는 아미산길이다. 홀로 걷는 숲길에서 아람벌어진 밤나무가 돌멩이 던지듯 열매를 떨구며 가끔 고요를 깨뜨린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서는 또 한 번의 풍경이 눈길을 붙잡는다. 대축마을 너머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평사리 황금 들녘과 운무에 싸인 지리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병풍으로 치면 72폭은 족히 될 성 싶은 운무 낀 지리산능선은 한 폭 한 폭이 신선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능선의 운무 속으로 들어가 침잠하고 싶다.
길은 대축마을 뒤에 자리한 문암송(文岩松)을 알현하듯 지난다.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600년의 풍상을 겪어 온 노송에는 범접키 힘든 위엄이 서려있다.
마침내 길은 대봉이 주렁주렁한 과수원길을 지나 마을회관에 닿는다. 어두워지는 능선을 따라 하늘이 산으로 내려오고 건너편 평사리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다. 지리산에서는 비가 오면 별들도 산으로 내려오는가 싶다.
길 안내
삼화실(삼화보건진료소)- 이정마을(0.8km)- 버디재(0.9km)- 서당마을(1.8km)- 우계저수지(0.6km)- 괴목마을(1.2km)- 신촌마을(1.6km)- 신촌재(2.8km)- 먹점마을(1.7km)- 먹점재(1.1km)- 미점마을(1.7km)- 구재봉 갈림길(0.9km)- 대축마을(1.8km)까지 16.9km에 달하는 구간이다. 고개를 많이 넘어야 하고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주로 걷는 등 난이도가 높아 넉넉 잡아 7시간 정도 예상해야 한다. 밤나무와 감나무 길의 연속이다.
목적지인 대축마을에 닿기 전 섬진강과 평사리 들녘, 지리산 능선, 문암송 등은 이 구간의 백미이다.
들머리는 하동시외버스터미널(055- 883- 2663)에서 삼화실행 버스를 이용, 동촌마을에서 내리면 된다. 소요 시간은 20여분이나 오전 오후 각 2차례씩만 운행한다. 승용차로 광주에서 하동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2시간쯤 소요된다.
중간 지점인 서당마을과 목적지인 대축마을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서당마을을 지나면 도중에 가게가 없다. 충분한 식수와 점심 지참은 필수다.
대축마을과 문암송#그림5중앙#
대축마을은 대봉감의 시배지로 전해진다. 씨알이 크고 맛이 좋아 옛날부터 임금께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지금도 대부분 곶감을 자연건조한다. 매년 11월 초에는 대봉축제가 열린다.
대축마을 뒤에는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문암송이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다. 천연기념물이다. 이름에 문(文)자가 들어간 것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데서 기인한다. 마치 소나무가 바위에 걸터앉아 대축마을과 마을 앞 악양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상이다. 위풍당당한 기개가 남다르다. 지금도 매년 백중날이면 마을 주민들이 ‘문암대제’를 올리며 마을의 평안을 기원한다.시민전문기자kanjoys@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았습니다.
-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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