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피땀·흔적 고스란히
조선 세종 때 전장터·이순신 장군 주둔지
벼·조 등 재배…섬 주변서 연어잡이 활발
스탈린 강제이주 때 버려진 땅으로 남아
함경도는 산악지대인데다 가장 농지가 적어 농사지을 땅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선조들은 피땀을 흘리며 땅을 개척해 녹둔도에 터를 잡았다.
녹둔도는 함경북도 선봉군 조산리 두만강가 둔치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늦가을 방문했을 때 주변의 호숫가는 앙상하게 말라버린 연잎과 갈대들로 무성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간 핫산이다. 10여년 전, 핫산에 들어갔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는 연해주의 국제항으로 중국 국경과 러시아 출입이 가능했다.
현재 옛 녹둔도로 추정되는 평원의 갈대숲과 모래톱은 황무지로 퇴적되면서 넓은 육지가 돼 버렸다.
이 길로 얼마간 가면 국경수비대의 삼엄한 검문을 받았던 검문소가 나온다. 지금은 도로와 철도가 조성돼 북조선 나진과 연결돼 있다. 이 도로는 중국 훈춘으로도 연결돼 있다. 북한, 러시아, 중국을 잇는 이러한 삼각구도의 국경지대는 경제적 가치도 높다.
국경마을의 핫산까지 가다보니, 그만 국경 팻말을 넘어 버렸다. 삼각형 팻말의 면에는 'North Korean, Russia, China'가 박혀 있는데 그만 중국의 철조망까지 가버렸다.
아뿔사, 식은땀이 온몸을 적신다. 러시아 국경수비대에게는 안 좋은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1오른쪽#
차량을 겨우 돌려 나오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러시아 군인이 차량을 막아섰다. 일단은 여권을 보자고 하더니 군부대로 우리 일행을 따라 오라 했다. 또 하나의 걱정이 앞섰다. 십여년 전 국경수비대의 횡포에 시달렸던 악몽이 또다시 떠올랐다. 늘상 국경수비대에 걸리면 얼마간의 금전을 뇌물로 보답해 풀려나기 일쑤였던 시절, 그들은 한국 방문객을 보면 즐겁게 검문한다. 이런 저런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몇 차례 조사만 받고 풀려나게 됐고 우리는 이왕 이렇게 됐으니 장교에게 부탁을 했다.
모르고 들어 왔으니 북한 국경과 두만강을, 그리고 중국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장교는 흔쾌히 우리 일행을 관광객들이 갈 수 있는 접경지대까지 안내해 줬다. 덕분에 북한 땅과 두만강을 감격스럽게 바라보게 됐다.
나오는 길에 먼 발치에 있는 녹둔도를 바라보며 지신허라고 불렀던 크라키노와 그 당시 목포라고 불리던 포시에트 바닷바람을 즐기며 옛 항구 정취에 빠져 들었다.
녹둔도에 대한 설명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볼 수 있다. 사차마도라고 나오는 녹둔도는 4군 6진 개척 때 우리 영토가 된 땅이다.
1432년 세종은 녹둔도에 길이 1천246척, 높이 6척의 녹둔토성을 쌓아 녹둔도를 방비했다. 세조 원년에 녹둔도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됐고 조, 청, 일의 대부분 지도는 녹둔도를 우리땅으로 표기했었다.
녹둔도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 없었다. 국법으로 금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녹둔도에 들어와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백성들이 넓은 황무지를 개간해 둔전을 두었기에 농사시기 때만 출입이 허가됐다.
1587년 녹둔도에 여진족이 침입해 큰 피해를 입자 당시 책임자였던 만호 이순신은 책임을 지고 해임되기도 했다.
이듬해 백의종군한 이순신은 다시 반격에 나서 전투에 승리함으로써 다시 직위에 올랐다.
이후 녹둔도는 간도와 함께 무인지대가 됐고 영조, 정조시대 이후, 녹둔도에 모래, 흙 등 퇴적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청을 압박해 베이징조약을 체결하게 될 때 녹둔도에는 국경표석이 세워졌다.
조선은 그때까지도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가, 23년이 지난 1883년 고종 때에 들어서야 어윤중이 “녹둔도는 본시 우리의 땅입니다,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 국민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보고를 해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고종은 1885년 김광훈, 신선욱을 보내 녹둔도의 주변지도를 작성하라 명했고 1889년 직접 청나라에 찾아가 항의를 하기도 했다.
1937년까지 녹둔도에는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스탈린의 이주정책에 따라 모든 녹둔도인은 중앙아시아로 이주되기에 이르렀다. 한인들이 강제이주되면서 녹둔도는 이제 버려진 땅이 돼버렸다.
현재 녹둔도성 주변에는 가마솥, 연자방아 등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그림2왼쪽#
녹둔도는 둘레가 8㎞ 남짓되고 면적은 약 4㎢(여의도 면적의 1.5배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섬에서 조선인들은 벼, 조, 옥수수, 보리 등을 재배했고, 섬 주변에서는 연어, 붕어, 황어, 숭어 등을 주로 잡았다.
1884년 경 녹둔도에는 113가구, 822명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역사서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기록돼 있다
우리 민족에게는 구한말이 고난과 아픔의 디아스포라 유입기였다. 정권약화로 지도층의 가렴주구와 함경도 지방 토호세력의 가혹한 소작료는 당시 거주민들을 계속 괴롭혔다.
여기에 가뭄, 물난리 등도 빈번해 굶주린 조선인들은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1860년대 초부터 국경을 넘으면 참형에 처한다는 국법을 어기고 조선인들은 이주를 시작했다. 두만강을 건너 신천지를 찾아 나섰지만 그마저도 역시 만만찮은 이주생활의 연속이었다.
-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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