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8월의 남도 700리 ‘이순신 길’로 떠나다
“벽파진 병선 회령포로 옮겨라. 조양창·박곡 군량도 실어내라”
12척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박곡에서의 사흘째 밤, 이순신은 어젯밤 모처럼 편안하게 잤다. 경상우수영 선단이 벽파진에 숨어 있는 것을 알았으니, 군량도 충분히 확보했겠다 이제 큰 걱정거리를 벗었다. 조양창(보성군 조성면 고내)과 박곡에 있는 군량을 실어내고, 회령포에서 선단을 만날 일만 남았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아침상을 막 물렸을 때 거제 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이 벽파진으로 돌아가겠다고 인사를 한다.
이순신은 토방 아래 선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어제 내렸던 명령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벽파진에 있는 전선이 12척이라고 했는가? 가서 배(배설裵楔) 수사에게 전하라. 전선을 모두 회령포로 옮기면서 한 척은 관방關防(보성군 득량면 선소마을)으로 보내라. 관방에서 배에 올라 회령포로 갈 것이다. 조양창 군량을 실어내는 일도 유념하라. 배 수사에게 엄중히 전하라.”
이순신이 ‘엄중히’를 강조하며 명령을 확인시킨 것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미덥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난번 연해안답사 길에 노량에 들렀을 때(정유년 7월21일)도 이순신이 왔다는 것을 알고서도 머리를 내밀지 않다가 이튿날에야 마지못해 나타났다. 그도 한때는 영민한 목민관이요 전장에서는 용맹한 장수였으나 칠천량 패전 이후 전쟁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배가 오는 대로 바로 회령포로 갈 계획이다. 이순신은 군례를 올리고 돌아서는 안위의 뒷등을 보며 다행이다, 12척이 살아 있으니. 12척이면 당장 앞가림은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다시 한 번 가슴을 쓸어내린다.
부수사급 우후에게 곤장 80대
안위와 소계남이 떠나자 본영(전라좌수영)에서 온 우후虞侯 이몽구李夢龜를 불러들였다. 이몽구는 이순신의 부름을 받고 어제 박곡에 왔으나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 본영에 있는 군량과 무기를 모두 긁어 배에 실으라는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대장의 말을 거역했으니 당장 효시할 일이나 잠시 유예한다. 본영으로 달려가 차질 없이 명령을 이행하라. 이번에도 어기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를 내리쳐 본영으로 내쫓았다.
우후는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를 보좌하는 무관 벼슬로, 절도사 아래서 군영 업무를 총괄하는 부副대장 격이다.
하동 출신인 이몽구(경남 하동군 진교면 월운리에 신도비가 있다)는 이순신의 무과 7년 후배다. 1591년 이순신과 같은 시기에 전라좌수영에 우후로 부임해 이순신을 보좌하며 경상도 바다에서 많은 공을 세운, 오랜 기간 함께 전란을 헤쳐 온 심복 장수에게 곤장을 들이댄 것이다.
이순신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곤장은 친불친이나 지위를 따지지 않았다. 전시에는 더욱 엄격했다. 칠천량 전투 직전, 도원수 권율이 출전을 주저한다는 이유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불러 엎어놓고 곤장을 쳤을 정도다. #그림1중앙#
보성군수 곤장 맞다 즉사
이몽구가 맞은 곤장 80대는 집장사령이 휘두르는 매질의 강도에 따라 목숨을 잃기도 하는, 치명적일 수 있는 형벌이다. 임진왜란이 나기 5년 전, 보성군수가 곤장을 맞다가 즉사한 일이 있다.
당시 전라좌수사 이천李薦이 긴급히 조사할 일이 있어 좌수영에서 관할하는 15개 군현 수령들을 불렀는데, 순천부사 성응길成應吉과 보성·낙안·흥양·광양 등의 수령이 제때 오지 않았다.
“감히 명령을 어기다니, 이런 괘씸한 자들이 있는가.”
지각한 고을 수령들을 엎어놓고 곤장을 치니, 보성군수 이흘李屹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선조실록’ 정해년 6월)
이 곤장치사 사건은 조정에서도 말썽이 되었다.
전라감사가, 노정의 거리를 헤아리지 않았고 형장을 과도하게 사용하였으며, 또 사용한 곤장이 너무 커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며 임금에게 이천의 파직을 청하였다.
비변사 역시 적과 대진한 상황도 아닌데 마음대로 당상堂上 수령을 형장으로 다스렸으며, 또 적법성을 잃었으므로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임금은 다시 논의하자며 처리를 미뤘다.
보성에 들이닥친 어사와 선전관
박곡에서 머물기 나흘째인 8월14일 오후, 선유어사宣諭御使(임금의 특사) 임몽정任蒙正이 보성에 와 이순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이 왔다. 임몽정은 홍문관 교리로, 7월 말 임금의 특명을 받고 한성을 떠나 한산도 연해안을 돌아보고 한성으로 가는 길에 이순신 소식을 듣고 보성에 들렀다.
요즘의 군대 계급으로 치면 교리는 소령급이고 삼도수군통제사는 중장급이다. 일반 행정직 직위로도 통제사는 차관보급, 교리는 과장급이니 당연히 그가 찾아와야 하지만 임금의 특사인 만큼 가서 만나야 한다.
임몽정은 ‘한산도는 초토화되어 갈 수는 없겠지만, 현지에 내려가 패전 과정을 상세히 알아보라. 병선은 몇 척이나 남았는지, 군졸 중에 사망자는 몇 명, 살아서 도망친 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조사하라. 그 중에 생존자가 있으면 위로하고 진정시켜 불러 모으고, 사망한 자는 휼전恤典(전쟁 난민, 이재민 등에게 내리는 특전)을 거행하며, 장졸 중에서 특별한 공을 세우고 죽은 자는 사유를 갖춰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고, 칠천량 패전 직후의 경상도 연해안 형편을 돌아보고 오는 길이다.
오늘 이순신은 바쁘게 돌아갔다. 이몽구를 징치한 후 어제 작성한 장계 7통을 봉해 군관 윤선각尹先覺에게 안겨 한성으로 보냈다. 다른 군관들에겐 배에 오를 준비가 제대로 되어 가는지 점검하고, 미진한 것은 서둘러 끝내도록 단단히 이른다. #그림2왼쪽#
안위에게 명령했으니 벽파진에 있는 선단을 회령포로 옮기고, 내가 탈 배는 관방에 댈 것이다. 바닷가를 정탐하고 온 군사들에 따르면, 요즘 바닷물은 묘시卯時(오전 5∼7시)에 들기 시작해 사시巳時(오전 9∼11시)에 만조에 이른다고 했다. 당분간은 큰 바람이 일 걱정도 없다고 한다.
뱃사람이라면 사흘 날씨는 본다. 큰 바람은 날물로 안다. 먼 바다에 큰 바람이 불면 바람에 막혀 날물이 제대로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요즘 날물은 시각을 맞춰 쑥쑥 잘 나간다고 했다. 앞으로 최소한 사흘은 큰 바람이 없다는 얘기다.
오늘 내일 중으로 바다로 떠날 채비를 끝내고 배가 오는 대로 바다로 나가리라. 이러던 참에 임몽정이 보성에 왔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이순신은 박곡에서 곧장 바다로 나갈 계획을 수정했다. 보성에서 군영구미로 가 거기서 배에 오르리라.
벽파진으로 병사를 보내 계획이 변경되었음을 알리게 한 뒤 보성읍성으로 막 출발하려 할 때, 또 보성 관아 노비가 보성군수 전백옥全佰玉의 편지를 안고 달려왔다. 선전관 박천봉朴天鳳이 보성으로 오고 있는데, 보성에서 이순신을 만나고자 한다는 전갈이었다.
어인 일일까. 임몽정이 오고 선전관이 또 오다니 ……. 그들이 왜 한꺼번에 찾아오는 것일까. 임금이 특별히 내릴 말씀이 있다하더라도 한 사람이면 되는데 왜 두 사람을 보낸 것일까.
그때까지 이순신은 임몽정이 경상도를 돌아보고 한성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성에 들른 것을 몰랐다. 일부러 임금이 자신에게 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임몽정 편에 무슨 말을 전하려 한 것일까. 박천봉은 또 왜 오는 것일까.
도성에 남아 있는 명나라 군사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이니 대비하라는 어명이라도 전하려는 것일까. 그렇더라도 두 사람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것이 심상치 않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궁금증과 긴장감을 억누르며 박곡을 떠나 보성 길로 들어선다.
■ 글·사진 이훈(언론인)
<중간제목 1>임진왜란이 나기 5년 전, 보성군수가 곤장을 맞고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전라좌수사 이천이 일이 있어 관하 15개 고을 수령들을 불렀는데, 순천부사, 보성군수, 광양현감 등이 늦게 도착했다. 화가 난 전라좌수사 이천, 지각한 고을 수령들을 엎어놓고 곤장을 치니 보성군수 이흘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곤장은 그렇게 무시무시한 형벌이었다.
<중간제목 2>보성에 어사 임몽정과 선전관 박천봉이 온다는 전갈이 왔다. 그들이 왜 한꺼번에 오는 것일까. 임금이 특별히 내릴 말씀이 있다하더라도 한 사람이면 되는데 왜 두 사람을 보낸 것일까. 이들 편에 무슨 말을 전하려 한 것일까. 도성에 남아 있는 명나라 군사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이니 대비하라는 어명이라도 전하려는 것일까. 궁금증과 긴장감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사진 大 설명> 해남군 옥동 쪽에서 바라본 벽파진 바다. 오른쪽 섬 뒤에 벽파진이 있다. 이순신이 그렇게 애타게 찾던 경상우수영 선단 12척이 노량에서 왜적을 피해 나와 이 벽파진에 숨어 있었다. 이순신은 당장 선단을 회령포(장흥 회진항)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사진 中1+中2 설명>곤장을 맞고 엉덩이를 까발린 백성, 그리고 죄 없는 백성을 닦달하는 것이 미안했던지 포졸은 얼굴이 없다. 낙안읍성에 있는 석고인형들이다. 조선시대 곤장은 사정이 없었다. 백성뿐만이 아니라 고위 벼슬아치도 상관으로부터 곤장을 맞았다. 도원수 권율도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사진 小1 설명>이순신이 육지 노정 종착지로 잡은 보성군 회천면 군학마을 표지석. 마을은 바다 쪽에서는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 이순신이 노정의 최종 목적지를 군학으로 확정한 것은 박곡에 있을 때였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 小2 설명> 득량도를 앞에 둔 군학 바다. 득량도 뒤쪽에 녹동항과 소록도가 있다. 이순신이 박실에 도착한 이후 이 득량 바다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끝>
-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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