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8월의 남도 700리 ‘이순신 길’로 떠나다
마당에 버려진 무기들… 텅 빈 순천읍성엔 음산한 귀기만
복병지 이탈해 숨은 장수들
불탄 기둥이며 서까래, 판자대기가 어지럽게 뒤엉킨 부유창 잔해를 보며 이순신이 심란해 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후다닥 말들이 튀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말들이냐? 저들이 누구냐?”
군관 송대립이 아뢴다.
“구치에 복병해야 할 나주판관 원종의, 광양현감 구덕령, 옥구현감 김희온이 여기에 숨었다가 가는 것입니다.”
“도망치는 것이냐?”
“복병지를 이탈했다가 사또를 보고 놀라 급히 구치로 돌아갔습니다.”
저런 한심한 자들이 있는가. 이순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탄식하고 있을 때 휴대용 탁자에 차린 아침상이 나온다. 병사들은 소금에 절인 나물 몇 가닥에 젓갈을 얹은 주먹밥 한 덩이씩을 받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다.
자, 가자. 아침상을 물리고 숨을 돌린 이순신이 먼저 말에 오른다.
창촌에서 순천으로 가려면 접치接峙(순천시 주암면 행정리)를 넘어 승주읍(순천시 승주읍 서평리)을 지나야 한다. 접치는 창촌에서 10리 거리. 지금은 창촌 저쪽에 놓인 22번 일반국도를 타고 넘지만 신작로가 놓이기 전에는 창촌에서 들을 건너 접치 골짜기로 들어가 재를 넘었다.
접치 아래에 행정저수지(1945년 축조)가 생기기 전이다. 행정저수지 둑 아래 큰 당산나무가 있다, 창촌 마을 안길에서 들판을 지나(경지 정리로 길은 없어졌다.) 당산나무 아래서 저수지 가운데로 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접치를 넘었다. 행정저수지 위쪽에 옛길 흔적이 남아 있다.
논란거리 ‘구치’는 순천 서면 ‘비들치’
이 ‘접치’가 논란거리다. 이순신은 오늘 일기에서, ‘점심 식사 후에 구치鳩峙에 이르니 ……’라고 썼다. 학계에서는 이 ‘구치’를 ‘접치’로 추정한다. 부유창에서 접치까지는 겨우 10리. 그렇다면 이순신이 부유창에서 아침밥과 점심까지 먹었다는 얘기다. 폐허가 된 곳에서 할 일도 없이 한나절 내 머물었을 리가 없다. 또 오늘 가야 할 순천부까지는 백리 길이다. 그래서 석곡에서 아침밥도 먹지 않고 동이 트자마자 출발하지 않았던가.
‘접치’는 ‘구치’가 아니다. 구치는 순천시 서면 비월리에 있다. 이순신은 창촌에서 30리를 가 승주읍(당시에는 쌍암)에서 점심을 먹고 10리 거리에 있는 구치를 넘었을 것이다.
승주읍사무소가 있는 서평리에서 22번 일반국도를 타고 2킬로미터쯤 가면 승주읍 월계리 용계마을 앞 삼거리에 이른다. 여기서 석동마을 쪽으로 꺾어들면 수성노인당 옆으로 시멘트길이 비스듬히 놓였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구치 잿마루다. 유정이 남원에서 순천왜교성으로 진군하던 1598년 9월18일, 길을 안내하던 역관이 ‘구치가 직로直路’(‘난중잡록’)라고 했을 정도로 당시 구치 길은, 남원→구례→송치 길과 함께 남원→순천을 잇는 대로였다.
‘구치’는 비스듬하게 ‘비탈진 고개’에서 연유된 말이다. ‘비탈진 고개’가 ‘빗++재〉빗달재〉비달재〉비들치로 변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구치鳩峙’가 되었다.(윤여정, ‘대한민국 행정지명’―전남․광주편) 인근 주민들은 지금도 비들치라고 부른다. 구치 아래 마을 ‘비월飛月’은 ‘비달재’의 ‘비달’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구치 잿마루에서 가파르게 내려가면 비월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정상호(85) 할아버지도 옛날 걸어 다닐 때는 이 길이 순천을 오가는 대로였다고 했다.
“평시에도 오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사월 초파일이면 송광사, 선암사로 가는 광양, 순천 사람들이 어떻게나 많던지 살 수가 없었어. 아무데서나 잠자고 퍼질러 싸고 집안에 들어와 물건에 손대고, 그래서 마을로 못 오게 저 건너로 길을 따로 냈다니까.”
교통편이 여의치 않던 1960년대까지 얘기다.
부사도 관리도 백성도 떠난 순천읍성
이순신이 구치에 올라서니 부유창에서 내뺐던 나주판관 원종의 등이 기다리고 있다가 군례를 올린다.
“이 사람들아, 무슨 짓인가?”
“병사께서 우왕좌왕 서두르는데다, 명령이 종잡을 수 없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여러 말 말고 앞장서게.”
면박을 당한 관리들이 계면쩍어하며 앞장 서 구치를 내려간다. 재 아래 비월리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구치 길과 송치를 넘어오는 길이 만난다. 여기서 순천읍성까지는 20여 리.
옛 지도를 보면 이순신이 오늘 밤 머문 순천읍성 객사는 북문을 지나 왼쪽에 있었다. 북문은 순천의료원으로 들어가는 사거리에, 동헌은 청소년수련원 뒤쪽에 있었다. 삼성생명순천지점 주차장에 선 500살 팽나무는 동헌 마당 건너편에 있었을 것이다.
오늘은 성 안에 발을 들어놓지만, 백의종군 때인 지난 4월27일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을 찾아 순천에 왔을 때는 죄인의 처지라 성 안에 들지 못하고 읍성 밖 정원명의 사삿집에 머물렀다.
이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당당히 들어선 순천읍성. 그러나 이순신을 맞은 것을 공성空城 특유의 음산한 기운이었다. 벼슬아치들은 도망치고 백성들은 피란을 떠나 성 안팎이 휑뎅그렁하다. 짙어지는 어둠속에 웅크린 관아 건물에 귀기마저 감돈다.
마당엔 병기가 어지럽게 널렸다. 한심하다. 이렇게 성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다니. 이복남을 따라갔다는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벼슬아치들이 이 모양이니 백성들은 얼마나 놀라고 황망했겠는가. 그저께 옥과 가는 길에서 만난 순천, 낙안에서 온다는 피란민들이 떠오른다. 불안에 떨며 낯선 타향을 떠돌고 있을 것이다. 이 무슨 꼴인가.
이순신이 순천읍성에 도착한 날, 운봉현감이 남원부에 급히 올린 보고에, 영남 좌․우도의 적이 모두 남원으로 몰려오면서 거창․산음(산청) 등이 분탕질 당했는데, 경상도로 피란 간 전라도 사람도 많다고 했다.(‘난중잡록’) 거기에 순천부 백성들도 섞였을 것이니, 그들도 필시 못 당할 일을 당했으리라.
왜란 중 큰 공 세운 흥국사 의승군
이순신은 흩어진 병기 중에서 활과 화살 등 가벼운 것은 나누어 무장하게 하고, 화포 같은 무거운 것은 땅에 묻어 표시 하게한 뒤 객사에 오르니 한 승려가 뒤따라와 인사를 올린다.
혜희惠熙라고 했다. 흥국사興國寺(여수시 중흥동) 승려였을 것이다. 순천을 정탐하고 온 송대립에게서 대강 얘기는 들었지만, 다시 혜희로부터 본영 사정과 거간의 흥국사 형편을 듣고 즉석에서 승병장僧兵將 직첩을 내린다.
“흩어진 승려들을 다시 모아라. 암자에 박힌 중들도 모두 끌어내 병기를 다룰 수 있게 훈련시켰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출동해야 한다. 내 너희를 지켜볼 것이다.”
타오르는 촛불 아래서 신신당부한다.
흥국사는 왜란 이래 승군 주둔지로, 의승군義僧軍 훈련소로서 막중한 역할을 한 사찰이다. 흥국사에서 훈련된 의승군의 용맹성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해전을 함께 치르며 익히 알고 있다. 앞으로 이들이 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혜희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밀고나간 객사 격자문 틈으로 초여드레 달빛이 얼핏 스친다. 달빛을 보니 갑자기 온갖 감회가 몰려오면서 울컥 가슴에 심화가 인다.
아, 내 본영도 이 달빛에 잠겼을 것이다. 여기서 내례포(여수시) 본영까지는 백여 리. 채찍 한번 휘두르면 달려갈 거리인데 이렇게 외로운 성에 앉아 있다니.
■ 글·사진 이훈(언론인)
<중간제목 1> 학계에서는 ‘난중일기’에 나오는 ‘구치鳩峙’를 접치接峙(순천시 주암면 행정리)로 추정하는데, 구치는 순천시 서면 비월리에 있다. 구치를 넘는 길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순천을 잇는 대로였다. 평소에도 오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초파일이면 선암사, 송광사를 찾아가는 광양, 순천 사람들로 하얗게 덮였다. 이순신은 구치에 올라 부유창에서 도망친 나주판관 등을 만났다.
<중간제목 2>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당당히 들어선 순천읍성. 그러나 이순신을 맞은 것을 공성空城 특유의 음산한 기운이었다. 벼슬아치들은 도망치고 백성들은 피란을 떠나 성 안팎이 휑뎅그렁하다. 짙어지는 어둠속에 웅크린 관아 건물에 귀기마저 감돈다. 마당엔 병기가 어지럽게 널렸다. 이렇게 성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치다니. 순천부사 우치적禹致績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진 大 설명> 구치鳩峙 입구. 승주읍에서 오리쯤 가 승주읍 월계리 석동마을로 들어가다가 수성노인당(맞은편 벽돌건물)을 끼고 왼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면 구치에 이른다. 구치를 넘는 길은 조선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주암과 순천·광양을 잇는 대로였다.
<사진 中 설명> 접치마을 쪽에서 본 접치 옛길. 행정저수지로 흘러가는 계곡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이 옛길이다. 저수지가 생기기 전, 길은 저수지 한가운데를 지나 접치 밑동을 안고 재를 넘었는데, 지금은 저수지 위쪽에 흔적만 남았다.
<사진 小 설명> 순천읍성 북문이 있던 순천의료원 입구 사거리. 북문을 지나 맞은편 5층 건물 뒤에 순천부 객사가 있었다.
-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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