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8월의 남도 700리 ‘이순신 길’로 떠나다
조·명연합 육군 후방기지 창촌… 고니시 생포작전도 구상
대밭 솔밭 사이로 난 운치 있는 길
오늘 가야 할 순천까지는 백리 길이다. 서둘러야 한다. 이순신은 동이 트자마자 아침밥도 들지 않은 채 석곡 능파정을 나선다. 새벽 기운이 차다.
아직 어둠이 엷게 깔린 능파정 아래 강정나루로 내려선다. 따르는 군사가 60여 명, 많이 늘었다. 저 아래 대곡大谷나루와 입지진笠旨津에 있는 배까지 동원해 군사와 짐을 실어 나른다.
물살이 거세고 범람이 잦아 석곡 일대에서는 대황강大荒江이라고 부르는 강이다. 그러나 요즘은 비가 내리지 않아 물이 많지 않은데다 맞은편 구룡나루(곡성군 목사동면 공북리 구룡마을 강변)까지는 멀지도 않아 어렵지 않게 건넜다. 다리가 놓이기 전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 보성강은 이렇게 나룻배로 건너 다녔다.
부유창이 있던 순천시 주암면 창촌을 찾아가는 길. 석곡에서 제2목사동교를 건너 옛 대곡나루터 삼거리에서 강둑길을 버리고 대곡리 쪽으로 접어든다.
소방마을 입구에서 조영애(63) 아주머니를 만나 창촌으로 가는 옛길을 확인하니, “맞아요. 옛날에는 심포-문성을 거쳐 창촌을 다녔어요” 하며, 창촌 가는 길을 자세히 일러준다. 1970년 소방마을로 시집왔는데 시집 온 2년 뒤 다리 공사가 시작되었다면서(현재의 다리는 1999년에 다시 놓은 것이다.), 그때까지는 대곡나루터에서 나룻배로 석곡을 오갔다고 했다.
이제는 잡목만 우거진 옛 대곡나루터 삼거리에서 심포로 이어지는 길은, 야산과 들 사이에 놓인 한적한 시골길이다. 길은 심포마을 입구에서 강둑길과 만난다. 심포마을 앞 정자에서 붉은 고추를 다듬는 아주머니들에게 문성 가는 길을 물으니, “문성이요? 저기 대밭 앞에 백일홍 피었지요? 거기가면 길이 있어요.” 한다.
일러준 대로 마을 앞들을 건너 백일홍나무 아래에 이르니 대밭에 길이 빤하다. 잠깐이지만 참 오랜만에 걷는 대밭길이다. 대밭을 지나면 순천시 주암면 고산리 문성마을. 문성마을에서 다시 길을 물어 밭둑을 지나 솔밭을 꿰어나가니 호남고속국도 주암휴게소(광주방향) 뒤쪽에 나선다. 여기서부터는 낡아빠진 아스팔트 도로다. 한들한들 걸을 만하다.
환곡창 불타고 군사들은 모두 도망
이순신이 부유창(창촌)에 이르니 환곡창고가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수직군사들은 도망쳐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귀한 군량인데, 아깝다. 이순신은 오늘 일기에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 처참했다’고 썼다.
이곳만이 아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은 낙안읍성, 곡성읍성 등 가는 곳마다 불을 놓았다. ‘청야책淸野策이 방어의 최선책’이라는 조정의 전략에 따른 것이다.
조정에서 청야책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정유왜란이 나기 직전인 1596년 말이었다. 왜적이 다시 쳐들어 올 것이라는 첩보가 빗발치던 그해 11월, ‘부모처자와 가재, 곡식을 모두 부근 산성으로 실어들이고, 수량이 많아 옮길 수 없는 것과 길이 먼 곳에서는 근처의 깊은 산중에 단단히 묻어 감추고 청야하라’(‘난중잡록’ 병신년 11월)는 청야령이 내려진다.
임금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도체찰사都體察使(전시에 군무를 총괄하던 최고의 군직) 이원익에게 매달렸다.
“적을 막을 계책은 오로지 경에게 일임하니, 경은 양남兩南(전라도와 경상도)으로 달려가 죽음으로써 방어하여 적을 나에게 보내지 말라.”
이원익은 조복으로 눈물을 훔치며 궁궐을 나오자마자 영남으로 내려가 양남 각 고을에 전령을 띄웠다.
‘장수와 군사는 모두 산성으로 들어가고, 백성들은 집에 저장한 곡식은 산성으로 운반해 청야하고 성을 지켜라.’
총동원령도 내렸다.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없이 징병 명단에 올려라. 양반의 종은 3명 중 1명을, 아버지와 아들 중 아들을, 삼부자는 두 아들을 징병하고, 활과 화살은 각자가 준비하라. 화약과 조총은 관에서 준비하라 ……’(‘난중잡록’ 정유년 1월)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이 부유창을 불태운 것도 조정의 청야책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성급했다.
흔적도 기억도 사라진 부유창 옛터
순천시 주암면사무소가 있는 광천에서 순천 쪽으로 10여 리 거리에 있는 창촌은 옛 부유현 관아가 있던 마을이다. 주암과 승주에서 거둬들인 환곡을 보관하는 부유창도 있었다. 그래서 골터, 창몰, 부유촌, 부촌, 안창촌, 원창촌, 창골, 창머리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주암면사무소와 주재소, 수비대 막사, 곡식창고가 있었다. 시장도 있어 2일과 7일에 큰 장이 섰다.
창촌 박재식 할아버지(87)는, “지금은 찌그러졌지만 옛날에는 겁나게 큰 마을이었다’면서, 마을창고가 수비대 막사 자리고 마을창고 뒤 밭이 월등면 지주 김사천의 곡식창고가 있던 곳이라고 했다.
곡식창고 입구, 현재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자리에 창고를 지키던 초소도 있었다. 맞은 편 길 건너 돌담으로 둘러싸인 밭이 면사무소 자리다. 어쩌면 곡식창고 터가 옛 부유창 자리일 수 있고, 면사무소 터가 부유현 관아나 군막 자리일 수도 있겠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주암면사무소에서도 그렇고, 마을 주민들도 박재식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옛터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2009년 발간한 ‘주암면사’에도 창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다.
창촌에는 돌이 많다. 갓 시집온 새댁이 제주도로 시집온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로 돌이 많아 집 담장은 물론 텃밭도 돌로 둘렀다.
박재식 할아버지는 “인근에 돌이 나올 만한 곳이 없는데 어디서 가져온 돌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부유성을 헐 때 나온 돌인 듯싶다.
육군 전초기지 ‘불우’는 해룡면 ‘불모퉁이’
순천왜교성전투 때 명나라 장수 유정이 조·명연합육군을 이끌고 살다시피 한 창촌은 왜교성에 주둔하던 왜적 괴수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기 위한 작전이 꾸며진 곳이기도 하다.
유정이 창촌에 머물던 1598년 9월4일의 일이다. 강화를 논의하자며 고니시에게 회동을 제의했다. 당시 일본군은 ‘11월까지 강화 후 철수하라’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다방면으로 강화를 모색하고 있을 때여서 고니시가 즉각 회동에 동의, 9월 20일로 날짜를 잡았다. 하지만 이 회동은 고니시를 생포하기 위한 유정의 계책이었다.
회동 날짜가 잡히자 유정이 창촌에서 ‘불우佛隅’(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불모퉁이)로 나아가 진을 치니 고니시가 왜교성과 불우 중간 지점에 비단천막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체포 작전은 실패했다. 기패旗牌 왕문헌을 제독(유정)으로, 우후虞侯 백한남을 도원수(권율)로 위장해 만나려고 할 때 명나라 군사들이 성급하게 총질을 해 고니시가 달아나버린 것이다.(‘난중잡록’ 무술년 9월/‘선조실록’ 무술년 9월, 유정의 접반사 우의정 이덕형이 올린 급보)
여기에 나오는 ‘불우’는 지금까지 의문의 지명이었다. ‘난중잡록’에 조·명연합군이 ‘불우로 나아가 진을 쳤다’는 기사가 몇 번 나온다. 이 ‘불우’는 순천왜교성전투 때 조·명연합군의 최전방 전초기지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위치에 대해서 전혀 추적된 바 없다.
땅이름연구가 윤여정 씨(나주시청 사무관)와 몇 달 동안 추적하다가 순천왜교성에서 북쪽으로 2∼3킬로미터 떨어진 순천시 해룡면 선월船月리에서 찾았다. 불우는 ‘불佛 +모퉁이隅’이다. 산山의 옛말 ‘’을 ‘佛’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불모퉁이는 ‘산모퉁이’다.
선월리는 야산을 등지고 앉은 마을로, 마을 뒤쪽 작은 골짜기가 불모퉁이다. 조·명연합군이 지휘소를 이곳에 두고 해룡면 남부 지역 일대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것이다. ■ 글·사진 이훈(언론인)
이순신이 부유창에 이르니 환곡창고며 창고를 지키던 군막이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수직군사들은 도망쳐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귀한 군량인데, 아깝다. 이순신은 오늘 일기에 ‘타다 남은 재만 있어 보기에 처참했다’고 썼다.
청야령이 내려졌다. 장수와 군사는 모두 산성으로 들어가고, 백성들은 집에 저장한 곡식은 산성으로 운반해 청야하고 성을 지켜라. 총동원령도 내려졌다. 60세 이하 15세 이상은 빠짐없이 징병 명단에 올려라. 양반의 종은 3명 중 1명을, 아버지와 아들 중 아들을, 삼부자는 두 아들을 징병하고, 활과 화살은 각자가 준비하라. 화약과 조총은 관에서 준비하라.
사진1/ 순천시 주암면 창촌은 왜란 마지막 해인 1598년 순천왜교성전투 때 조·명연합육군의 후방기지였다. 부유현 관아와 환곡창고인 부유창이 있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순천시 주암면사무소가 있었다. 사진에서 보는 마을 안길은 저 위쪽에 신작로가 나기 전 순천을 오가는 대로였다. 달구지와 차량 모두 이 길을 이용했다.
사진2/ 유정이 진을 쳤던 ‘불우佛隅’는 순천왜교성 북쪽 2∼3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순천시 해룡면 선월리 불모퉁이이다. 왜교성전투 때 조·명연합육군 최전방 전초기지로, 장도에 있던 수군과 협공작전을 폈다. 앞에 보이는 들판은 바다였다. 이 바다를 통해 장도에 있던 수군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사진3/ 옛 창고 터. 감나무 안쪽에, 일제강점기에 이웃마을 부자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그곳이 부유창 자리일 수도 있겠으나 확인할 길은 없다. 길 건너 맞은편 면사무소 자리는 부유현 관아 터였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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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아닌 가을에 폭염주의보? 역대 가장 더운 9월 중순 무등일보 DB. 최근 광주·전남지역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려 9월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등 11년 만에 가을폭염이 관측됐다.18일 광주지방기상청에 따르면 기상청은 지난 16일 광주와 담양에 폭염주의보를 발령했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폭염주의보가 나주와 화순까지 확대됐다.폭염주의보 첫날인 16일 광주 낮 최고기온은 31.3도로 평년 기온(26.9도)보다 4.4도 높았다.이튿날인 17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3.5까지 높아져 평년 기온(27도)과 6.5도 차이가 났다.특히 18일에는 낮 최고기온이 34.5도까지 치솟아 9월 중순 최고기온을 갱신했다. 이전까지 9월 중순의 최고기온 기록이던 33.7도(1998년 9월 19일·2008년 9월 18일·2008년 9월 19일)을 큰 격차로 따돌렸다.광주지역에서 9월 중순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것은 이번이 관측 이래 네 번째다. 지난 1998년에 처음으로 '한가을 폭염'이 나타난 데 이어 2008년과 2011년에도 9월 중순까지 늦더위가 기승을 부렸다.기상청은 한반도 주위의 고기압에 의해 따뜻한 기류가 유입되며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 아래쪽에는 여름 기단인 북태평양 고기압이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고 태평양의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우리나라로 불어놓고 있다. 동해상에는 또 다른 고기압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 서쪽 지방에 더운 공기를 유입시킨다.여기에 18일에는 햇살을 막아주던 구름까지 걷히면서 폭염지수를 더욱 높였다.기상청 관계자는 "고기압이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는 동시에 남해상에서 태풍 '난마돌'이 북상하면서 뜨거운 수증기를 몰고왔다"며 "태풍이 지난 후에는 기온이 뚝 떨어지며 본격적인 가을 날씨가 이어질 예정이다"고 말했다.한편 폭염주의보는 폭염특보의 한 종류로 이틀 이상 하루 최고 체감온도가 33도를 웃도는 등 더위로 인한 큰 피해가 예상될 때 발효된다. 이전까지는 기온을 기준으로 폭염특보를 발령했으나 지난 2020년부터는 기온과 습도를 함께 고려하는 체감온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안혜림기자 wforest@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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