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종 박사의 고고학 산책

조현종 박사의 고고학 산책 <12> 천상의 신을 부르는 마법의 거울과 청동방울

입력 2020.03.18. 09:21 조덕진 기자
<12> 청동거울의 마법-화순 대곡리 출토 국보 143호
화순대곡리출토 국보 143호 청동기 일괄(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대곡리 청동기는

일명 엿장수 고고학으로 불린다

땅 주인이 녹 슬고 흙이 묻은

이 엿장수란 분이 고물로 취급하지 않고
이 청동기들을 엿장수에게 팔았다

관청에 신고해 보물로 남을 수 있게됐다

화순 대곡리 청동은 그렇게

국보 143호로 지정됐다

출토지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물로

한국을 대표하는 청동기다


반짝이는 광채, 신비로운 청동거울은

태양의 빛을 방아인간에게

우 주의 은혜 투영시키고

청동방울은 청아한 금속 소리로

신을 초청하고 그의 도래를 인도

하늘과 땅 연결하는 종교적·주술적 기물


마법의 거울은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물건은 아니다.

숭실대학교 박물관이 실행한 기원전 3세기경의 청동거울에 대한 초정밀 스캔 데이터 연구는 실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으며 신비롭기까지 하다. 지름 21cm의 거울에는 100여 개의 동심원과 1만 3천 개의 정교한 선으로 된 문양이 가득 채워져 있고, 각각 선과 선 사이의 간격 0.3mm, 선의 높이 0.18mm이다. 그것도 눈금을 새긴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만든 주조품이다. 우리나라 국보 141호 정문경. 눈으로 보아도 가늠하기 어려운 거울의 문양은 어쩌면 선사시대의 마법인지도 모른다.

                       정문경(국립광주박물관 소장)

유리거울이 나오기 전, 인류사에서 거울은 기원전 6000년경 터키의 흑요석제가 가장 빠르다. 판판한 흑요석의 표면을 윤이 나도록 갈아 얼굴을 비춰보았다. 금속제 거울은 기원전 2800년경에 이집트에서 순동제가 출현하고, 중국에서는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제 거울이 기원전 2000년경에 등장한다. 한쪽은 곱게 갈아 밝은 빛을 내고, 다른 한쪽은 매우 복잡한 무늬가 조각된 중국 거울은 춘추전국시대 동안 크게 유행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류 최초의 대중적인 거울은 잔잔한 수면이었다. 그리스 신화에는 연못에 비친 모습을 사랑한 나르키소스가 그것이 수면에 반사된 자기 자신임을 알고 슬픔에 빠져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문경 세부도면

우리나라의 거울은 기본적으로 뉴(紐), 즉 끈을 꿰는 구멍이 2~3개인 다뉴경이며 무늬 구성의 차이에 따라 조문경(粗文鏡)과 정문경(精文鏡)으로 구분한다. 시기는 조문경이 빠르며, 시작은 기원전 7세기경 요령지방의 청동기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초기의 거울은 Z자형 무늬이고 기원전 4세기경이 되면 소위 오도령-남성리 유형의 조문경이 출현한다. 이어 기원전 3세기경에 마법처럼 정교한 동심원과 삼각집선문 등으로 채워진 청동거울, 이른바 절정기의 다뉴정문경이 등장한다. 전 세계를 통하여 정교한 문양구성뿐 아니라 높은 제작기술의 수준은 3세기대 우리나라 정문경을 능가하지 못한다. 절대적인 탁월함이다. 이 시기 정문경은 출토지가 영암지역과 화순군 대곡리와 백암리, 함평군 초포리 등 영산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남부지역에 집중되고 있다. 그것은 영암출토로 전하는 주범(鑄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에 기술적으로 절정의 단계를 보이는 청동기제작 집단이 존재하고 나아가 그러한 청동제품이 요구되는 사회구조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

1971년,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312번지에서 출토지가 확실한 청동거울 2점이 여러 청동기와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만 해도 고고학 발굴이 활발하지 않았던 때라 유물들은 대부분 작업중에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해 세상을 놀라게 한 공주의 무령왕릉도 배수로 공사중에 알려졌고, 1976년 우물을 파다가 나온 충남 아산 남성리의 청동유물이나, 1986년 함평 초포리의 청동기들도 마을 길 조성 때에 발견된 것이다.

청동검 노출광경(국립광주박물관 소장)

대곡리 청동기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른바 엿장수 고고학이란 코믹 이야기로 알려진 이 청동기들도 담장 옆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발견되었다. 마법의 청동거울뿐 아니라 세형동검, 청동도끼, 동사(새기개), 팔주령과 쌍두령의 청동방울 등 11점이 그것이다. 땅 주인 구재천 씨는 녹이 슬고 흙이 덕지덕지 묻은 이 청동기들을 엿장수에게 팔아넘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엿장수란 분이 청동기들을 고물로 취급하지 않고 고스란히 전남도청에 신고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 기적적으로 1972년 3월, 화순 대곡리 출토 청동기 일괄 11점. 이 땅속의 보물들은 국보 143호로 지정되었다. 이름 모를 엿장수! 그분이 국보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청동거울, 즉 정문경 2점과 팔주령과 쌍두령은 출토지를 알 수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유물이다. 국보 141호가 거울의 출토지 불명이란 아쉬움과 달리, 화순 도곡면 대곡리 국보 143호는 사람의 족보처럼 출토지나 함께 나온 유물의 조합 관계가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청동기인 것이다. 특히 청동거울 2점은 각각 지름이 18cm와 15.6cm로 대형이며, 둘레에는 마치 태양을 상징하듯 삼각집선무늬가 햇빛이 확산하는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1mm의 폭 안에 2~3개의 선이 배치될 정도로 정교하게 채워진 무늬 구성이나 8개의 원권문은 국보 141호의 정치함과 같다.

출토된 청동기들은 샤먼, 혹은 제사장으로 알려진 부족의 우두머리가 생전에 소지한 물건이며 그의 죽음에 이르러 함께 매장된 것이다. 반짝이는 광채로 더욱 신비로운 청동거울은 태양의 빛을 반사하고 인간에게 우주의 은혜를 투영시키며, 청동방울은 그 청아한 금속성의 소리를 통해 신을 초청하고 그의 도래를 인도하는 도구이다. 말하자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의식과 종교적 의의가 있는 주술적인 기물인 것이다. 돌로 된 석기가 세상 전부이던 시대에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청동거울의 휘황찬란한 빛들과 강렬한 청동방울이 내는 천상의 소리가 펼치는 지상의 향연을 생각해보라! 

그렇게 37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8년 국립광주박물관은 드들강 변의 노거수가 우거진 아름다운 언덕에서 청동기가 출토된 적석목관묘 옛터를 조사하였다. 국보 유적의 재조사라는 중압감 속에서 무덤을 채웠던 돌들을 걷어내고 장방형의 무덤광과 그 안에 묻힌 목관을 발견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나무 관은 미세한 진흙으로 변한 뒤라 통나무 목관 형태의 진흙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새로이 청동검 2점을 발견하였다. 앞서 출토된 11점의 청동기들은 주인공과 함께 관의 내부에, 그리고 2점은 관을 내려 묻으면서 관밖에 넣어 둔 것이다.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 화순 대곡리에서 출토된 국보 143호는 13점이 되었다. 

조현종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과 학예연구실장, 국립광주박물관장을 역임하고 문화재위원으로 활동했다. 1992년부터 사적 375호 광주신창동유적의 조사와 연구를 수행했고, 국제저습지학회 편집위원, 고고문물연구소 이사장으로 동아시아 문물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국 초기도작문화연구' '저습지고고학' '2,000년전의 타임캡슐' '탐매' '풍죽' 등 연구와 저작, 전시기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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