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21세기 노인 생활

@정지아 소설가 입력 2021.05.02. 12:20

1970년, 오뉴월의 풍경은 대개 이러했다. 이른 새벽, 어머니가 가장 먼저 일어나 수돗가나 냇가에서 밀린 빨래를 한다. 빨래가 끝나면 아침 준비다. 너댓쯤 되는 아이들 도시락도 손수 준비한다. 아버지는 그 사이 논을 한 바퀴 둘러보고 모 심을 채비를 한다. 할머니는 굽은 허리로 텃밭에서 김을 매거나 상추, 열무 등속을 솎아 다듬으며 일손을 돕는다. 맏이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살피고, 초등학교 다니는 둘째나 셋째는 학교 가기 전 소 풀을 뜯기러 들로 나간다. 노인부터 아이까지 바지런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노인들도 큰소리칠 수 있었다. 거동만 할 수 있다면 노인들도 새끼를 꼬든 싸리 빗자루를 엮든 떨어진 나락을 줍든 무엇이라도 해서 살림살이에 보탰다.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 짚은 채 종일 들을 헤집으며 꺾어온 각종 나물은 빈약한 밥상을 넉넉하게 채우기도 하고, 장에서 팔려 손자들 공책값이 되기도 했다. 거동조차 힘든 노인이라도 농사일에는 쓸모가 있었다. 농사일은 변화가 더디고 노인들의 오랜 경험이 큰 도움이 될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체한 손자 손 따는 데, 배 주물러 체증을 내리는 데도 오랜 연륜의 할머니 손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그 시절, 노인들은 늙어도 당당했으며, 꼬장꼬장 할 일 다 하고 할 말 다했다. 자식의 봉양을 받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시절, 노인들은 늙어도 외롭지 않았다.

요즘 시골에는 혼자 사는 노인들이 많다. 기껏 고생해 가르친 자식들은 출세를 했든 못 했든 죄 돈벌이 많은 도시로 나갔다. 도시에서 먹고 사는 일이 만만할 리 없어 일 년에 서너 번 볼까말까다. 자식들 어려서 식성 생각해 늘 먹고 자랐던 각종 산나물이며, 농약도 안 치고 정성으로 키운 채소, 바리바리 택배로 보내는 게 요즘 시골 노인네들의 일이다. 나 역시 서울 살 때 이주가 멀다고 어머니의 택배를 받았다. 늙은 부모들은 모른다. 서울살이 팍팍하여 하루 한 끼조차 집에서 먹기 어렵다는 것을. 요즘 사람에게는 나물 요리가 얼마나 번거로운가를. 그래서 어머니가 보낸 각종 나물이 대부분 까만 비닐봉지에 담겨 냉동실에 처박혔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진다는 것을.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 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농경산업이 근간이었고, 농사는 공동체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어느 집이나 식구가 많았다. 밥 사먹을 돈도 없고, 외식할 만한 식당도 많지 않아, 그 많은 식구가 하루 세끼 머리 맞대고 앉아 밥을 먹었다. 여성들의 고된 노동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덕분에 밥상머리에서 숱한 추억들이 만들어졌다. 그 시절의 어머니를 경험한 사람들은 삭막한 도회로 나가 어머니의 된장찌개와 헌신적인 사랑을 그리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화의 속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근대의 속도에 적응하고 21세기 들어 젊은 사람들조차 현기증이 날 지경인 정보혁명의 시대에 적응 중인 자식들을, 고향의 부모는 여전히 전근대의 속도로 기다리는 중이다. 그래서 70년대의 부모와 달리 21세기의 부모는 한없이 외롭고 무력하다.

열 명의 식구가 북적거렸던 밥상 앞에 이제 남은 건 부부 혹은 아버지나 어머니다. 둘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둘을 위해서는 요리를 하지만 혼자를 위해서는 요리를 잘 하지 않는다. 한두 가지 대충 차려 대충 먹는다. 몸은 아직 움직일만한데 돈 되는 농작물이나 농사법은 매년 달라져 따라가기 어렵다. 그저 짓던 농사 그대로 짓는 수밖에 없다. 익숙한 오일장은 해마다 규모가 줄고 알던 얼굴은 사라져간다. 마트에 가면 체온을 재라는데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고, 젊은 애들은 휴대전화 갖다 대면 끝나는 걸 전화번호며 이름이며 주소며 일일이 손으로 적어야 한다. 무언가 뒤처진 느낌,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 읍내나 시내에 나가면 매번 그런 기분이 든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은 오직 내 집, 내 땅. 이제 그 땅도 힘에 부친다. 그래도 그 땅 놀릴 수 없어 지긋지긋한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가끔은 그립다. 먹을 것도 없고 죽도록 힘만 들었던 그때가. 온 식구 상에 둘러앉아 계란찜 한 번 더 먹겠다고 아귀다툼하던 그때가. 늙은이라도 쓸모 있던 그때가. 정지아 소설가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0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