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평] '벌레 이야기' 다시 읽기: 용서와 소문

@한순미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입력 2020.12.13. 13:25

영국 대표 저널리스트 제임스 볼의 책 '개소리는 어떻게 세상을 정복했는가'(김선영 옮김, 다산초당, 2020)에서는 듣고 싶은 대로 들리는 말들을 믿어버리는 사람들의 속성을 다양한 미디어를 사례로 들어 분석한다. '개소리(bullshit)'라는 번역어가 '허튼소리' '헛소리'보다 부정적인 어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성실하게 자료를 수집해 소문과 유언비어에 동조하는 인간의 심리를 예리하게 분석한다. 탈진실(post truth)의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허튼소리를 전달하고 그냥 그것을 믿어버리는 사람들이 계속 생겨나는 한, 지속된다는 것이 필자의 중심 주장이다.

제임스 볼은 여러 현장에서 거짓말들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학교에서 미디어 문해력에 대한 기초교육을 실시하자는 의견이나 허위 사실을 보도한 기사들이 삭제된 다음에도 정정한 기사를 널리 알릴 방법을 찾아보자는 제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철저한 조사로 음모론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면서 '명확한' 진실과 만나는 것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광주사람들을 향한 근거없는 '낙인'은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 아니 거짓말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12월 9일 국회에서 허위사실 유포 및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조사 등 5·18 관련 3개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앞으로 법안들이 실행되는 과정이 더 중요한 일이지만 일단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는 계기가 된 건 분명하다.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그림자처럼 살아온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결이 고르지 못하다. '전라도닷컴'(2020년 5월호)의 기획특집 '마흔 번의 오월'에 담긴 글들은 온갖 거짓말들을 거두어내고 오월의 진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겨준다.

경상도 거제에서 광주로 시집온 새댁의 남편은 광주역 근처에서 세차장을 하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변을 당했다. 그녀의 말들 사이를 잇는 말줄임표들은 울음소리를 낸다. "전두환이 죽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도 나 같은 사람 죽으면 암도 몰라…그냥 살다 가는 거지"(공선옥, '그들이 그렇게 사는 동안 사십년이 갔다', 9쪽.)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을 성실하게 기록한 역사책은 보기 드물다. 소설가 공선옥의 손끝은 그녀의 넋두리에 이렇게 응답한다. "다시 오월이 오고 작년 오월에 그랬던 것처럼 쑥꾹새가 운다."

새들이 소란스럽게 울 때마다 '마흔 번의 오월'이 날아든다. 그날 이후 눈앞을 스쳐가는 모든 것들은 죽은 아들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도청 앞 시위대에 있다가 총상을 입은 아들은 후유증을 앓다가 세상을 떴다. 성경을 필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어머니에겐 헛것들이 이 세상에 없는 아들인 것만 같다. "새만 와서 울어도 니가 새가 되아서 혹시 왔냐 하고 쳐다보요. … 내 옆에 온 것은 그것이 머이든 다 아들만 같으요. … 세월호 사고로 죽은 아그들도 짠하고 부모도 짠하고, 팽목에도 가보고 그 부모들도 만났어요."('전라도닷컴', 같은 책, 11-13쪽)

그녀에게 '웃음'이란 게 남아 있으랴. 잊을 수 없는 아픔 하나는 천 개의 다른 아픔들을 불러낸다. 남이 겪는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오월 광주와 세월호는 그녀에게 똑같은 크기와 빛깔을 지닌 눈물바다이다. 고통과 진정으로 마주한 적이 있는 사람의 생애는 언제나 그 시간에 멈춰 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유괴해 살해한 범인을 그녀는 용서할 수 있었을까. 감옥에서 신의 용서를 이미 받았다고 말하는 범인 앞에서 그녀는 절규한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이청준, '벌레 이야기', 문학과지성사, 1985/2013, 75쪽) 이 용서할 수 없는 마음들, 쉽게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들이 모여들 때 새로운 역사의 무늬를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의심없이 그냥 믿어버리는 무책임한 눈, 귀, 입들과 결별할 때에만 소문 속에서 신음하는 진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에게 오월의 진실을 밝혀달라고 부탁해야 할까. 그런데 어디선가 인공지능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글이 떠올라 갑자기 막막해진다. 아직 '용서할 수 없음'에 대해 계속 말해야 하는 이유는 소문 속에 갇힌 '정의로움'을 만나고 싶은 열망이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벌레 이야기'의 주인공은 벌레가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다. "(광주사람들이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그 사람)을 용서합니까."

한순미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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