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는 서편 하늘
들녘에 서서 해지는 서편 하늘을 바라보라
저물어 가는 모습이 이리 아름다울 수 있는가
세상의 모든 색들이
층층이 어울리고 덮혀서
이윽고 만나는 희미한 미소
들녘에 홀로 앉아
오랫동안 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장 낮게 몸을 뉘인 풀잎이 되고
온화한 땅이 되고
가난한 수도사의 기도가 되고
긴 한숨의 얕은 바람이 되고
이윽고 대지를 덮는 노을이 된다
해지는 서편 하늘은
찾아오는 어둠을 탓하지 않는다
황홀한 웃음을 안으로 감추며
한 번의 미소로 그를 맞이한다
하루에 한 번쯤
해지는 서편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뒷모습이 노을을 닮았다
아름답게 저무는 노을이다
(한희원)
11월의 스테판츠민다는 늦가을의 차가운 기류와 고요함 속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룸스 호텔은 마을에서 가장 먼 언덕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에서 20여분 정도를 걸어가면 된다. 무겁지 않은 짙은 검은색의 단순한 모습으로 건너편 카즈베기 산과 마주하고 있다. 룸스 호텔까지 오르는 언덕길에는 나뭇잎을 다 떨구어낸 후 거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 초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몇 명의 관광객들은 고봉으로 둘러싸인 조지아의 전형적인 집들 사이를 떨어진 낙엽처럼 바스락 거리며 걸었다.
길을 걷다 잠시 숨을 돌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맑은 청빛의 노을이 드리워진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카즈베기 산이 이방의 여행자들을 지그시 바라다보고 있었다. 카즈베기 산을 오르려면 차량을 이용하거나 마을 옆을 지나는 트레킹 코스로 가면 된다. 유럽에서 온 젊은이들은 세 시간정도 걸리는 트레킹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리지어 산을 오른다. 우리 일행도 내일이면 신화가 잠들어 있는 저 산을 오른다는 설렘에 치진 몸을 다독여 본다.
룸스 호텔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여느 호텔과는 달리 나무로 외관을 한 단순한 기하학적 모형인 호텔이다. 1층으로 들어가면 카즈베기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넓고 긴 나무로 만든 테라스가 있다. 테라스에는 잿빛에 가까운 나무로 엮은 안락한 소파들이 널려 있다. 여행자들이 쌀쌀한 날씨에 담요를 덮은 채 소파에 앉아 있다. 모두들 기도하는 모습으로 어둠에 잠기는 카즈베기 산을 보고 있다. 카즈베기 산 중간에 있는 게르게티 성당에서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불빛이 사람들의 기도에 화답하는 양 하나둘 불을 밝힌다.
조지아 여행의 백미는 카즈베기 산을 바라볼 수 있는 룸스 호텔에서 숙박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이 선호하는 곳이다. 스테판츠민다에 있는 호텔보다 숙박료가 2배 이상이니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라면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거나 가벼운 식사로 서운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 또 호텔 1층에는 도서관처럼 고서들이 즐비하게 채워져 있다. 게다가 유명한 포스터들이 벽에 진열되어 있어 호화롭지 않게 호텔의 기품을 유지하고 있다.
만년설에 쌓인 카즈베기 산과 게르게티 성당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 테라스나 베란다에 앉아 별들이 몰려오는 카즈베기 산을 보면서 와인을 마시면 켜켜이 쌓인 피로가 순식간에 씻겨 나가면서 안락함과 함께 가벼운 흥분이 느껴진다. 2층 객실 베란다에서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산과 불 켜진 스테판츠민다 마을을 바라보면 그토록 갈망하던 신화의 땅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황홀함에 러시아 대문호인 푸시킨과 톨스토이가 높은 산을 넘어 와 조지아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나 보다.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차가운 베란다에 앉아 무수한 별들과 동무하며 카즈베기 산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셨다. 밤이 깊어갈수록 바람이 거세지니 산 아래 무리지어 서 있는 늙은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소리를 지른다. 만년설에서 흘러나오는 강물이 마을 사이로 흐르며 거칠어지고 있다. 그러나 별들은 세상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로운 눈빛으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다.
높은 산을 넘고 넘어 그리운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아득한 시간의 밤이다. 내일이면 카즈베기 산을 오르고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에 앉아 기도를 드릴 것이다. 잠자리에 들면서 프로메테우스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리라.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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