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스테판, 스테판츠민다
만개
풀잎이 풀잎에게
바람이 바람에게
하늘이 하늘에게
강은 강에게
풀잎이 꽃에게
바람이 나무에게
강이 산에게
하늘이 대지에게
나는 너에게
생명이 생명에게
다가가 말을 걸 때
꽃은 핀다
이제 너에게로 가
만개한다
(한희원)
구다우리(Gudauri)에는 조지아와 러시아의 친선을 기념하는 거대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타일 모자이크로 제작된 둥근 모양의 전망대이다. 지금은 두 나라가 적대 관계이지만 수십 미터나 되는 전망대 벽에는 조지아와 러시아의 역사와 교류 장면이 모자이크로 제작되어 있다. 해발 2,200m에 위치한 전망대 주위를 높은 산봉우리들이 둘러져 있고 밑으로는 아찔해 보이는 계곡이 장관을 이룬다. 여행객들은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와인을 뜨겁게 데운 묘한 맛의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기도 한다. 뜨겁게 데운 와인을 방심하고 한 입에 훅 마시면 머리가 펑 터지는 듯 어지러운 경험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주차장에 차를 정차하고 내리면 패러글라이드를 타라는 호객꾼들이 여행객을 반긴다. 호객꾼의 유혹에 빠져 패러글라이드를 타는 재미를 누리기도 한다. 장난꾸러기 강사를 만나면 곡예운전을 해 심하게 멀미를 할 수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여기에서는 누구나 새가 되는 꿈을 꾸나보다. 날개가 없는 인간들이 인공의 날개를 부착해 마음껏 하늘을 난다. 또 구다우리 산언덕에는 스키를 즐기는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 즐비해 있다. 관광객 유입이 빠르게 증가하는 조지아 곳곳에서 많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구다우리에서 가장 높은 언덕은 2,395m의 즈바리 고개(Jvari Pass)이다. 이곳을 지날 때 운이 좋으면 맛이 뛰어난 벌꿀을 구입할 수 있다. 즈바리 고개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꿀이다.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면 고봉 사이로 언뜻언뜻 카즈베크 산이 보인다. 그러면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한다.
군사도로로 만든 산악지역에는 터널이 많다. 눈이 쌓여 길이 막히는 곳에 위험해 보이는 터널이 있는데 터널을 통과할 때 마치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터널 안에 차선이 나눠져 있지 않아 한쪽에서 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반대편 차들이 지루하게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지만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조지아 전역의 도로를 정비하며 터널 옆으로 길을 내어 지금은 쉽게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높은 산길을 넘어 낮은 지면으로 내려가면 구다우리 스키장까지 가는 긴 케이블카가 있다. 스키시즌이 끝난 계절에 보면 검은 전깃줄에 앉은 새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인다.
구다우리를 지나 스테판츠민다까지 가는 길은 전설 속에서 나오는 길 같이 신비스럽다. 산의 정기를 듬뿍 받은 마을이 언덕에 펼쳐져 있다. 마을 뒤로는 가축을 위한 풀밭이 넘실거리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른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영혼이 촉촉하게 젖어든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눈가에 물방울이 저절로 스며드리라.
구다우리 스키장까지 가는 케이블카가 오르는 지점을 지나면 길은 평지에 가까워진다. 또 다른 풍경들을 눈요기하며 가다보면 드디어 스테판츠민다가 나온다. 스테판츠민다로 보이는 길목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주타 트레킹을 하는 길이다. 주타 트레킹을 하려면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한다. 스테판츠민다에 들어서면 입구에 버스 정류소가 있다. 트빌리시로 돌아올 때 이곳 버스 정류소에서 마슈르카를 타고 오면 된다.
마을 입구에 수백 년은 묵은 듯한 나무들이 여행자들을 맞이한다. 이곳 신화의 마을에는 유럽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호텔 '룸스'가 있다. 룸스 호텔로 가는 언덕길에는 조지아의 전형적인 집들이 모여 있다. 게스트 하우스와 작은 호텔에 밤이 되면 지상으로 떨어진 별들이 온갖 신화의 이야기를 털어낸다. 여행에 지친 여행자들은 꿈결에 이야기를 듣는다.
스테판츠민다의 뒤편에는 4,000m가 넘는 고봉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마을 앞에는 코카서스 산맥에서 흐르는 아라그비 강 상류의 물줄기가 굽이쳐 흐른다. 강 너머 카즈베크 산 쪽으로는 수백 년을 버티고 있는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카즈베크 산이 하얀 얼굴을 한 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카즈베크 산을 오르는 2,200m지점에 조지아인들이 가장 숭고하게 여기는 게르게티 트리니티 성당이 보인다.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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