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마한시대 형성된 전라도 정신, 광주정신까지 이어져

입력 2020.10.19. 19:20 김승용 기자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Ⅱ<7> 지석묘와 전라도 정신(上)
영암엄길리 지석묘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전라도 정신'을 이야기하곤 한다. 불의에 맞서 올바름을 추구하는 의리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 시대 호남 사림에서 그 연원을 찾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라도 정신의 뿌리가 조선의 어느 특정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 정신은 선사 이래, 우리 지역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상황이 쌓여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을 정확히 밝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다"

필자가 2017년 1월 본지에 마한 관련 글 연재를 시작할 때 언급한 말이다. 막연히 이야기되고 있는 전라도 정신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밝혀보려는 데 연재의 의도가 있음을 분명히 한 셈이다. 우리 지역의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상황이 켜켜이 쌓여 전라도 정신이 형성되었다고 전제하고, 이를 위해서 전라도 고대사에 대한 천착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접근을 시도한 결과 전라도 정신의 원형이 마한 시대에 형성되었음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곧 한국 고대사의 원형이 마한에서 비롯되었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마한에서 변한, 진한이 나오고, 백제가 나왔다"라는 말이 객관적으로 설득력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현재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전라도 정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위로는 대통령부터 일반 필부에 이르기까지 그 정신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광주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라도 정신과 광주 정신은 구분되는 것일까. 그것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 그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일까. 인터넷에서 전라도 정신을 검색하면 5·18민주화운동 때 발현된 공동체 문화, 불의에 맞선 정의로움, 인권 등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특질이 우리 지역에서만 유난히 나타나는 것일까. 반드시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정의, 인권 등은 인류 보편적 가치이기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유독 우리 지역에서 나눔, 정의, 인권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러한 인류 보편적인 정신이 전라도 지역의 과거 오랜 역사에서부터 유난히 나타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라도 정신의 뿌리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대부분 조선 왕조 호남 사림에서 연원을 찾고 있다. 조선 시대 이전의 이 지역의 역사와 어떤 차이가 있어 그러한 특질이 형성되었을까 궁금하다. 오랜 역사가 쌓여 나타난 것이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출현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역사, 우리 지역의 특징을 찾아보려는 이유이다.

우리 지역은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지석묘라는 묘제가 보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밀집 분포되어 있고, 뒤이어 들어선 옹관묘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고분 분포와 이 지역 역사의 전개가 관계를 맺으며 전라도 정신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지석묘를 중심으로 우리 지역의 문화의 특질을 분석하려 한다.

전남 지역에 분포된 지석묘 수는 1천208개 군(群) 1천871기로 우리나라 다른 지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가장 많고 또 밀집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발굴 조사된 것만도 45개 지역 474기나 되어 우리나라 지석묘 연구에서의 전남지방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전남 지역의 일정 지역에 집중적으로 밀집 분포된 지석묘군과 마한 왕국으로 추정된 곳이 꽤 많이 일치하고 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지석묘를 철기 시대에 속한 마한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전남 지역의 경우 지석묘의 하한이 기원전 3~2세기 초이고 마한의 상한은 기원전 5세기 늦어도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추정하고 있어 충돌하지는 않는다. 고흥반도의 '초리국', 보성 복내의 '비리국' 등 마한 연맹체가 위치한 곳에 지석묘가 밀집되어 있다.

함평을 예로 들어 살피더라도 지석묘의 분포 숫자만 보더라도 함평천 수계 409기(분포비율 40.1%), 고막원천 수계 592기(58.4%)로 두 곳에 집중되어 있다. 함평천과 고막원천을 천주봉과 철성산으로 이어지는 지맥이 기르고 있는데, 두 지역에 각각의 정치체들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백제 때 함평천 쪽은 굴내현, 고막원천 쪽은 다지현이 있었다. 말하자면 청동기 시대 때 이미 형성된 정치체들이 백제 시대까지 지역적인 변동이 없이 유지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지석묘 밀집 분포지를 통해 마한 시대의 정치 중심지를 살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지석묘의 구조적인 특징에서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영산강 유역과 보성강 유역이 그 성격에서 차이를 보인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석관형 석실이, 보성강 유역에서는 석곽형 석실이 많으며 보성강 유역에서는 석검 등 부장 풍습이 유행하고 있으나 영산강 유역에서는 부장 유물이 한점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고흥 중산리 지석묘군

한편, 영산강 유역과 전남 서부 지역에서는 철기 시대의 대표적 묘제인 주구토광묘와 옹관묘 등이 조영되고 있는데 반해, 남해안과 전남 동부 지역에서는 이들 묘제의 흔적이 거의 찾아지지 않은 채 지석묘만 계속 남아 있다. 이는 이들 지역의 지리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고흥 반도는 금관가야가 있는 김해와 침미다례가 있는 해남 반도의 중간 지점에 있어 중국이나 가야, 왜로부터 이입되는 새로운 문화를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늦었을 것이며, 내륙의 보성강·섬진강 유역은 산악 지대를 관통하며 굽이쳐 흐르는 강의 특성 때문에 외부의 문화 접촉이 더더욱 더디었다. 이는 토착적 전통이 강고하게 형성되어 독자적 성격의 문화가 확립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좁은 분지에서 작은 연맹체들이 분립되어 고립적으로 나타나는 지나친 폐쇄성은 때로는 연맹의 발전을 막았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세형동검 같은 철기 시대의 대표적 부장품은 물론 독자적 청동 제품을 주조하는 청동 거푸집이 영암 지역에서 출토되는 등 문화의 개방성을 설명해주고 있지만, 전남 동부 지역과 고흥 반도 등 남해안 일대에서는 같은 단계의 동경(銅鏡)은 물론 세형동검과 같은 철기 시대의 부장품이 거의 출토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의 발전이 더디었음을 반영한 것으로, '연맹왕국' 이전 단계인 군장 사회를 벗어나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음을 알려준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연맹왕국이 성립되기 시작한 영산강 유역보다 1세기 늦게 성립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군장 사회 단계의 주요한 묘제였던 지석묘가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러서도 주된 묘제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는 지석묘의 밀집 분포 지역에 연맹왕국이 성립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남 지역 지역묘 군은 분포 형태나 규모 면에서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다. 예컨대, 경남 지역은 여러 취락에서 하나의 지석묘 묘역을 공유하고 있지만, 전남 동부 지역과 득량만 일대 남해안은 개별 촌락마다 별도의 지석묘군을 만들었다. 경남 지역은 여러 촌락을 하나로 아우르는 큰 정치체를 만드는 것이 용이한 반면, 전남 지역은 독립된 촌락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단위의 정치체가 출현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전남 지역은 연맹장의 세력도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경남에는 길이 10m, 폭 4.5m, 높이 3.5m 무게 350톤 정도 되는 거대 지석묘가 있었지만, 전남은 길이가 10m를 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1~2m의 작은 규모였다. 변한 지역에서는 대·소국 간에 세력 차이가 커서 연맹 간의 통합 작업이 활발했으나, 마한 지역은 세력 간의 우열이 드러나지 않아 통합력이 미흡해 초기국가로 나아가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필자의 지적이 여기서 확인된 셈이다. 박해현 시민전문기자(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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