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마한인들 유이민 아닌 토착세력으로 순장풍습 있었다

입력 2020.09.01. 19:30 김승용 기자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Ⅱ
<4>문헌에 보이는 마한사회의 성격
복암리 출토 토기

기원후(AD) 3세기 말 기록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토착인이며, 씨를 뿌리고 양잠을 하며 베를 짠다. 각각 장수가 있는데 세력이 큰 자는 신지라 하고, 그다음은 읍차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독자들이 익히 아는 삼한에는 '신지', '읍차'라는 정치적 군장이 있었다는 말이 여기에 나온다.

이 사료에서 '마한은 토착인'이라는 표현이 주목된다. 지난 글 에서 언급한 고조선의 준왕이 기원전 194년에 한(韓)으로 피신했다는 말에서 이미 마한이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 것과 통하는데, 마한인이 유이민 집단이 아닌 토착 세력임을 알려주고 있다. 아울러 성곽이 없다는 것은 평야 지역에 있고 서로 세력 규모가 비슷하여 공존하는 관계로 상호 간에 전쟁이 없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역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마한의 풍습 및 마한의 기원을 추정하는 기록이 있다.

"그 장례 풍속에 곽(槨)은 있는데 관(棺)이 없고, 소와 말을 탈 줄 몰라서 소와 말은 모두 죽어 없앤다. 구슬을 보물로 여겨서 옷에 꿰매서 장식하기도 하고 목걸이, 귀걸이로 삼았다. 금은과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여기에서 먼저 소나 말을 장례에 사용하였다는 것은 마한 사회의 순장(殉葬) 풍습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소뼈'와 '광주 연산동 산정 유적의 소 모양 토제품' 유물은 이러한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다음으로 '마한인은 구슬(玉)을 금, 은보다 보물로 여겼다.'라는 기록은, 마한인이 금, 은보다 옥을 중시하였다는 것인데, 복암리 정촌의 한 고분에서 1천점이 넘는 구슬이 출토되는 등 영산강 유역 마한 고분 곳곳에 엄청난 구슬이 출토되고 있는 것에서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의 반영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옥이 금강 이북에서는 영산강 유역처럼 많이 나오지 않고 있어, 위 기록은 영산강 유역이 마한 역사의 시원임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하겠다.

한편 지난 글에서 인용한 '후한서 동이열전'의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인데 마한이 가장 강대하였고,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三韓)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삼한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라는 기록에 삼한의 왕을 진한, 변한 출신이 아닌 마한 출신이 하였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삼한은 사실상 마한의 세력권에 들어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한이 토착세력이지만, 백제는 부여계열의 유이민 세력이 세운 나라였다. 6세기 초 기록인 '주서 열전 백제전'에 "백제는 선조들이 마한에 속국으로 있었다. 부여의 별종이다"라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건국 초기의 백제는 마한의 소국이었다는 사실과 백제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여 마한과는 다른 종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한과 백제가 분명히 종족계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백제와 마한의 종족계통이 다르다는 사실은, 예맥족의 신앙에서 '새(鳥)' 사슴 신앙이 분화되어 갔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부여·고구려 등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는 사슴과 관련 언급이 자주 보인다고 한다. 백제가 사슴을 희생으로 삼고 '부여' 명칭이 사슴을 나타내는 퉁구스어인 'buyu'와 같다는 점은, 백제가 부여계통의 주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 마한이나 신라 등 한반도 남부 지역에는 '진한·계림-닭', '마한-매' 등 새와 관련이 있는 언급이 자주 보인다. 마한이 '새'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삼한의 소도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솟대에 새'가 있는 솟대 신앙은 삼한의 대표적인 신앙이다.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영산강 유역의 대표적인 토기 문화를 상징하는 '조족문(鳥足紋)토기'를 보면, 새(鳥) 발자국이 선명히 토기 몸체 전면에 새겨 있다. 솟대 신앙이나 조족문 토기를 통해 볼 때 '새'가 마한 문화권과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새 계통인 '닭'을 집단의 표상으로 한 신라 역시 경주를 '계림'이라 하고 있다.

고려 후기 이승휴는 '응준'을 백제의 표상으로 이해하였다. 이승휴 훨씬 이전 신라 선덕여왕 때 준공된 황룡사 9층탑 찰주본기에도 백제를 '응유(鷹遊)'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를 '응준'과 연결을 지어 해석하는 연구자도 있고, 광주교육청에서 발행한 인정도서에 실려 있기도 하다.

'새', '매'의 총칭으로 쓰는 '응준'을 '사슴'을 상징으로 하는 백제의 상징으로 살피는 옳지 않다. 영산강 유역의 독자적 정치체를 확인하여 준 조족문 토기나 삼한 문화의 상징인 소도 등은 모두 새와 관련이 있어 응준은 오히려 마한, 그중에서도 영산강 유역 마한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복암리 고분에서 '응○'라는 명문이 새겨진 녹유탁잔의 출토 역시 이러한 추정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용맹한 사람' 뜻을 내포하고 있는 '응준'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에 "마한의 사람됨은 몹시 씩씩하고 용맹스러웠다"라고 한 기록을 떠오르게 한다. 마한인은 '응준'처럼 용맹스러워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역사적 사실로 남아 후세에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진서 사이전에도 "(마한 사람은) 성질은 몹시 용맹스럽고 사납다"고 하여 마한인의 용맹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조족문토기(영산강 유역출토)

역시 같은 사이전 기록에 "나라 안에 역사가 있으면, 나이가 젊고 힘 있는 자들은 모두 등가죽을 큰 노끈으로 꿰어서 지팡이에 그 노끈을 매 내두르게 하면서 종일토록 소리를 지르고 일을 하지만 조금도 아파하지 않는다. 그들은 활과 방패와 창을 잘 쓸 줄 안다"고 되어 있다.

마한 사람의 용맹함을 중국인들이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한인들이 외세에 휘둘리지 않는 주체적이고 강건한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진서 사이전 마한 조에 "풍속은 기강이 적고, 꿇어앉고 절하는 예법이 없다"라거나, "어른과 어린이,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라고 하여 마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이 또한 마한이 중화질서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연맹체를 유지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6세기 중엽 무렵 것으로 여겨지는 복암리 1호분의 피장자의 녹유탁잔에 '응준'이라는 명문이 있는 것을 보면, 피장자가 세력을 형성하였던 다시들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이 '응준'이라 부르는 마한의 주된 거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차령 이남 여러 곳에 '매'와 관련된 기록이 집중되고 있다. 고려 충렬왕 원년 설치된 '응방(鷹坊)'이 나주 장흥부 관할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전라도 지리산에 '응준'이 서식하여 매년 공물로 진상한다."라고 하여, '매'의 산지로 전라도 지역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 지역과 '매'의 관계가 적지 않음을 알려준다.

'매' 곧 '응준'이 마한과 관련된 상징임은 분명하다. 마한과 관련된 상징이 선덕여왕 때 백제의 표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백제와 마한의 통합 이후 마한 세력이 백제를 대표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문헌의 마한 관련 문헌을, 국내외 사서에 흩어져 있는 흔적과 유기적으로 엮어내고 출토 유적 유물과 연결을 지어 해석하면 영산강 유역 마한사는 새롭게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박해현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시민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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