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터) 자산어보

@유지호 입력 2021.04.08. 17:15

'못견디게 그리운 /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2007년 1월 11일 늦은 오후. 목포항에서 출발한 쾌속선이 예리항에 들어서자 이미자의 구성진 목소리가 맞는다. 전날 내려진 풍랑주의보 탓에 1시간 남짓 높은 파도에 고생했다. 땅을 딛자 마자 김영선 당시 사회부장과 통화했다. 제철을 맞은 흑산홍어 현장 취재 지시를 받은 터였다. "낭만의 바다가 아니지."

200년 전, 정약전(1758~1816)이 신유박해 때 흑산으로 유배오던 때도 비슷했나 보다. '어물 장수들이 내지른 토사물과 똥오줌에 정약전은 뒹굴었다. 배가 치솟고 가라앉을 때마다 의금부 형틀에서 매를 맞을 때 하얗게 뒤집히던 고통이 살아났다.'

김훈의 소설 '흑산'은 1801년 약전의 뱃길 이야기로 시작한다. 약전·약용 형제는 서학(천주교)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각각 흑산도·강진에 유배됐다. '새벽에 출항한 돛배는 비금도, 도초 사이의 좁은 수로를 지나서 돛배는 일출 무렵 난바다로 나아갔다. . 물과 하늘 사이에 흑산은 있었다. 사철나무 숲이 섬을 뒤덮어서 흑산은 검은 산이었다.'

홍어장수 문순득, 어부 창대와 인연도 여기서 비롯된다. '순조실록' 1809년 6월 26일엔 '흑산도 사람 문순득(1777~1847)이 표류되어 여송국(필리핀)에 들어 갔었는데… '란 대목이 있다. 순득은 아시아 표류기인 '표해시말'의 주인공. 약전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다. 약용의 제자 이강회의 문집 '유암총서'에 실려 전해진다.

약전은 흑산도판 어류백과라 할 수 있는 '자산어보'를 썼다. 흑산도 물고기와 바다생물의 특징·습성, 쓰임새를 기록했다. 이를 모티브로 한 동명의 영화가 최근 개봉했다. 영화엔 뭍에서는 먹어보지 못했던 홍어 회 등을 맛보는 장면이 나온다.

한류성 어종인 홍어는 찬 바람이 나는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제철이다. 껍질이 얇고 부드러운 흑산 홍어는 최상품으로 친다. 몸통 살은 발그레한 빛이 돈다. 자산어보에는 홍어를 '분어'라 했다. 14년 전, 극심한 뱃멀미 끝에 칼 바람을 맞으며 갔던 어느 옴팍 진 예리선창가 선술집이 있었다. 할머니는 짚 위에 산복사꽃 같은 분홍 빛 나는 홍어를 독 안에서 꺼냈다. "홍애는 쫀득쫀득 허니 징 허게 차진 맛이 나는 지금이 제철이랑께." 무심한 듯 내뱉던 투박하고 찰진 그 목소리와 함께.

유지호 디지털미디어부장 겸 뉴스룸센터장  hwaone@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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