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약무호남 시무국가'를 떠받친 박광옥

입력 2021.09.02. 19:07 김현주 기자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벽진서원]

회재는 1526년 광주 매월동에서 태어나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는데

그가 죽기 1년 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호남은 ‘지역방어’의 소극적 전략에 

그치지 않고 구국의 힘찬 대열에 

자발적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그것이 의병이다. 

젊은 의병장들은 전장으로 떠나고 

67세의 회재는 노구를 이끌고 ‘소모모주’

즉 후방의 군수사령관이 된다. 

그는 보성 안방준, 해남 윤선도와 더불어 

호남의 갑부였는데 의병의 뒤를 대느라 

사재 5만석을 털었다고 한다

회재는 의병도청을 설치, 병력과 물자를 

모았고 집안 청년들을 부대에 편입시켜 

전장에 내보냈다. 

선조는 그를 ‘호남의 충의신’이라 극찬했다.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벽진서원]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이자 차이나(China)의 어근인 진(秦·Chin)은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을 남기고 15년 만에 멸망했다(BC 206). 이어지는 것이 장기판에 나오는 항우와 유방의 초한쟁패의 시대이다. 항우는 무인귀족 출신이되 유방은 벼슬이랄 것도 없는 정장(亭長)을 지낸 평민이었다. 이 전쟁을 유방이 역전하여 한(漢)을 건국하게 된다. 사마천은 '사기' 고조본기 에서 그 비결을 '삼불여(三不如)'라는 말로 정리한다. 유방이 천하를 얻은 뒤 낙양에서 잔치를 열어 말한다. "군막 안에서 계책을 짜서 천리 밖 승부를 결정짓는 일이라면 나는 장량(張良)만 못하다.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달래어 전방에 병력과 식량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다. 100만 대군을 통솔하여 싸우고 승리하는 일이라면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셋은 모두 인걸인데 그들을 쓴 사람은 나다. 책사 범증(范增) 하나도 못 거느린 항우를 꺾고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다."

장량, 소하, 한신을 한초삼걸이라 한다. 장량은 군사(軍師)이고, 한신은 명장이되, 소하는 병참(兵站)에 불과한데, 유방은 소하를 제1공신으로 꼽았다. 진나라 하급관리였던 소하는 망탕산 도적떼에 불과하던 유방 패거리를 불러내 꿈을 갖게 했다. 민심을 얻어 봉토의 제후로서 기틀을 마련했고, 군졸 한신을 알아보고 대장군으로 천거했으며, 행정과 보급을 도맡은 '총리'형 인물이다. 유방군이 진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여 대부분 금은보화 전리품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 소하는 기록보관소에서 지적도와 호적부 등 각종 문서를 챙겨 훗날 전쟁의 정보를 비축했다. 팽성대전에서 유방과 연합군의 60만 대군이 항우의 3만 별동대에 궤멸당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병력과 식량을 보내 기사회생시킨 것도 소하였다. 초한전쟁 4년, '사면초가'와 '패왕별희'의 항우가 멸하기까지 한의 병력과 물자는 소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소하는 훗날 한의 상국이 되어 천수를 누렸다.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삶을 보면 소하와 닮은 구석이 많다. 회재는 1526년 광주 매월동에서 태어나 1593년,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치는데, 그가 죽기 1년 전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왜군은 부산 상륙 18일 만에 조선을 초토화시키며 한성까지 점령했다. 그들은 명을 친다는 명분에 따라 한반도를 사선으로 그으며 북상했기 때문에 호남은 공격루트에서 빠져 있었다. 비교적 온전했던 호남은 '지역방어'의 소극적 전략에 그치지 않고 구국의 힘찬 대열에 자발적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그것이 의병이다. 임금의 파천과 한성 함락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일어선 이가 나주의 김천일이고, 담양의 고경명, 화순의 최경회가 뒤를 잇는다. 뜻을 세워 격문을 돌리고, 창의 기병 하였으되 물자가 없으니 회재가 그 일을 맡는다. 회재는 고봉 기대승보다 한 살 위로 교우가 각별하였고 의병장들도 고봉의 제자가 많아, 그들은 고봉을 매개로 동지가 된다. 젊은 의병장들은 전장으로 떠나고 67세의 회재는 노구를 이끌고 '소모모주(召募謀主)', 즉 후방의 군수사령관이 된다. 전쟁에는 모병이 제일 중요하고, 무기와 식량, 마초 등 군수물자가 끝없이 들어간다. 회재는 보성의 안방준, 해남의 윤선도와 더불어 호남의 갑부였는데 의병의 뒤를 대느라 사재 5만석을 털었다고 한다. 군량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모병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명분과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소하가 관중지역의 병사와 식량을 모아 형양의 유방에게 보낼 때 자식 둘과 조카를 딸려 보냈으니, 모병은 그런 자기희생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회재는 '의병도청(義兵都廳)'이라는 임시 군수보급청을 설치하여 병력과 물자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막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제자와 조카 등 집안 청년들을 부대에 편입시켜 전장에 내보냈다. 회재는 딸만 넷이고 아들이 없다. 김천일이 이렇게 모은 호남의병 3백을 이끌고 출격하여 수원 금령전투에서 왜군을 참살하는 승리를 이뤄냈다. 또 고경명 부자가 순절했던 금산전투에도 수백의 의병을 지원했으며,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끈 최경회의 휘하에도 호남의병을 보내 승리의 원동력으로 작용토록 했다. 권율이 수원전투에서 패한 뒤 광주에서 재기할 때도 병력과 물자를 대었고 특히 대흥사 승장 처영에게 병력 1천을 딸려 보내 이치전투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다. 선조는 그를 '호남의 충의신(忠義臣)'이라 찬하고 나주목사를 제수했다. 회재는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서 민심을 수습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규합하고,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장에 조달하는 일을 하다 이듬해 신병이 악화돼 숨을 거두었다.

광주벽진서원

회재는 조광조의 제자 정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시작해 21세에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 바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개산송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다. 그는 고향에 머물면서 서당을 세우고 전답을 희사하여 향교를 재건하는 등 교육에 애정을 쏟았다. 1563년 광주향교 중수 기념으로 빗돌을 세웠는데 앞면은 고봉이 쓰고, 뒷면은 회재가 지었다. 또 하나 지금까지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개산방죽'이다. 당시 이 일대 임야가 수리에 취약하여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자 회재가 사재를 내어 저수제방을 만든 것이다. 18세기 읍지를 모아 편찬한 '여지도서'에 따르면 '1568년 축조한 개산제는 둘레 2,649척, 수심 4.5척의 방죽'으로 꽤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회재가 쓴 향약의 서문에 '땅이 메마르고 물이 낮아서 가뭄이 들기 쉽고 홍수가 지면 모두 재앙을 입게 되므로 부자는 가난하기 쉽고 가난한 사람은 떠나기 일쑤이다. 불과 수십년 동안 온 마을이 썰렁해져 천민이나 후생들이 어찌 그 본심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쓴 대목이 있다. 치수는 나랏일이거니와 거기에 투입될 막대한 예산과 노력을 짐작해보면 공동체 정신이 아니고서는 결코 엄두를 낼 수 없는 대사이다. 회재는 방죽을 쌓아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그 위에 정자 '수월당'을 지어 기대승, 박순, 고경명 등과 경세와 학문을 논하며 교유했다. 개산방죽은 이후 4세기에 걸쳐 이 지역 농사의 젖줄이 되었고, 지금까지 연꽃이 피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회재는 45세 늦은 나이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관 교관으로 첫 벼슬을 시작했다. 49세에 별시 문과에 급제, 운봉현감이 되어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비'를 세운다. 고려 우왕 때 이성계가 남원 황산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섬멸한 대첩을 기린 비다. 일제강점기 강제 폭파되어 산산조각 난 것을 1957년 재건한 것이 지금의 '파비각(破碑閣)'이다. 전라·충청의 도사를 거쳐 예조정랑, 지평의 벼슬을 지냈다. 이어 성균관 직강을 거쳐 영광군수·밀양부사로 부임했는데 그는 수령으로 재직하는 곳 마다 쌀 수백석의 사재를 내어 향교를 세우고 후학교육에 힘을 쏟아 여러 지역에 그의 송덕비가 세워졌다.

회재는 1581년 사관의 일을 맡았을 당시 이조좌랑 이경중을 탄핵하는 일에 나선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이경중이 정여립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그가 진출 기용되는 것을 저지'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율곡 이이 역시 이경중에 대해 '본래 학식이 없고 성질이 고집스러우며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습성'이 있는 인물로 평가절하하며 탄핵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일은 9년 뒤인 1589년, 서인에 의해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확대되며 1천여 명의 사림이 희생당한 '기축옥사'에 휘말리게 된다. 정여립은 '천하가 공물인데 어찌 정해진 임금이 있겠는가?'라고 주장하며 군주에게 절대 복종하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부정한 혁명적 지식인으로 훗날, '동양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회재는 정여립을 폄훼한 이경중을 탄핵했으니, 사관으로서 정론을 지키려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정여립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회재에게도 불똥이 튀어 삭탈관직 되고 낙향하기에 이른다. 회재 사후 1602년 광주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세웠고 그 사당이 1604년 개명된 '벽진서원'이다. 1681년 김덕령이 합사되면서 사액서원인 의열사로 바뀌었으며 회재는 도승지에 증직되었다. 그 뒤 훼철되었다가 1927년 운리영당이 신축되었고 2018년 벽진서원이 복설되어 오늘에 이른다.

소하는 '성야소하 패야소하(成也蕭何 敗也蕭何)'라는 말을 낳았다. 성공도 소하에게 달려있고 실패도 소하에게 달려있다는 뜻이다. 박수는 앞에서 받지만 일의 성패는 묵묵히 일하는 뒤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말이다. 충무공이 남긴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는 말도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꾸려 전장으로 내보내는 회재의 모습에 이르러 완성된다. 동시대를 살았던 광주의 선비들 가운데 별이 된 사람들, 학문은 기대승에게서, 의절은 박상에게서, 충용은 고경명에게서 찬란하되, 회재 박광옥에게서 반짝이는 것은 지혜다.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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