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칼럼] 20세기 페미니스트 박원순을 위한 변명

@서해현 광주 서광병원장 입력 2020.07.30. 11:30

"희망을 가지세요." "한국인이 다 되었네요."

이 말을 칭찬과 격려로 사용했다면 주의해야 한다. 전자는 장애인에게, 후자는 이주민을 향한 모욕적 표현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욕설만 모욕이 아니다. 악의 없이 한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장을 찌르는 비수가 될 수 있다. 강릉원주대학교 다문화학과 김지혜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에서 말한다. 모욕할 의도가 없었는데 문제가 될까? 확인할 방법은 어렵지 않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된다. 21세기를 사는 20세기 인간에게는 낯선 개념이다.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말이 모욕적인 이유는 장애인의 현재 삶에 희망이 없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삶은 당연히 희망이 없다는 생각,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삶에 가치를 매기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이주민에게 한국인이 '다 되었다'는 말 역시 모욕적이다. 이 말은 당신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국인이 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리고, 국적 선택 권리를 무시하며, 한국인이 아니면 안된다는 의미이다. 배제와 강요이다.

2020년, 21세기 한국은 19세기와 20세기 가치관이 공존하는 독특한 나라이다. 의식의 기저에는 남녀유별 남존여비 장유유서 등 조선말기 유교적 고루함이 여전하다.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는 전체주의, 개인의 자유와 자존감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또는 이기주의 등 다양한 20세기 흐름도 여전하다.

손님에게 무례한 욕을 해도 붐비는 식당이 있다. 21세기 식당에 19세기가 공존한다. 욕쟁이 할머니 식당이다. 전국 곳곳에 성업하고 있다. 친절과 서비스는 주인 마음대로 한다. 식사 예절도 주인이 정한다. 잘못하면 사투리 섞인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는다. 그래도 식당은 만원이다.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고객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욕을 먹어도 즐거웠다. 나쁘지 않았다. 지난 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박원순은 탁월한 인권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성평등의 새 길을 여는데 공헌한 페미니스트였다. 1998년 대법원은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 사건' 상고심에서 성희롱을 새로운 유형의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3년전 서울고등법원은 법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판결했었다. 그러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변호인으로 참여한 대법원 재판은 원심을 파기하며 성범죄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했다.

이 외에도 박 전 시장은 여성인권 증진에 큰 기여를 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에서 피해자 권인숙을 변호하여 가해자의 유죄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남성의 혀를 깨물어 상해죄로 유죄 판결 받은 여성의 항소심 변론도 했다.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로 인정받아 무죄를 이끌어냈다.

그는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등을 설립한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대부이다. NGO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았다. 청렴결백 그 자체인 사람이다. 지속적 기부활동으로 그의 재산은 마이너스. 빚만 칠억원이다.

20세기 기준으로 그는 완벽한 공인(公人)이었다. 그러나 탁월한 20세기 인간이 21세기 낙오자가 되었다. 인생 절정의 순간에 나락으로 추락하였다. 그는 1956년생. 제국 신민 양성을 위한 19세기 학교시스템에서, 20세기 교육을 받은 인간이, 21세기 화두인 젠더 양성평등 앞에서 쓰러졌다. 성범죄 문제를 가장 잘 아는 정치인이었지만, 그는 아는 대로 실행하지 않았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관행과 나태라는 덫에 걸려 삶을 버리는 비극이 벌어졌다.

서울시장이라는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 문제였을까? 권력은 자발적 사랑과 비자발적 복종을 구별 못하게 한다. 권력자들은 힘에 의한 비자발적 복종을 자발적 사랑으로 착각하기 쉽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항상 새롭게 성찰해야 한다.

21세기 세상은 차별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인식하지 못한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지만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드물다. 착각이고 신화이다. 약자의 눈물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눈을 부릅뜨고 보아야 한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평화는 정의에 기초한다. 관계가 정의롭지 않으면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먼 길을 가려면, 우선 돌아서서 자신과 이웃을 살피고 출발해야 한다. 삶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나를 발견하는 여정이다. 서해현 광주서광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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