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핏, 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다
저녁을 지나는 바람이
떠나지 않고 나를 깨운다
낮에 강가를 걷다
만난 바람이었나
나무숲을 지나 흐르는 강물위에
아직 물들지도 않은 여린 나뭇잎
바람에 떨어져 강위에 흐른다
가을 오후는 온통 눈부신 햇살로 부서지는데
세상에 버려진 나뭇잎 하나
나무줄기에 남아 떨고 있는
나뭇잎
먼저 떨어져 강위에 떠가는 나뭇잎
우수수 우수수
서로를 바라보며
지극한 눈빛으로 노래를 한다
언젠가 너를 따라가리라
바위 숲을 지나
풀숲을 지나
어느 호숫가를 지나
먼 바다에서 너를 만나리라
버리고 떠나는 것은
너를 향한 진정한 만남이니
슬퍼하지 말아라
시간과 시간은
너와 나를 연결하는 끈
가을 오후 늦은 바람이 나를 가만히 안아준다
아! 깊고 아늑한 그의 품
따뜻한 눈물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가을 어느 날
저녁
(한희원의 시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전문)
여행을 할 때 기간이 정해진 경우 타이트한 일정으로 강행군을 하다 보면 피곤이 몰려온다. 조지아는 도로 사정이 좋지 않고 험준한 산악지역이 많아 이동하는 과정에서 피로도가 더한다.
트빌리시를 벗어나면 중앙선이 없는 도로가 대부분인데, 트빌리시 시내에서는 그렇게 얌전하던 운전수들이 시외로 나가면 곧바로 돌변한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길에서도 추월을 일삼아 탑승객에게 식은땀을 흘리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시외를 운행하는 마슈르카(미니버스)는 대부분 낡았다. 빈자리가 없이 빼곡히 앉아야 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가야 한다. 출발 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빈자리를 채울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기다림이 익숙하지 않은 한국의 여행자들은 속이 타는데 조지아 운전수와 서양인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렇지만 요금이 저렴하고 이런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느슨한 기다림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다준다.
한국 여행자들은 바쁜 삶을 살다 여행을 오기 때문에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놓치고 잠에 빠져들기 일쑤이다.
예전에 인도 북부의 자치 도시 라다크를 찾아갈 때 아스라한 절벽 길을 7시간 동안 달린 적이 있다.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하얀 뼈만 남은 트럭들이 뒹굴고 있었다. 절벽 쪽에 앉은 여행객들은 자기도 모르는 긴장감에 운전수와 같이 브레이크를 밟으며 간다. 도착할 즈음이면 한쪽 허벅지에 쥐가 날 지경이다.
그렇지만 반대편에 앉은 여행객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천하태평으로 잠을 잔다. 모름지기 줄을 잘 서야 한다는 일행의 말에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던 일이 생각났다.
쿠타이시로 가는 날은 피곤이 점점 몰려오는 시간이었다. 상념에 젖기도 하고 잠깐씩 잠에 빠져들기도 했다. 차창 사이로 보이는 나무도 없는 바위산에 십자가가 햇빛에 반사되는 모습에 정신이 차려졌다.
바위에 세운 철 십자. 단단한 두 물체가 만나 강인하고 절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신앙의 근원은 사랑이라는데 사랑을 유지하는데도 국가로서는 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조지아의 쿠타이시는 오랜 기간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BC 6~1세기까지 흑해 근처에서 발생한 고대 콜키스 왕국의 수도였다. 975년부터 1122년에는 조지아 왕국(바크라티온 왕국)의 수도로 위용을 떨쳤다. 쿠타이시는 과거에 주변 강대들의 전쟁터로 1810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기 전까지 조지아의 땅에서 러시아, 페르시아, 터키 군대들이 치열하게 싸웠던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으로 쿠타이시에는 수많은 유적지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1810년 러시아제국과 합병한 후 자동차 공장이 들어서는 등 조지아 제2의 공업도시로 불리었다. 인구가 100만을 넘는 곳이었으니 상업 활동 또한 가장 활발한 도시였다.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후에는 조지아의 각지에 세워진 공장들이 폐허로 변해갔다. 조지아를 여행하면서 녹슬고 퇴락한 큰 규모의 공장들이 방치되어 있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쿠타이시는 인구가 20만명 정도로 도시의 기능이 쇠퇴했다.
조지아는 소매치기가 없고 안전한 나라로 인식되어 있는데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범죄율이 월등히 높다. 조지아 국가 차원에서 쿠타이시를 살리기 위해 국회를 이곳으로 옮겨 회의를 하고, 대통령의 신년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기도 한다.
조지아의 여느 도시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활발하고 복잡한 도시 쿠타이시는 조지아의 국가 '자유'를 작곡한 음악가 팔리아슈빌리(1871~1933)의 고향이기도 하다. 조지아의 화폐 '2라리'에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내일은 리오니 강변에 있는 우키메리오니 언덕 위의 지붕색이 사랑스러운 바그라티 대성당을 찾는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